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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구칼럼>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선생

하루 열두시 그 어느 때인들 고국을 그리지 않았겠는가
등록날짜 [ 2016년03월29일 12시11분 ]

양자강의 마지막 다리가 개통되면서,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소주(蘇州)와 남통(南通)을 이은 다리를 소통대교(蘇通大橋)라 부른다. 남통에 일찍부터 가고 싶었지만, 무석의 강음대교(江陰大橋)를 지나야 하기 때문에 너무 멀어 갈 수 없었다. 다행히 소통대교의 개통으로 200여km가 줄어들어 갈 수 있었다. 남통의 시가지는 항주나 소주에 미치지 못하지만, 바른 속도로 변하고 있였다.

남통에 도착하기 전 김택영선생의 묘가 남산(南山)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남산이 아니라 낭산(狼山)이었다. 낭산은 일찍이 이리(狼)가 살았다고 하거나, 이리 같은 모양이라 낭산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남통은 애국시인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선생이 망명하여 살았던 곳이다. 공원입구에 강해제일산(江海第一山)이란 비석이 크게 있었다. 케이블카로 산에 오르니, 유유히 흐르는 양자강이 넓게 보였다. 원래 이 낭산은 양자강 속에 있는 섬이었는데, 한 쪽이 막혀 육지로 변한 곳으로 남통에는 유일한 산이며 관광지였다.

이곳에는 당나라시대 초당 4걸(初唐四傑)로 유명한 시인 낙빈왕(骆宾王)의 묘가 있다. 내려오는 길에 김택영선생의 묘라는 팻말이 있지만, 중국인들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참배하는 사람이 없었다. 몇 년전에 후손이 왔다갔다는 말은 들었지만, 한국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김택영선생의 시(詩) 한편을 보면


루(樓)에 올라

남에서 날아오는 기러기 소리 시름 많은 나의 잠을 흔들어 깨워,

밤에 홀로 높은 루(樓)에 올라서 보니 달빛만 하늘에 가득 찼구나.

하루 열두시 그 어느 때인들 고국을 그리지 않았겠는가

멀고 먼 삼천리 이역 땅에서 이 한해를 또 다시 보내야 하는가

아우도 형님도 이젠 늙어서 모두 다 백발이 성성한데

그리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조용히 청산에 누워계시리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조국을 되찾고 산과 들에 무궁화 하얗게 피면,

푸른 물결 출렁이는 2천리 압록강에 배 띄워 두둥실 고향으로 돌아가세


고국을 위해 몸 바친 선생의 묘가 이렇게 쓸쓸히 있다는 것이 너무 서글펐다. 그러나 나 혼자 묵념을 마치고 나니, 그래도 한 번 찾아와 참배했다는 것이 마음의 위안을 느꼈다. 김택영선생은 1850년에 태어나 1927년에 자결한 분으로 한말 유학자이다. 그는 시(詩)의 황현(黃玹)과 문(文)의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으며, 역사 서술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의 본관은 화개, 호는 창강(滄江)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는데 특히 대문장가였던 박지원(朴趾源)의 저서를 탐독했다. 17세에 성균관 초시에 합격했고, 19세 때 이미 문장이 널리 알려졌으며, 23세에 평양·금강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빼어난 시문을 남겼다. 강위·이건창·황현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882년 김윤식의 추천으로 임오군란 때 서울에 들어온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건(張騫)과 알게 되었는데, 장건은 그의 시문을 격찬했다.

42세 되던 1891년에 과거시험을 치러 진사가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의정부주사, 1895년 중추원서기관 겸 내각기록국 사적과장을 지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권이 사실상 상실되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1908년 중국으로 망명, 남통에서 장건의 협조로 정착하여 출판사 일을 보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안중근전을 펴내 민족의식의 고취를 꾀했으며,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항의하여 자결한 친구인 황현의 행장과 시문을 모아 황현본전·매천집·속매천집 등을 펴냈다. 한편 이승만 등과 관계를 가져 중국정부에 우리나라의 독립지원에 대한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그의 거처에는 장지연을 비롯하여 중국에 망명한 지사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한편 중국의 계몽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 등과 교우하면서, 당시 문장과 학문에서 중국의 강유위(康有爲) 등과 어깨를 겨루었다. 공원 관리인에게 누가 찾아 오는가 물어보았더니, 아무도 찾는 이가 없다고 한다. 김택영선생의 묘를 그대로 쓸쓸히 놔둘 바에는 고국산천으로 모셔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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