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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체코 프라하의 얀 후스 동상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프라하 성과 대통령 궁 그리고 성 비투스 성당 등 회포(懷抱)
등록날짜 [ 2020년05월24일 10시49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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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2019년) 12월 하순에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다녀왔다. 프라하 성과 대통령 궁 그리고 성 비투스 성당을 구경하고 카렐 다리를 지나서 천문시계를 보기 위해 구시가지 광장에 도착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 즐비한 구시가지 광장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난다.

사진 1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의 크리스마스 마켓
 
광장 가운데에서 얀 후스(1372∼1415) 동상을 보았다. 후스는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다가 1415년 7월6일에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에 처해진 종교개혁가이다. 

후스 동상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5년(후스 화형 500주년)에 세워졌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독립했다.  한편 체코는 슬로바키아와 1993년에 분리 독립하여 2005년에 EU회원국이 되었다.

얀 후스는 마치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온 것처럼 두 조각상 사이에 우뚝 서 있다. 오른편에는 종교전쟁에서 승리한 후스파 전사들 조각이고, 왼편에는 1630년대 반종교개혁 시대에 체코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다.

후스 동상 앞면엔 글이 적혀 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진리를 요구하십시오.”뒷면에도 글이 있다. “ 나의 민족이여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당신의 나라가 당신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사진 2  얀 후스 동상

얀 후스는 보헤미아 후시네츠에서 빈농(貧農)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프라하 카렐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1400년에 사제 서품을 받고 1402년에 베들레헴 채플에서 설교를 맡았다. 이어서 1402-1403년과 1409-1410년에 카렐 대학 총장을 지냈다.

영국의 신학자 존 위클리프(1320~1384)의 글에 매료된 후스는 모국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위클리프의 신념을 지지했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교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위클리프의 사상은 보헤미아에 일찍 전파되었다. 1382년에 보헤미아 왕 벤첼의 누이동생인 앤 공주와 영국의 리처드 2세가 정략결혼을 했다. 보헤미아 학생들은 영국 옥스퍼드로 유학하여 위클리프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고, 귀국 후 위클리프의 사상을 프라하 대학에 알렸다.   

  
한편 후스는 베들레헴 채플에서 라틴어가 아닌 체코어로 설교했다. 벽에는 메시지를 풍자적인 그림으로 그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했다.  또한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함께 식음한 사실에 근거하여 이종성찬을 주장했다. 그동안 사제들만이 포도주를 마신 전례를 깬 것이다.

1410년에 후스는 종교개혁 투쟁에 뛰어들었다.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타락에 항거했다. 1412년에는 교황 요한 23(재위 1410∼1415)세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하는 공개논쟁을 벌였다.


로마 · 아비뇽 · 피사 등 3곳에 교황이 있는 카톨릭 교회 분열 시기의 피사 교황인 요한 23세는 원래 군인이었는데, 그는 사도라기보다 타락한 정치가였다.


1412년 9월에 요한 23세는 후스에게 성무금지령(聖務禁止令)을 내렸다. 10월에 후스는 프라하를 떠나 보헤미아 남부에서 2년간 〈교회론〉등 저술에 열중했다.

1415년에 후스는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사형선고 직전 후스는 교황 비판을 철회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후스는 진리를 거스를 바엔 차라리 한 줌의 재가 되겠다며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7월 6일 화형 직전에 이렇게 말했다.  

 "오늘 당신들은 볼품없는 한 마리의 거위(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라는 뜻임)를 불에 태우지만 100년이 흐른 뒤에 영원히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얀 후스의 유언이 맞았을까?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1483~1546)는 독일 비텐베르크 대학 성(城)교회 정문에 면죄부 판매를 항의하는 ‘95개조의 논제’를 붙였다.

수도사 테첼은 면죄부를 팔면서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해준다고 약속했다. 면죄부 판매 대금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자금이었는데, 이는 로마 교황청의 타락의 전형이었다.

루터는 ‘95개조의 논제’ 중 제36조에서 “진정으로 참회하는 모든 사람은 면죄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그리스도로부터 자신의 죄를 사면 받을 권한을 가진다.”라고 주장하며 면죄부 판매에 정면 도전했다. 백조가 나타나 종교개혁에 불씨를 붙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요한 23세는 성직(聖職) 매매와 여성 스캔들 때문에 체포되어 1415년 5월29일에 불명예 퇴위당했고 1419년에 죽었다.

사진 3  프라하 구시가지 광장의 천문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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