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敵軍 대장에게 4억 5천말 달러 상납한 김대중
4억5000만 달러 불법송금 지시한 김대중은 조사를 받은 적이 없다!
임동원에게 "실정법에 어긋나더라도" 송금 지시.
對北불법송금 지시자인 김대중은 이와 관련하여 검찰 및 특검 조사를 받지 않았다. 그 6분의 1인 770억원의 모금을 지시한 혐의로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자청하였다. 그럼에도 김대중 세력은 朴 대통령을 연일 공격한다. 이게 正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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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6월 金大中-金正日 평양회담은 李長春(이장춘) 대사의 표현을 빌리면 「노벨평화상을 받기 위하여 매수한 것」이다. 2003년의 對北불법송금사건 特檢수사기록을 精讀(정독)한 기자는 이 회담을 준비하기 위한 남북한 비밀회담이 민족문제를 다루는 장소가 아니라 장사꾼들의 흥정판이란 인상을 받았다. 현대그룹을 내세워 金正日 정권에 뇌물을 얼마나 주느냐 하는 깎고 올리기 흥정이었다.
金大中 당시 대통령이 현대그룹을 창구로 하고 국정원을 시켜 4억5000만 달러를 金正日의 마카오內 비자금 계좌 등으로 보내 준 행위는 대한민국이 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再수사하여 단죄되어야 할 세계역사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희대의 對국민 사기극이었다.
金大中씨가 결정적 순간에 이렇게 위험하고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그에 대한 북한정권의 오랜 투자와 접촉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1946년에 그는 좌익사상을 청산했다고 말했지만 권력을 잡은 뒤 그의 언동과 정책에선 이념적 本色(본색)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행태라고 매도되어 온 그의 행동엔 이념적 자발성과 소신이 발견된다.
그는 金正日의 비자금 계좌로 보내는 돈이 군사비로 전용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불법임을 인식하고도 송금을 지시했음이 확실하다. 林東源(임동원) 당시 국정원장은 『金대통령께서는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더라도 송금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主敵의 수괴가 해외에 숨겨 놓은 비자금 계좌로 4억5000만 달러를 보내 核무기 개발이나 對南공작비로 쓰도록 하는 것이 실정법에 「다소」 어긋나는 정도라면 金大中씨는 대한민국을 국가로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對北불법송금 지시자인 김대중은 이와 관련하여 검찰 및 특검 조사를 받지 않았다. 그 6분의 1인 770억원의 모금을 지시한 혐의로 박근혜 대통령은 검찰 조사를 자청하였다. 그럼에도 김대중 세력은 朴 대통령을 연일 공격한다. 이게 正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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月刊朝鮮 2006년 12월호
『미국이 못살게 굴어 核실험』
지난 10월9일 金正日이 核실험을 한 이후 한국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예상 외였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면 그동안 對北 굴종적 태도를 보여 왔던 盧武鉉 대통령도 일선을 긋고 대결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 관측이었다. 10월9일 오후 盧대통령은 그런 자세 변화를 강하게 시사했다.
『한국 정부도 이 마당에 와서 포용정책만을 계속해서 주장하기는 어려운 문제 아니겠습니까. 효용성이 더 있다고 주장하기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처럼 모든 것을 인내하고 양보하고 북한이 어떤 일을 하든 간에 다 수용하고, 이렇게는 해나갈 수 없게 된 것 아닙니까』
기자는 이 말을 듣고 나의 홈페이지(natizen.com)에 이런 글을 올렸다.
<위에서 말한 인식변화를 盧대통령이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지켜보아야 국민들은 속지 않게 된다. 盧대통령의 말을 믿으면 절대로 안 된다. 그의 실천을 보고 판단해야 한다. 「너무나 엄청난 태풍이 불어오니 여기에 맞서다간 날아가 버린다」는 위기감에서 일단 피하고 보자는 뜻에서 한 변명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는 우선 인책인사를 해야 한다. 통일부 장관, 국방부 장관 등과 청와대의 안보관련 참모들을 잘라야 한다. 청와대와 정부핵심 자리에 앉아 있는 386 주사파, 즉 「金正日 추종 공산주의 운동권 출신들」을 내보내야 한다. 이들이 국민들을 저주하고 미국을 공격하면서 對北 굴종정책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盧武鉉씨에 대한 국민들의 不信은 그가 金正日의 對南 공작에 적극 호응한 배경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核개발, 韓美연합사 해체, 보안법 폐지, 연방제는 金正日 정권의 4大 對南 적화전략이었다. 盧정권은 전폭적으로 이 4大 전략을 지원하고 동조했다. 이런 일들이 없었던 것처럼 치부하고 말을 만들어내어 국민들을 설득할 순 없다. 盧武鉉의 과거정리가 필요하다>
盧대통령이 정책 전환을 모색하고 있던 지난 10월11일 金大中 前 대통령은 전남大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북한의 核보유를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압박과 경제제재를 계속하면 북한의 도발을 조장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對北 포용정책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해괴한 여론이 돌아다닙니다.
北核실험은 햇볕정책이 아닌 미국이 못살게 굴고 살길을 열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北核실험을 두고 햇볕정책을 거론한 것은 타당한 주장이 아닙니다』
2007년의 內戰的 상황
이는 누가 보아도 盧대통령에 대한 압박이었고 곧 효력을 발휘했다. 盧대통령은 기존의 對北정책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금강산관광을 계속하고 통일부 장관에는 이종석 現 장관보다 더 「왼쪽」인 이재정씨를 내정했다. 한때 「脫김대중」을 모색했던 盧대통령은 金大中씨 집을 찾아가 점심식사를 함께 하는 등 굽히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盧대통령이 급조했던 열린당이 스스로 수명이 다했음을 선언한 가운데 前·現職 대통령이 결속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주도권을 金·盧 두 사람이 쥐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권력을 쥔 현직 대통령과 유권자의 약 25%의 여론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전직 대통령이 악수하면 한국의 左派(좌파)와 호남세력이 연계되어 막강한 표집단이 될 수 있다는 계산에서 나온 말이다.
문제는 「盧武鉉+金大中」 연합세력이 金正日 요소를 선거판에 끌어들여 다시 從金정권을 만들어 내려고 무리를 할 가능성이다. 金大中씨의 이념성향과 지역기반이 金正日의 對南 적화공작과 결합된다면 한국은 지금의 「말로 하는 內戰的 상황」에서 피를 부르는 內戰상태로 갈지 모른다는 악몽이 생긴다.
애국행동 단체에선 「金正日+金大中+盧武鉉은 核개발 共犯이고 대한민국의 3敵」이란 표현을 쓴다. 일부 호남사람들은 金大中씨를 호남사람들 손으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시위도 한다.
10월9일 核실험 이후 한국의 국정방향을 對北굴종 쪽으로 이끈 키 플레이어는 金大中씨이다. 그의 역할에 의해서 盧대통령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그 다리마저 불질러 없애 버린 느낌이다. 金正日이 核실험을 하면 대한민국 대통령은 당연히 韓美동맹을 강화하고 유엔과 협력해 對北압박과 제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盧대통령은 이런 결속이 요구되는 순간 결정적인 反美親北 노선을 취하고 만 것이다.
金正日·金大中·盧武鉉 세 사람의 이런 노선은 필연적으로 이 세 사람을 공동운명체로 묶고 있다. 金大中씨의 연결고리 역할에 의해서 남북한 정권이 공조하여 국제사회, 미국 그리고 대한민국의 헌법질서에 도전하는 형국이 조성된 것이다. 金正日에게 돈을 주고 약점이 잡힌 상태에서 합의한 2000년 6·15 선언으로 좌익득세의 사변적 상황을 만든 金大中씨의 위험한 게임이 다시 시작되었다.
鮮于宗源 검사와 보도연맹 강사
여기서 큰 의문이 하나 생긴다. 金大中씨가 盧武鉉 대통령을 끌어당겨 미국과 유엔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힘과 의지는 자신의 것인가, 아니면 金正日의 작용이 들어간 힘과 의지인가? 金大中씨가 보여 준 金正日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일방적인 태도는 단순히 굴종적이라는 말로써 표현할 성격이 아니다.
그는 지난 6월 訪北(방북)을 추진하다가 金正日로부터 매정하게 거절당해 국제적인 창피를 당했다. 그는 金正日에 대한 강한 유감을 드러내어야 할 입장인 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북한이 공개적으로 核실험을 예고하자 金大中씨는 거의 매일 공갈치는 金正日을 편들고, 미국을 비난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북한의 核무장은 물론이고 심지어 6·25전쟁에도 미국의 책임이 있다」는 식의 극좌적 역사관을 피력했다. 「이런 사람이 과연 한국의 대통령이었나」 하는 놀라움은 연속되는 더 놀라운 발언들에 묻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미국은 그의 생명을 두 번 살려 주었다. 1973년 납치사건 때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다. 그런 그가 미국에 대해서 「金正日을 악의적으로 무시하고 못살게 굴어 核실험을 하도록 했다」고 공격했다.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더구나 노벨평화상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 대해서 「악의적」·「못살게」란 표현을 공개적으로 할 정도라면 金大中씨는 속으로는 미국을 원수처럼 여기고 金正日을 사모하든지 북한을 사상적 조국으로 여기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가피하게 만든다.
『金大中씨가 드디어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었다』라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한 지난 10월 말에 기자는 鮮于宗源(선우종원) 변호사를 찾아갔다. 4년 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鮮于변호사는 광복 직후 좌·우익 대결에서 오제도 검사와 함께 좌익 소탕에 앞장섰던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서울지검에서 근무할 때 「保導(보도)연맹」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여러 수사기관에서 같은 좌익사범을 돌려가면서 조사하고 무리하게 범인을 만들기도 하는 것을 본 공안검사들은 한 번 수사를 받고 나온 좌익사범에 대해서는 신고를 받아놓고 더 이상의 수사를 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1949년에 좌익 前歷者의 신고를 받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20만 명 이상의 신고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을 보도연맹으로 조직한 검찰은 경찰과 협조해 교육을 하게 되었다. 보도연맹 설립자인 鮮于 당시 검사는 『공산주의자들을 전향시키는 데는 전향한 공산주의자가 강사로 나서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鮮于변호사는 4년 전 기자에게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서소문의 배재학당이 있던 자리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1950년 초로 기억됩니다. 전국에서 道별로 두 사람의 보도연맹원을 강사요원으로 추천받게 되었어요. 나는 전남·북을 맡았는데 이때 전남에서 올라온 강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가 공산주의 이론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는데 어떻게나 청산유수로 잘 하는지 겁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눈이 새까맣고 얼굴은 통통한 사람이 참 똑똑해요. 첫 강의가 끝난 뒤 제가 그를 검사실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추궁했습니다.
「오늘 강의를 들어보니 의심이 간다. 최근까지 공산당 했던 사람이 그렇게 공산주의를 비판할 수 있나?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그렇게 잘 알았다면 일찍 전향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물었더니 「진심으로 전향했다」고 맹세를 하더군요. 그 뒤 이 청년을 강사요원으로 썼는데 아마 6·25 때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보도연맹 교육에 참여했을 겁니다. 이 청년이 金大中씨였습니다』
총무차장인가 운영위원인가?
金大中씨는 광복 직후 좌익 신민당에 입당해 목포지구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했다. 1946년 10월 전국적으로 번진 좌익폭동에 가담한 혐의로 경찰에서 조사받고 각서를 쓴 뒤 풀려난 적도 있다. 그는 「신민당이 다른 좌익 2당과 함께 남로당을 만들 때는 따라가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왜 좌익 前歷者 조직인 보도연맹에 가입하게 되었는가?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연행되어 조사를 받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답: 보도연맹이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사실이 있는 자들을 가입시켜 선도하던 단체로 경찰서장 등 기관장들이 지도위원이며 위원장만은 우익계 인사이나 기타 맹원들은 좌익단체에 가입 활동한 자들이었던 바, 본인도 좌익단체에 관여했던 사실이 있어 同 연맹의 운영위원으로서 수차에 걸쳐 찬조금을 낸 사실이 있습니다.
문: 당시 목포시 보도연맹에는 어떤 인물들이 관여하였던가요.
답: 지금 기억되는 인물로는 초대 위원장 吳○○, 2대 위원장 趙○○, 부위원장 薛○○(남로당 목포시당 부위원장), 총무부장 金○○(남로당원) 등이 있습니다.
문: 피의자가 위에서 진술한 2대 위원장 趙○○의 진술기록에 의하면 피의자가 보도연맹의 총무부 차장직에 있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본인은 同 연맹의 운영위원직에 있었던 사실은 있으나 총무부 차장직은 맡은 일이 없습니다. 당시 저는 해운회사를 自營(자영)하고 있을 때였는데 목포경찰서 사찰과 보도연맹 담당인 林春吉 경사가 저의 사무실에 수시 출입하며 형님, 동생 하고 지내는 사이여서 보도연맹이 생긴다는 말을 듣고 저도 좌익단체에 관여하였던 사실이 있기에 해당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사업과 정치적 포부를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에 가입이 되면 지장이 있으니 빼달라」고 하였더니 『자네는 돈이 많으니 찬조금을 내는 운영위원이나 하라』고 하여 운영위원이 되었을 뿐입니다〉
보도연맹의 핵심인물?
보도연맹 시절의 金大中씨에 대해 증언한 鮮于宗源 당시 검사.
鮮于宗源 변호사의 증언은 金大中씨의 주장보다는 趙씨의 진술에 더 가깝다. 전남도 전체를 대표하여 강사로 추천될 정도라면 돈만 내는 운영위원이 아니라 보도연맹의 핵심인물이었다는 추리가 가능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金大中씨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교육을 할 만한 이론무장이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감상적으로, 즉흥적으로 좌익에 가담한 인물이 아니란 뜻이다. 그의 좌익교육 前歷에 대해선 좀더 구체적인 자료가 있다.
金大中씨는 자신이 좌익정당인 신민당 목포시당 조직부장으로 있던 시절의 同黨 상임위원급으로 權庠植(권상직) 등과 같이 활동했다고 진술한 적이 있다.
權庠植이란 인물은 1971년 2월10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진술서를 수사기관 앞으로 작성하여 낸 적이 있었다(1980년에 軍 검찰은 이 진술서를 金大中씨 기소 자료에 덧붙여 재판부에 냈다). 權씨의 진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 당시 金大中은 새벽으로 공산당 교육을 받고 당 사무소에 와가지고 국제정세 및 국내정세를 말하고 나갔기 때문에 활동상을 잘 모릅니다. 1946년 10월 인민항쟁 이후 신민당이 해산되자 金大中이는 그 후 보니까 全南汽船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그 후로 金大中이가 금전관계 사고가 나자 共産黨에서 제명당하였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6·25 때 인민재판 목격』
1980년 육군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서 金大中씨를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한 증거자료에는 장금성이란 사람의 조선노동당 당원 등록 청원서 사본이 있었다.
장금성은 좌익계 民靑(민청)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가 조선공산당이 신민당(당수 白南雲), 인민당(당수 呂運亨)의 일부 세력과 합당, 남조선 노동당(당수 朴憲永)을 만들 때 따라갔던 사람이다. 그는 지하활동을 하다가 6·25 직전에 전향한 좌익들을 敎導(교도)하기 위해 조직된 보도연맹에 가입했었다.
그는 6·25 남침으로 인민군이 목포에 진주하자 1950년 9월7일에 다시 조선노동당 전라남도 목포시당 위원장 앞으로 당원 등록 청원서를 낸 것이다. 우리 경찰이 이 서류를 압수,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 문서에 金大中씨의 이름이 등장한다. 청원서의 요지를 소개한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아 그 달 19일 목포시 건국준비위원회 청년대에 입대, 9월20일경에 목포시 창평정 적색 로동조합 보안대 남부에 가입하여 치안확보에 노력하였으며, 1946년 6월16일에 민주주의 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 간부 김진강, 서득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民靑 사업의 취지 설명을 듣고 이에 적극 찬동하고 民靑에 가입하여 民靑 제22동 분회를 목포시 서산동 김판섭 동무 집에서 결성하는 데 참가하였고 맹원 획득에 주력하였음.
매주 3회씩 목포시 금화동 윤양신 동무 집에 강습 장소를 정하고 민청 목포시 위원회 위원장 송제경, 부위원장 김창균, 김대중 동무들에게서 교양을 받았으며 분회장 김판섭 동무의 지시에 의하여 1946년 9월23일 총파업 직전에 모든 선전투쟁에 참가하였음>
金大中씨는 합수부에서 軍 검찰로 송치된 후인 1980년 7월17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장금성은 모르는 사람이며, 民靑 목포시지부 부위원장이라는 직위를 가진 적이 전혀 없다. 본인이 부위원장이었다고 그 서류만으로 인정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고 말했다.
軍 검찰은 그러나 장금성의 자필 기록을 받아들여 金大中씨에 대한 공소장에서 「신민당(후에 공산당, 인민당과 합쳐 남로당이 됨―편집자 注) 목포시 위원장이며 그 후에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하다가 행방불명된 이채현의 권유로 위 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공산계열의 행동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던 중」이라고 적었다.
장금성의 글에는 民靑 목포시 위원회 부위원장이던 金大中씨가 신민당 간부로서 조선공산당원이던 장금성을 설득하여 民靑에 가입시키고 맹원들을 교육할 정도로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金大中씨는 6·25 남침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북한공산군이 우익 청년을 인민재판으로 처형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는 1980년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을 때 자술서에서 이런 표현을 했다.
<많은 한국인들이 6·25를 겪어 공산주의의 실태를 체험함으로써 반공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보며, 역설적이지만 한국 반공의식의 최대 앙양자는 金日成과 공산군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됨>
천주교와 張勉 아래로
6·25 직후 서울에서 목포로 돌아온 金大中씨는 좌익 前歷으로 해서 보도연맹 처형 때 국군에 붙들려갔으나 「호명착오」로 살았다는 안기부 기록이 전한다. 한편으로는 북한군 측에 붙들려 옥중에 있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탈출했다는 자신의 증언이 있다.
6·25 戰後 「좌익 前歷者」라는 꼬리표가 붙은 그는 반공의 보루이던 천주교 세력에 접근해 보호를 받았다는 증언도 있다. 그의 친구인 崔書勉(최서면)씨의 회고담이다. 대한매일 1999년 6월12일자 金大中 대통령 인터뷰 기사에 崔씨가 거명되어 있다. 金 당시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은 崔書勉씨라고, 그때 서울교구 사무국장으로 있던 제 친구가 주선했는데, 張박사를 代父(대부)로 소개해 준 사람도 그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張박사하고 영적으로 代父·代子의 관계가 되었고, 그 인연으로 저는 新派(신파)의 총수인 張박사 밑에서 젊은 엘리트로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崔書勉씨에 따르면 당시 웅변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던 金大中 대통령은 金相賢(김상현) 前 의원과 함께 경향신문 4층에 있던 자신의 천주교 총무원 사무국장 방으로 자주 놀러 왔다고 한다.
그때 金대통령은 崔書勉씨에게 『천주교 신자가 됐으면 좋겠으니 신부를 한 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한다. 崔書勉씨는 당시 崔南善(최남선), 金性洙(김성수), 吳華英(오화영) 등에게 교리를 가르쳐 명성이 높은 尹亨重(윤형중) 신부를 소개했다.
金大中씨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리학습을 했다고 한다. 尹亨重 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자네가 보낸 그 사람 똑똑해. 질문하는 거 신랄하고…』 했다고 한다. 영세를 받은 金大中씨는 崔書勉씨에게 「토마스 金大仲」(金大中 대통령의 改名 전 이름―편집자 注)이란 사인이 적힌 사진을 하나 보냈다.
영세를 받고 나서 金大中씨는 『뭐가 되고 싶냐』는 尹亨重 신부의 질문에 『정치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尹신부는 崔書勉씨에게 『직속 상관이 張勉 박사니까 자네가 소개하라』고 이야기했다. 崔씨는 金大中씨를 부통령 겸 민주당 최고위원인 張勉 박사에게 소개했다. 崔씨의 증언.
『張勉 박사와 盧基南(노기남) 주교는 천주교의 가장 큰 고민이 人材難(인재난)이라고 말해 왔어요. 3·1 운동 때 천주교 대표가 참가 못 한 것을 한스럽게 생각했으니까요. 인물을 길러 보자는 의미에서 李弘圭(이홍규: 李會昌씨의 선친. 당시 검사), 金大中씨 등을 환영한 겁니다』
崔씨는 張勉 박사에게 『저는 정계 진출을 안 하니 저를 생각하시듯이 金大中씨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이런 깊은 내용이 있어선지 張勉 박사와 盧주교는 金大中씨를 각별히 대해 주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았던들 金大中씨가 하루아침에 민주당 상무위원, 선전부장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崔씨는 말했다.
『1972년 金大中씨가 망명한 뒤 美 CIA와 한국 중앙정보부로부터 질문을 받았고, 駐日(주일) 미국대사 로버트 잉거솔의 특별보좌관인 아마코스트(駐日 美대사 역임)가 직접 찾아와 물었습니다. 주로 「金大中 종교는 가짜 아니냐. 金大中 자신은 가톨릭에 다니면서 부인이 개신교에 나가는 것은 선거 때 표를 얻으려는 전략 아닌가」 등이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공격할 게 있고 안 할 게 있다」고 했어요. 나와 金大中의 관계를 소개하고, 「그 사람의 신앙은 의심하지 말라」고 했어요』
1960년 4·19 학생의거로 李承晩 대통령이 물러난 뒤 민주당이 집권하고 張勉씨가 국무총리가 되었다. 李承晩 대통령 아래 張勉 총리의 비서실장이던 鮮于宗源씨는 張총리派로 몰려 탄압을 받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8년간 망명생활을 보낸 뒤 귀국해 조폐공사 사장이 되었다. 돌아와 보니 보도연맹 교육요원이던 金大中씨가 국회의원이 아닌 데도 민주당 대변인으로서 張勉 총리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鮮于씨가 張총리에게 金씨의 사상문제를 지적했다. 張총리는 『나도 그런 말을 많이 듣고 있는데 의원총회할 때 해명하도록 시켜야겠다』고 말했다. 며칠 뒤 鮮于씨가 다시 張총리를 만났는데 총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金大中 대변인에게 이야기를 시켰더니 한 시간 동안 해명을 하는데 모두가 말솜씨에 감탄했다. 의심이 풀렸다』
북한공작원들과 만든 反국가단체
북한정권이 金大中씨에게 주목하고 그를 포섭대상으로 삼아 접촉을 시도한 최초의 사건은 1967년이었다. 金大中씨의 목포상업고등학교 1년 선배인 鄭泰默(정태묵)은 金씨가 목포에서 좌익 신민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할 때 남로당원으로 일하다가 구속되어 7년형을 복역 중 6·25를 만나 풀려났다. 그는 1960년대 북한으로 올라갔다가 간첩이 되어 내려왔다.
鄭씨는 1967년 총선 때 목포에서 출마한 金大中씨에게 접근해 선거전략을 가르쳐 주고 선거운동원을 소개해 주었다. 鄭씨는 임자도 간첩사건의 주범으로서 1968년에 구속, 사형이 집행되었다. 정보부는 金大中 의원이 鄭씨를 간첩으로 알고 만난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여 기소하지 않았다.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진 金大中씨를 金日成 정권은 공작대상으로 삼았다. 1972년 10월 유신선포 후 일본과 미국을 무대로 反정부 활동 중이던 金씨에게 접근한 것은 在日民團 파괴공작에 앞장선 조총련계 북한공작원들이었다. 金大中씨가 이들과 합세해 만든 것이 「韓民統(한민통)」이었다. 金大中씨는 이 단체의 의장으로 취임하기 직전에 납치되었다.
李厚洛(이후락) 정보부장은 『그를 납치하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韓民統이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金大中씨를 의장으로 추대해 對南공작에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우리 대법원은 이 단체가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對南적화에 종사하는 反국가단체라고 규정했다.
법원과 검찰은 이 단체의 핵심인물인 조직국장 郭東儀(곽동의)의 경우 북한에 잠입해 공작원 교육을 받고 온 인물이라고 보았다. 金大中씨가 1981년 대법원에 의해서 사형이 확정된 이유는 反국가단체 韓民統의 수괴였다는 점 때문이다. 2004년 서울고등법원은 金大中씨에 대한 재심 선고 때 광주사태 관여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으나, 韓民統 결성 부분에 대해선 유죄인정을 파기하지 않았다.
金大中 납치에 대한 北의 보복
金大中씨가 韓民統 결성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그는 북한의 對南적화 노선과 맥을 같이하는 연방제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이 통일방안은 북한을 反국가단체로 규정한 우리 헌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즉, 한반도의 유일合法국가인 대한민국을 反국가단체인 북한과 同格으로 놓겠다는 것이 이 통일방안의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