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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625가 끝나고 10여년이 훌쩍 넘은 시기쯤
서울 변두리에 살던 나의 이야기다.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 북한과는 일체의 교류가 없었기에 정보도 있을 수 없었고 더구나 중공과 소련이 북한과 접경하고 있기에 더욱 강한 북한으로 인식 되었었다. 그런 까닭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늘 풍전등화라는 말을 뇌까리며 살았었다. 그런 북한은 수시로 무장간첩의 남파로 늘 위협적이었고 빨갱이를 경험했던 박정희는 그로 인해 전쟁에 대한 정신무장과 열세의 무기 현대화는 이 나라 지도자로서 급선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어린 아이들에게까지도 반공교육과 유비무환 심지어는 임전무퇴라는 사자성어까지 동원하여 자유국가를 지키겠다는 철저한 각오를 가졌을 것이며 이는 국민도 같은 생각이었다. 당시 단파라디오에서는 북한에서 방송하는 난수표 방송이 끊임없이 나왔었고 간첩활동 또한 끊임이 없었다. 어느날 아침, 화단의 화분에 김일성 사진과 그들의 주장을 인쇄한 인쇄물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토록 간첩들은 주변에 가까이 있었고 곧바로 공포였다. 국가기관에서 말하기를 그런 고정간첩은 지금도 무수히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 : 영천에 사는 경수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입니다. 9, 8, 32560, 12800.... 이상은 영천에 사는 경수 어머니께 보내드리는 편지였습니다. <----- 이게 당시 북한에서 간첩에게 보내는 난수표 방송이다.)
이런 시기에 가난의 퇴치는 희망이 없어보였다. 정치는 부정부패가 극심 했고 허구한날 깡패집단의 위협으로 정상가동되지 못하고 표류하며 자신의 배만 불려보겠다는 아전들의 극성만이 판을 쳤었다. 대개의 국민들은 그런 행태의 정부에 기대를 꺽기 시작했고 대한민국은 희망이 없었다. 516은 그런 꼴을 보다못한 군부가 발기한 것이고 그것은 이 나라에 있어서 정말 하늘이 돕는 것이었다라고 밖에 난 지금 생각 할 수가 없다. 516은 천재적인 슬기로움이 없으면 할 수 없었던 일이고 박정희는 국민의 가난에 대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목숨을 내 놓았던 사람이었다. 이런 그를 어떻게 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서울 한복판에 전차가 가르릉 - 굉음을 내며 버스처럼 운행 되었었다. 지금 편의점 영수증만한 전차표를 사서 전차에 오르면 앞뒤 칸막이 운전석엔 기억자로 꺽인 스텐손잡이 운전대 하나만 달랑 붙은 전차가 주렁주렁 동그란 손잡이를 길게 늘어트려 흔들며 서울 시내를 달렸다. 타마구 바닥에 기차레일 처럼 전차레일이 깔려 있었고 그 라인을 따라 전차가 운행 되었었다. 속도는 버스와 비슷했고 운행을 시작한 전차에 달려가 뛰어 오르는 일도 있었지만 지금처럼 안전을 위해 통제하는 일은 없었다. 그 당시 대개의 안전은 개인이 책임을 지던 시절이었다. 여름이면 씻지않은 새까만 손발을 하고 아이스케끼를 팔던 가난한 아이들에게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2원하던 그것을 한개 사먹기도 하였다. 아이스케끼는 지금의 비비빅과 맛과 모양이 같은 팥을 넣은 아이스케끼와 순 얼음에 착향시킨 것 그리고 우유를 많이 넣어 당시 20원의 고가였던 삼강하드가 대부분 이었는데 삼강하드가 바로 롯데의 것이었다. 한편, 가을이면 덕수궁 돌담길이 아름다웠고 겨울이 되어 눈이오면 명동성당이 아름다웠었다. 다쓴공책 뜯어서 딱지접어 놀던시절 인쇄된 딱지도 있었는데 그 모양은 직사각형에 조잡한 인쇄로 군인의 모습이나 무기가 그려져 있었고 계급이 그려져 있었다. 직경 1센티메터 정도 굵기의 동그란 유리구슬을 가지고 일명 다마치기를 하며 놀았으며 나무로 깎은 팽이를 가지고 놀기도 하였다. 팽이 중심에는 쇠구슬을 박아 넣거나 훗날에 나온 기계로 깎은 팽이에는 총알의 탄두를 빼내어 꽂아 넣기도 하였다. 그 때쯤엔 딱지도 발전하여 동그란 모양이 되었으며 그림도 만화영화의 내용이 인쇄되었고 군의 계급 대신 별그림의 숫자가 대신 하였다. 먹고 버린 깡통을 ?어모아 오리고 펴서 그것으로 장난감이던 쓸만한 생활용품을 만들어 팔았고 흙이나 시멘트로 저금통이나 연통을 만들어 팔았다. 번데기 장사는 연탄화덕을 리어카에 싣고 솥단지를 얹어 특유의 구수한 번데기 향으로 아이들을 끌었고 강랭이 장사와 엿장사는 북과 꽹가리로 신명나게 궂거리 장단을 치며 온동내 고물을 ?어 모았다. 그 때 그신명나는 북과 꽹가리 소리를 들려주던 사람들은 바로 지금의 국악 명인들이었다. 난지도에 쓰레기 매립을 하면서 등에 커다란 대바구니를 둘러멘 소위 넝마주이라는 재활용 도우미들이 동내 쓰레기통을 뒤지며 종이나부랑을 ?어 모아갔다. 동내에선 연중 고사를 지내는 곳이 종종 있어서 떡과 막걸리를 돌려 먹기도 하였고 일부 무당이 궂을 하는 곳도 종종 있었다. 삼각산 줄령 반악재에선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고 사람이 죽으면 생여로 장사를 지냈고 가을이면 농악을 놀기도 하였다. 황새가 논두렁에 앉아 미꾸라지를 잡아 먹고 늦가을 까마귀가 까르르 까르르 울며 맴돌고 철새 기러기나 오리가 떼지어 북쪽 하늘을 향해 새까맣게 줄지어 날아가는 모습을 보았던 이것이 불과 50년 전 후의 서울에서 삶의 모습이다.
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 ㅡ
쌓은 공도 찬란한 백마고지 용사들아 ㅡ
아주 오래전 흥얼거리며 부르던 노래의 일부다. 당시 마을에서는 아무개가 월남 파병에 다녀온다는 이야기와 온 마을에 월남전 이야기가 늘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노래는 그 시절 파월장병을 위해만든 백마부대의 노래로서 공보부에서 만든 노래다. 아마 봉봉사중창단과 이씨스터즈가 부른 노래였을 것이다. 그 시절은 1970년 휠씬 전이었는데 정확한 년대는 기억나지 않는다. 궂이 조사하여 년대를 기록할 이유는 없다. 이 글을 적는 목적은 당시의 상황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너무 그 시절을 모르고 목청을 높이기에 바르게 알고 이 나라를 이끌어 달라는 뜻이기에 자세한 연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때는 버스의 마후라(연통)가 뒷쪽 지붕 위로 구부려 올려붙인 것도 있었고 대개 승하차 문은 앞쪽과 뒷쪽 두군데에 있었으며 차장 또는 안내양이라 불렸던 승차요금을 받는 사람이 문앞을 지키고 있었다. 안내양은 사람을 모두 태우고 버스에 올라서는 동시 차체를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 ~ 하고 일본말을 일본 말인 줄도 모르며 외치면 버스가 출발하였다. 버스 의자는 버스 길이방향으로 길게 나무로 엮어만든 쿠션 없는 의자가 대부분 이었으며 합승이라는 미니 버스도 있었다. 당시 나는 몰랏었는데 시골버스는 버스를 타고 가다 언덕이 나오면 승객이 모두 내려 버스를 밀고 버스가 언덕에 다 올라가면 다시 타고 다녔다 한다. 내가 살던 곳은 응암동부근의 전통마을이 있었는데 종로에서 당시의 시간으로 한시간 정도의 거리이지만 길의 절반은 논과 밭이 따라붙는 시골길과 다를 바 없는 서울길이었다. 즉, 종로에서 2, 30분만 가면 논과 밭이 나오던 시절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뒷받침은 마부라는 영화의 배경을 보면 될 것이다. 바로 그 영화 배경이 지금 말하는 시기이다. 미아리가 그랬고 경동시장쪽도 그랬으며 강남이 그랬고 구로가 그랬으며 불광동이 그랬다. 그 바깥쪽은 대개가 등잔불과 호롱불 켜고 살았었다. 서울 시내에 전차와 우마차가 다녔었고 시장통이나 전차 정류장 등에는 과일 행상들이 무질서하게 리어카 장사를 했었고 짐나르는 자전거와 지게꾼들이 바글거리며 바쁜 삶을 살았었다. 대개가 날품팔이 일로 그날 벌어 그날 쌀을 사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시는 그래도 그렇게 하여 밥끼니 굶지 않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 그런데 당시 촌은 상황이 달랐다. 가을에 추수를 하면 소작한 사람은 소작료로 농사 지은것 대부분을 지주에게 주어야 했고 겨우 먹을 곡식을 얻으나 늘 부족함이었다. 그렇게 농사가 끝나면 남자들은 할일이 없어 모이면 술판 모이면 투전판에 세월이 갔고 봄이되면 식량이 떨어져 나물로 나무껍질로 허기를 메웠다. 흔히 말하는 초근모피 바로 그것이다. 이걸 보고 보릿고개라고 말한다. 당시 평균 수명이 60살이 채 안되었다고 한다. 가난은 딸자식을 남에게 주어 밥상머리 입수를 줄이려 하였고 사랑 받이야 하는 어린 딸자식은 남의집 어색함과 두려움에 던져져 고된 일, 궂은 일, 하기싫은 일을 해내며 학대받고 살아야 했다. 그 나이가 고작 12살에서 18살 전후까지의 나이가 대부분이었다. 남 이야기여도 그 사정을 들어보면 지금도 눈물이 나는 이야기다. 시골에서는 많은 집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었다. 지금 당신 같으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렇게 해 낼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ㅡ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ㅡ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ㅡ
이 노래 역시 파월장병을 위한 맹호부대 노래다. 당시 자동차는 엔진룸에 발동기 하나만 달랑 들어있는 원시 자동차였고 시동도 자동차 앞쪽으로 가서 구멍에 쇠막대기를 꽂아넣고 돌려 시동을거는 원시자동차였었다. 1998년 인도에 갈일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런 자동차가 실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마치 옛날 영화를 보는듯한 그 기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 그러나 그 인도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던 나라였다. 한편, 마을에는 서울임에도 불구하고 동내 공동 우물이 사용 되었었고 고지대 사람들은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 커다란 물독에 채워 사용 하였다. 개천이 흐르는 곳에선 부녀자들이 모여 빨래를 하였고 대폿집에서는 냉면 사발에 젖가락을 넣고 두드리며 니나노를 불러댓다. 서울역이나 청량리 역에선 시커먼 증기기관차가 증기휘바람을 씩씩거리며 출발을 준비했고 준비가 다 되면 칙칙폭폭하며 목적지로 떠나갔다. 한자로 씌여진 대한항공 여객기는 흰바탕색에 빨강 가로 줄무늬와 파랑 가로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이 당시 해외 나갔다오는 사람은 출세 한 사람으로 인정이 될만큼 해외여행은 일반적이지 못했다. 대개의 사람들은 매스컴을 접하지 못하고 살았고 그중 조금 깨인 사람들은 광석 라디오를 들었으며 조금 나은 집은 진공관식 라디오를 들었고 간혹 장형 전축을 듣는 사람도 있었다. 장형전축속에서 흘러나오던 노랫가락 한국 고전음악들이 마이블루해븐이라던가 버닝럽으로 바뀌어갈즈음 대한민국의 새마을 운동은 치열했다. 누구나 열심히 하면 잘 살 수 있다 라는 희망이 있었다. 이런 국민의 열정을 이끌어 낸 사람이 누구였을까? 바로 당신들이 욕하는 박정희 그 분이시다. 새마을 운동, 바로 그것. 그 운동은 훨씬 오래 전부터 박정희가 집권하며 국민을 어떻게 움직일까 고민끝에 내 놓은 세계걸작명품 새마을 운동인 것이다. 새마을 운동은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던 사람들과 투전판으로 허송세월을 낚던 사람들을 일하게 하였고 보릿고개를 넘게 한 위대한 그의 업적이다. 새마을 운동은 일반인들에게 마을길 넓히기 지붕개량공사 가마니짜기 사방공사 제방쌓기 등등을 하게 하였고 국가는 도로 수리시설 아파트단지조성 공단조성 산업적으로는 경제개발계획 1,2,3차등등 온 나라를 역동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도대체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을 욕하는 그대는 어떤지도자를 원하기에 그를 욕하는가? 그를 욕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 되는가? 나는 그런 당신을 빨갱이 새끼라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고 능력도 되지 못하는게 허망한 공산주의 사상에 젖어 꼴값떠는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채개바라가 꿈이더냐? 쿠바로 가던지....한편 이 때 라디오건 티비건 나왔던 음악들도 나에겐 참으로 느낌이 좋았던 기억이다. 일부 금지곡이다 뭐다 제제를 당한 음악인들도 있어 분함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만....종이 울리네 꽃이피네 새들에 노래 웃는 그얼굴.... 그 얼마나 느낌이 고상한가.... 고상한 음악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 정서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순수 했었다란 생각이 든다. 통키타 하나만 있으면 즐겁던 시절 지금 발전된 사회를 살면서 그 시절이 그리운건 박정희를 알지도 못하고 욕하는 젊은 애들이 만드는 미래세상이 벌써부터 회의적이란 생각이 앞서서라면 이해 못하겠지? 너네 젊은 애들아, 너네 하는 꼬라지 보노라면 철없이 키운 네 부모들이 고생을 똥구녁으로 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째지게 없이 산 탓에 돈 많은 집으로 시집 장가 보내려는 정말 무식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 민족의 한계가 한 과도기로만 보기에는 민족성이 너무 무뢰하고 건방지며 버르장머리 없음이 잘못 가르치게 하는 이 나라 교육 시스템에 대해 개탄스러운 마음이든다. 박정희의 업적은 해외에서도 손꼽히는 리더쉽이거늘 그가 죽으니 그토록 그를 없으이 말하고 마치 역적질이라도 한듯 입에 거품을 물며 저주하는 그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살다 튀어나온 종족이란 말인가? 이야기가 옆으로 샛는데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하자면 고상한 음악중에는 박정희 작사의 새마을 노래가 있다. 그 노래 대한민국의 독재자 박정희가 너네 무능한 부모들 배부르라고 지어준 노래다. 그 노래 절대로 박정희가 자신의 작사실력 뽐내려고 독재 하려고 지은 노래 아니다. 그 노래를 들어봐라 그가 국민을 얼마나 사랑 했는지...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 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들잔다. 너도 나도 부지런히 우리 힘으로 하잔다. 그게 노동력 착취 구호냐? 그토록 그 지도자는 국민을 일깨워 주었던 분이시다. 그 노래가 나올때 쯤 이 나라는 유사이래 가장 역동적이었고 눈부신 발전을 하기 시작 했다. 광나루 보트장에서 수영을하며 마시던 한강물... 그 너머 모래밭에 잠실 아파트가 들어서고 차츰 강남이 만들어졌다. 산에서 메뚜기 잡고 놀던 서울이 논에서 미꾸라지 잡던 서울이 겨울이면 논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스케이트 타던 서울이 점점 도시화로의 태동되는 시기였다. 증기 기관차가 사라지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 시절이 불과 4,50년 전이다. 그토록 짧은 시간 속에서 너네는 어찌해서 그토록 변절자가 되어 악마의 자식이 되었냐? 통탄할일 아니냐? 박정희가 약속한 가난 퇴치가 세월가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라고 생각 한다면 그 시대를 살아온 나로선 절대로 동의 할 수 없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국민이 배고픔을 면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던 할 마음이었기에 그는 서슴없이 굴욕적 구걸 외교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알려졌다시피 케네디에 굴욕을 당했고 독일에서 동정을 받았다. 그의 애뜻한 애국 애민 사상에 독일 국민이 감동했다.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그런 대통령을 본적이 있던가? 전 세계에서 그런 대통령을 본적이 있던가? 악의적으로 그를 폄하해도 그는 폄하되지 않는다. 그는 이 나라의 등불이시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못다한 이야기를 적어 보겠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와 10월 유신 선거때였으리라. 당시 유인물에는 번영과 패망중 번영의 길을 선택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하려는게 아니다. 그당시 생활 모습을 이야기 하는중이었기에 그것을 말하려 배경을 깐 것일 뿐이다. 그 유인물이 나돌던 시절 찬서리가 내리면 가을 걷이도 마무리가 되어 빈 밭에는 벼를 털고 난 짚단을 쌓은 낟가리가 집채만하게 띄엄띄엄 자리잡고 한켠에선 콩을 터느라 바람개비를 돌리며 키질을 하고 참깨를 터느라 도리깨자루를 휘돌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또 지나면 김장들을 하느라 통배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사고팔기를 한다. 커다란 조선무 그리고 홍갓 촉파등등...김장을 할 때면 품앗이 하느라 동네 아줌들이 부억칼과 채칼을 들고 몰려 다니고 김장하는 집은 아궁이에 장작을 쑤셔 넣고 풍구를 돌려 불을 피워 따끈한 방바닥을 만들고 배추꼬랭이와 배추잎을 넣고 된장국을 맛갈지게 끓여내어 식사 대접을 한다. 김장 속을 버무리면 남자들은 속배기에 굴을 넣어 술한상을 즐긴다. 초가지붕 추녀 끝인지 고염나무 가지에선지 소쩍새가 소쩍이며 울 때 그렇게 마시는 막걸리 사발은 향이 그만이다. 초가집이라니까 시골 이야기 같지? 그런데 그게 불과 사, 오십년 전 서울 이야기란다.
동산에서 땔감 나무를 하다 산 관리인에게 걸리면 곧장 경찰서에 연행 되어 벌금을 물어야 했다. 이것도 독재나 민권 탄압이라고 말할테냐? 당시 전쟁때문에도 그랬고 생활방식이 아궁이에 불때는 방식이어서 의례 산에서 나무 한짐씩은 해다 놔야 밥값 한다고 하던 시절이어서 산에는 나무가 많이 부족 했기에 정부에서 나무를 보호하고 연탄을 보급했었다. 그러나 초가집이 즐비했던 그 시절 아궁이에 불때며 사는 집은 제법 많았다. 저녘무렵 산에서 내려올라치면 밥짓느라 굴둑에선 연기가 모락모락 매운 냄새를 풍기며 ?아져 나오고 동내 개들은 여기 저기서 웡웡 짖어댄다. 외양간에선 황소인지 움매 움매 누구를 부르는듯 울어대고 굴둑연기가 자욱해질 때면 술항아리 술익는 기막힌 향기가 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이 이야기가 불과 4, 50년 전후 서울의 이야기다. 여름날이 되면 한강에 멱을 감으러가고 샛강에서 재첩을 잡았었다. 그 재첩은 난지도가 만들어지면서 침출수의 오염으로 인해 더이상 잡는 일도 먹는 일도 없어졌다. 그무렵 국군의 날이면 여의도에서는 군장비 퍼레이드가 있었고 팬톰 전투기의 폭격시범이 한강에서 이루어졌다. 그 모습을 보려 한강주변 사람들은 고지대로 올라가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하였고 쌍안경이라도 있으면 한껏 그 진수를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의 교복은 계절별이었는데 남학생 동복의 경우 일제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검은 차이나 넥의 정장이었고 여학생은 흰색 카라가 유난히 컸던 역시 검은 자켓과 치마였으며 하복은 흰색 남방에 연청색 바지가 남학생 교복이었고 여학생은 흰색 부라우스에 검정색 치마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시대 복장 바로 그것이었다. 오래전에 일본에 갔을 때 일본 남학생이 그런 동복 복장을 한 모습을 보고 여러회상에 젖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중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 갔었고 국어 교과서에는 흔히 한자가 쓰였던 시절이었다. 한편, 봄이되면 모내기 품앗이로 온 동내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였고 소가 쟁기와 써레질로 온 논을 휘젖고 고르게 펴진 흙탕물 개흙?는냄새가 풀풀나는 그 논에 무릎을 빠쳐가며 모를 내고 새참들을 먹느라 논둑에 죽 둘러앉아 있을 때 누군가 거머리 떼느라 열중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때 막걸리 참 맛있었는데 요즘처럼 백반으로 맛을 낸 흉내만 내는 막걸리가 아닌 진정한 쌀 막걸리였다. 동네 잔치라도 있게되면 떡을하러 방아간에 가게된다. 커다란 발동기가 피걱퍼걱하며 힘차게 돌면 피대에 연결된 크고작은 바퀴들이 돌고 그에 연결된 기계들이 방아를 찧는다. 참 기막히게 재미 있는 그 기계들 아이디어가 참 좋았다는 생각이 지금도 든다. 발동기 하나에 그 많은 기계들이 맞물려 돌아가 일을 해낼 수 있었다니.... 가래떡 기계에 떡시루를 업으면 떡시루 잘 익은 떡쌀은 곧바로 절편이 되어 길게 빠져나온다. 그 따끈한 떡을 받아 먹노라면 맛이 기가막히다. 방앗간에는 그렇게 떡도 만들고 벼도 찧으며 고추도 빻았다. 잔치기념으로 사진을 찍을 땐 마그네슘 후레쉬로 섬광을 내어 환한 사진을 찍었고 설날이되면 오색 색동저고리에 쪽두리를 한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은비녀 쪽을 지은 할머니들은 한복에 털달린 쪼끼를 걸쳤고 긴 담배대에 가루담배를 눌러폈다. 당시 어느 집이던 방에 담배 댓진내가 코를 쑤셨지만 이상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면 째지게 가난 했던 집들은 동회에서 부역하여 받은 밀가루로 칼국수든 수제비든 애호박을 썰어 넣고 나름 맛갈지게 해 먹었고 어쩌다 왕소금 잔뜩 뿌려말린 고등어 자반이라도 구하면 석쇠에 얹어 장작불에 구우면 잔치가 부럽지 않은 밥상이었다. 또한, 손님이라도 들이닥치면 고기국이나 고추장볶음이 상에 올려지고 어쩌다 먹는 고기맛에 절로 밥이 넘어갔었다. 지금은 고기를 키우는 개에게 먹인다지? 그 시절엔 일년에 몇차례 밖에 못먹던 귀한 음식이었다네... 그게 불과 4, 50년 전의 일이라네...지금까지 두서없이 시간 될때마다 조금씩 적은 글들, 불과 4,50년 전후 서울의 사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당시 서울다운 서울은 너무나 작았고 그 속에서 수많은 소설이 만들어지며 오늘과 같은 세계적인 서울을 만들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516은 정말 잘한 일이었고 하늘이 이 나라를 굽어 살피신 것이리라.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누구나가 잘 해냈을 거라며 박정희를 역적 독재자로 몰아가는 인간들에게 나는 몇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1. 네 에미 애비도 너와 같이 그렇게 생각하냐?
2. 우리를 도와 주었던 필리핀이나 기타 동남아 국가도 지금 우리와 같이 잘 사냐?
3. 박정희 시대를 살아는 봤냐?
4. 대통령이 구걸한다는게 민족으로서 어느정도의 아픔인지 생각은 해 봤냐?
5. 이 나라 역대 대통령중 그 말고 누가 또 국민을 위한 헌신적인 삶을 살았냐?
6. 너네들이 떠들던 문민정부 해서 좋아진것은 뭐고 나빠진것은 뭐며 나빠진것에 대해 박정희를 대하듯 문민정부를 대해본적 있냐?
7. 국민이 금붙이 모아 놓으니까 제가 한것처럼 떠벌인 희대의 사기꾼에게 대들어본적은 있냐?
8.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떠든 놈을 지금도 우러러보며 그의 사기질을 질타 해 본적은 있냐?
9. 억지를 부리는 너네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며 너네는 박정희의 발톱에 때만큼도 안된다는걸 말 해 준들 느낌이나 갖을 수 있겠냐?
위에 답하지 못할거면 이 나라를 안다고 떠들지 마라.
55년전부터 오늘 날까지의 대한민국 발전은 전세계 그 어느 나라도 흉내내지 못하는 기적과 같은 것이었으며 그 업적은 영웅 박정희의 리더쉽이 만들어 낸 위대한 업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