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를 고양이라 보도하는 KBS의 독립성 이대로 좋은가
1.언론과 종교에 종북세력과 사이비종교세력들이 침투하여 활개치고 있다
언론마저 종북세력과 사이비종교세력들에게 이용을 당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월남 패망의 원인은 언론과 종교에 간첩세력들이 침투하여 활동한 것이었다. 언론계·종교계 등 각종 단체 조직에 침투해 들어가 혼란을 조장하고 국론분열을 일삼으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정부를 힘들게 했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의 상황과 너무나 같다.황장엽 씨가 김일성 집무실에 올려놓은 서류를 보았는데, 바로 전날 청와대에서 회의한 최신 회의록이 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청와대에도 간첩이 있다는 것이다. 황장엽 씨 증언에 의하면 대한민국에 간첩 5만 명이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언론인들이나 종교인들은 이 부분에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 만약 주변에서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여 국론을 분열시키는 보도를 한다거나 역사를 외곡한다거나 종북좌파 발언을 상습적으로 사용한다면 그는 간첩이거나 간첩에 동조하는 자이거나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갈 자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2.언론의 자유는 보호가 되어야 하지만 오보의 경우 즉시 정정보도하고 언론의 사명을 태만하게 한 경우에는 불이익에 상응하는 법률효과를 적용해야 민 형사상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이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지 이틀 만에 한국정부가 일본에 6만명 규모의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 야마구치 현(縣)지사가 5만명 규모의 ‘한국인 피난 캠프’ 설치를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는 KBS 보도는 핵심내용이 사실과 다른 오보라는 반론이 나왔다.KBS는 24일 <이승만 정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일본 망명 타진>, <“이승만, 일본 망명 정부 요청” 비밀문서 첫 확인>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내용을 보도했다.언론의 자유는 보호가 되어야 하지만 오보의 경우 즉시 정정보도하고 언론인의 주의의무를 태만한 경우에는 불이익에 상응하는 법률효과를 적용해야 할 것이다.
보도의 파문은 매우 컸다. KBS의 보도 직후 좌파매체들과 좌파들은 일제히 방송 내용을 인용해, 이승만 정부가 실제로 일본에 망명을 시도한 사실이 확인됐다는 취지의 기사를 언론과 인터넷에 쏟아냈다.그러나 KBS의 보도는 사실과 크게 달랐다.무엇보다 KBS의 보도에 나오는 ‘한국정부의 6만명 망명 의사 타진’이나, 일본 야마구치 현 지사가 작성했다는 ‘한국인 5만명 피난 캠프 계획’은, 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 남아있던 미군 및 그 군속과 한국 체류 외국인들을 위한 소개(疏開)작전을 위한 것이었다.이승만 정부가 6.25 전쟁 발발 직후 일본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설의 근원은 2006년 일본 방위성 학회지에 실린 한 편의 짧은 논문이었다는 것이다.
KBS가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의 근거로 내세운, 일본 야마구치 현 기록도 실체를 검증할 수 없는 인터뷰 구술 기록에 불과하다.“이승만 정부가 일본에 망명의사를 타진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일본 야마구치현 기록은, 다나카 지사가 직접 작성한 것이 아니라, 나중에 야마구치현이 다나카 지사의 인터뷰를 정리·기록한 것이다.”KBS 보도에 나오는 야마구치현 기록의 실체를 공개했다. https://library.pref.yamaguchi.lg.jp/ymg/ymg-kenshi / 山口?史 史料編 現代2. KBS 보도에 나오는 문건들이 이승만 정부의 망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쟁 당시 한국에 남아있던 미군 군사고문단과 그 가족, 이들을 호위하는 미 헌병대와,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대피를 목적으로 작성됐다고 설명했다.참고로 6.25 전쟁 당시 한국에는 500여명의 미 군사고문단과, 그 가족 및 이들을 지키는 미 헌병대가 상주하고 있었다. 이들 외에도 개신교와 가톨릭 선교사 등 다수의 외국인들이 체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95년 메일경제신문이 LG경제연구원과 공동으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1942년 기준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의 수(일본인 제외)는 8만3천여명에 달했다. KBS는 이런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일본 전직 현지사의 인터뷰 기록과, 미 육군 문서의 일부 내용만을 토대로, 이승만 정부가 일본 망명을 시도했다는 식의 무책임한 오보를 남발한 것이다.KBS의 보도를 보면,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과 관련돼 일본 외무성이나 한국 외교부에 사실확인을 요청했다는 내용이 전혀 없다.국가가 타국에 망명처 제공을 요청하고, 실제 이를 계획했거나 추진했다면, 한국이나 일본 측 공식 외교문서에 이와 관련된 기록이 존재해야만 한다. 망명정부 추진이, 몇 사람의 말로 추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따라서 다나카 전 지사의 인터뷰와 미 육군문서가, KBS의 보도처럼 이승만 정부의 망명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면, 이를 입증할 기록이 한국과 미국, 일본 3국의 외교문서 가운데 있어야만 한다.
당시 한국이 전쟁 상황이었음을 고려하더라도,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미 군정 문서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존재해야 한다.한국근현대사 전문가들은, 당시 일본이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이승만 정부 망명설이 사실이라면, 일본을 통치하던 미 군정 문서에 근거자료가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했다.당시 일본은 건국 이전의 한국처럼 미 군청의 통치를 받는 일종의 식민지적 성격이 강했다.따라서 독립국가가 아닌 일본이, 그것도 일본의 자치단체장인 현지사가 한국 정부의 망명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6.25를 연구하는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결과를 보더라도, 3국의 외교문서나 미 군정 문서에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 시도’를 뒷받침하는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야마구치 현은 일본의 초대 총독 이토 히로부미의 출생지이며,반도 침략의 거점이었다”며, 공영방송인 KBS가 일개 현(縣)의 기록과 미 육군 문서의 일부분만을 가지고, 한국정부의 일본 망명설을 사실처럼 보도한 것은, 상식 밖의 행태라고 지적했다.
앞서 KBS는 24일자 문제의 보도를 통해, 이승만 정부가 전쟁 발발 이틀 만에 일본에 망명을 요청했다는 취지의 보도를 내 보냈다.KBS는 위 보도에서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처에 대해 역사적 논란이 적지 않다”며, “그 가운데 하나가 ‘일본 망명 정부 요청설’”이라고 주장했다.그러면서 KBS는 “이승만 정부가 실제로 당시 미 군정을 통해 일본 정부에 ‘6만 명 망명 의사’를 타진했고, 일본이 ‘한국인 피난 캠프’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의 비밀문서를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보도했다.이어 KBS는 “한국전쟁 발생 직후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당하는 등 다급한 상황이라, 당시 한국 정부의 공식 기록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면서, “사실 확인을 위해 ‘망명 지역’으로 거론됐던 일본 야마구치 현청의 도서관을 찾았다”고 밝혔다.
3.그러나, 이승만 정부 일본 망명설의 출처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이것이 KBS 보도의 의혹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승만 전직”은 1910년 프리스턴 대학에서 조선인 최초의 박사학위(국제정치학)를 취득 하였고 당시는 미국인 이라 하드라도 그런 학위는 드믈었다, 그러한 사람을 독립 자금 횡령 이나 하는 파렴치한이라고 폄하 하는 것은 다만 지어낸 역사 왜곡으로 이해 될 수 밖에 없다. “이승만 전직”이 친일파” 란 주장에 대해서 아래의 내용을 인용하여 반박하고자 한다.
4."이승만 전직"이 친일파 인지를 알기 위해의 행적을 처음부터 일괄 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이승만 전직”은 1875년 3월 태어나 어린 유년 시절 부터 “낙동 서당”, “도동 서당”에서 공부 하였고 1895년 배재 학당에 입학 하였다..
2), “이승만 전직”은1896년 11월 30일 국민을 계몽 하고, 일본 등 외세 배척을 주장 하는 “협성회”를 조직하고, 이후 서기, 회장 등에 선출 되어 활동하면서.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 회보”를 창간하여 주필을 맡았다.
3), “이승만 전직”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4), “이승만 전직”은 1897년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
5), “이승만 전직”은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옥중에서 대한 민국 최초로 영한사전, 독립정신 집필
6), 이승만 전직”은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7), “이승만 전직”은 1904년 말 도미(渡美) 하여 1905년 부터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 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 이라는 논문으로 국제정치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ㅡ조선 최초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위 대학 입학 후 5년 만에 학사, 석사. 박사 학위 까지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학 총장에게 독립 운동을 위해 학위 수여를 수학 기간과 상관 없이 “수학 능력-졸업 논문”으로 판단 해 달라고 진정-설득 하는 등으로 노력 하였기 때문이다.
8), 이승만 전직”은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에는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9).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 받았다.
10),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11), 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12), 1919. 5월에 와싱톤에 집정관 총재부를 설치 6. 14에 미, 영, 불, 이 등 국가와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 정부 탄생통보 하고, 1919. 6. 18 일본 천황에게 국서를 보내 한국에 적법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으니 일본군대와 관리 및 일본인들의 한국에서 철수를 요구
13),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14), 1919년.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15),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처져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공산주의자), 경호국장: 김구 선생 으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6),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
17),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 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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