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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일성의 보천보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2017-06-21 19: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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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해방직전 북한에는 김일성이 20여명이나 된다...모두 항일운동 했단다...................................................................................

 

< 혜산사건 피의자들의 심문조서에는 국경지대를 소란케 했던 第6師長(제6사

 

장) 김일성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나이 36세(1

 

901년생)로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이었다. 이 사람은

 

절대 북한의 김일성(1912년생)과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

 

 

                          동북항일연군과 보천보전투


1936년 중국 공산당 산하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칭 개편되고 예하 第6師(제6

 

사)의 師長(사장)은 金日成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성명서나 문헌을 살펴보면 중국 공산당의

 

지휘하에 있던 이들의 목표는 일제를 몰아내고 東北失地(동북실지)를 회복하는 데 있었으며, 코민

 

테른의 지령에 의한 국제 공산주의 노선이나 중국 공산당의 排日(배일)정책에 보조를 맞췄다. 따

 

라서 이들의 목표는 조선독립이나 민족해방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거의 韓人만으로 구성된 第6師 같은 부대는 중국 공산당

 

의 外人部隊(외인부대)에 지나지 않았다.

 


第6師는 長白縣(장백현) 오지인 密營(밀영)을 두고 활동했다. 문제의 김일성 부대(第6師)는 항일

 

투쟁보다는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長白縣 일대와 甲山郡(갑산군) 일대에서 주로 韓人 농촌을 기

 

습, 약탈, 방화, 살인, 납치를 자행했다. 이들은 공산당 특유의 극단적이고 잔인무도한 만행으로

 

당시 그 지역 사람들을 극도로 괴롭혔다.

 

그때나 지금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일관된 특징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 단체, 주장을 무

 

조건 敵(적)으로 취급하고 무자비한 투쟁의 대상이며 敵과 대결하는 방법은 언제나 잔인무도한 폭

 

력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의 敵은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는 지주, 부르주아, 지식인, 자본주의,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국가 등이며, 심지어 항일투쟁에서도 계급혁명에 반하여 민족해방과 독립을 지상목표로

 

투쟁하던 민족주의자들도 敵으로 간주했다. 일례로 1930년 1월24일 민족주의 항일투사였던 金佐

 

鎭(김좌진) 장군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항일투쟁에서도 민족주의자들과 합류하지 못하고 끝까지 자신들의 길을

 

갔다. 그 결과 오늘날 한반도는 분단의 비극과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체험을 해야 했으며 아직

 

도 고난을 겪고 있다.


普天堡(보천보)와 그 일대의 韓人 동포들을

 

공포와 비탄 속에 몰아넣었던 보천보 습격

 

사건의 자초지종은 아래와 같다.

 


 

1937년 5월21일 동북항일연군 소속 第4師 부대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

 

보태리 上興慶水(상흥경수) 부락을 기습해 대대적인 약탈 납치를 자행한 사

 

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국경 일대의 일본 경찰이 총동원되어 第4師 부대

 

추격에 나섰다. 보천보 작전을 위해 사전에 현지답사를 끝내고 작전준비를

 

했던 김일성은(이 인물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님)上興慶水사건 때문에 보천

 

보에 치안 공백이 형성된 틈을 이용, 1937년 6월2일 대원 약 90명을 거느리

 

고 밀영을 떠나 다음날 강을 건너 보천보에 접근했다. 김일성은 6월4일 밤 대

 

원들을 6개 조로 편성하고 부락의 전화선을 절단한 후 기습을 개시했다.

 


당시 보천보는 韓人 280여 호, 日本人 26호, 中國人 2호, 합계 300여 호의

 

면사무소 소재지로 주재소(경찰 파출소), 보통학교(초등학교), 소방서, 우편

 

소 등이 있는 비교적 큰 부락이었다. 30분가량 집중사격을 가한 후에 주재소

 

무기고를 부수고 경기관총 1정,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1170발과 기타 물

 

품들을 탈취했다. 그리고 농사시험장과 소방서 등을 약탈하고 면사무소, 학

 

교, 우편소 등을 방화했다. 시가지에 들어가서는 주택, 상점, 병원 등을 털어

 

현금과 물자, 의료 기기와 약품, 곡물과 의류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한 뒤 철

 

수했다.


第6師가 항일전투부대라면 당연히 일본의 관서나 일본 경찰, 혹은 일본군 등

 

 을 상대로 작전을 해야 했다. 절대로 동포들에게는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 것

 

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에서 일본인이 피해를 본 것은 주재소 순사 1명이 부상

 

당하고, 주재소에서 잠자던 일본 순사의 두 살짜리 딸이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 우연히 거리에 나왔던 일본인 음식점 

 

주인이 총에 맞아 죽은 것 등

 

을 제외하고 피해자가 모두 우리 韓

 

 

人들이었다.

 

 

그들의 작전 목적이나 방법은 물자 약탈이 목적이었지 항일전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37년 8월23일에 김일성 부대는 만주 임강현 5道溝(도구)에 있는 채목장을

 

습격해 인부 5명을 납치했다. 9월3일에는 갑산군 운흥면 중평리에 있는 광산

 

세 개를 털어 사금과 금품을 강탈했다. 보천보 사건과 그 후 잇달아 벌인 약

 

탈로 혜산경찰서는 第6師에 대한 비상경비 태세에 들어갔다. 김일성과 내통

 

하는 국내인사들을 색출하고 權泰國(권태국), 金錫泰(김석태), 趙信濟(조신

 

제) 등을 체포해 第6師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혜산경찰서는 60명의 특별 

 

수사반을 조직해 장백현에 파송하고 김일성을 지원하는 조직망 11명을 체포

 

했다. 그 결과 국내에서 각종 공산당 조직에 관련됐던 162명, 장백현에서 60

 

명, 모두 222명이 체포됐다. 그 후 9월과 10월에 朴達(박달), 金成演(김성연),

 

李龍述(이용술) 등 279명이 더 체포되고 1·2차 검거에서 체포된 자가 모두 50

 

1명이나 되었다. 이것을 역사에서 惠山事件(혜산사건)이라 한다.
 

 

 

혜산사건 피의자들의 심문조서에는 국경지

 

대를 소란케 했던 第6師長(제6사장) 김일성

 

의 신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그는 당시 나이 36세(1901년생)로 모스크

 

바 공산대학 출신, 함경남도 태생이었다.

 

이 사람은 절대 북한의 김일성(1912년생)

 

과 동일 인물이 아니었다.

 

 

 

 

 


보천보 사건이 발생 5개월 후 1937년 11월13일 그가 만주의 撫松縣(무송현)

 

楊木頂子(양목정자)에서 부하 약 100명과 함께 휴식하고 있을 때, 일본의 滿

 

軍(만군) 보병 제7단 제1영의 포위 공격을 받고 부하 8명과 함께 사살됐다.

 

쓰러진 김일성의 시체는 항일연군 측이 회수하지 못했고 인근 주민들이 그의

 

얼굴을 보고 김일성이 틀림없다고 확인했다. 1937년 11월18일자 <京城日報

 

> 조간 7면에 그의 사망 기사가 “공산비적 김일성이 사망, 朝滿국경지대

 

주민들이 이제 근심을  덜었다”고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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