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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96주년 3.1절을 계기로 진정한 민족정체성을 되찾는 게기 돼야279반가워요756 2016-11-23 10:3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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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주년 3.1절을 계기로 진정한 민족정체성을 되찾는 게기 돼야

일제강점기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운동과 저항운동에 관하여
일제는 우리민족을 일본화 하기 위해 말살정책을 했다.
독립운동이나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강력한 탄압을 했다.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 역사관 건립 교훈삼아야
항일독립투사, 중형을 언도받은 수형자 ,모진 박해와 강제노역으로 옥사
동영상 첨부
http://www.youtube.com/watch?v=g6gEv0Ug4gk

마포 '경성형무소' 식민지역사관 건립해야
애국선열의 민족과 나라위해 걱정하는 호령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진정한 민족독립의 성지, 악명높던 마포 경성형무소이다

오는 3.1절 제96주년이자 8월15일은 제70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이날을 위해 우리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잃어 가면서까지 만세를 부르고 모진 고문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 우리 강토 그 어느 곳인들 독립을 위해 피 흘렸던 역사가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겠지만 지금은 잊어져 가고 있는 이 장소만큼은 그 의미를 다시 새겨야만 하는 한 장소가 있다.

바로 역사의 현장으로 독립투사들에게 악명 높았던 마포 경성형무소다.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역사의 뒤안길로 묻혀지고 있지만 바로 이곳이 독립에 몸 바쳤던 수많은 이들의 피울음이 새겨져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서부지방법원과 검찰청 자리 잡은 '경성형무소' 표지석 만이 당시 형무소였다는 사실 알려줘야 한다고 본다, 모진고문과 탄압 그리고 굶주림, 붉은 벽돌 생산하는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병사, 그래도 독립의지 지켜낸 의지와 투지 그리고 애국정신을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마포구 공덕리 105번지 경성형무소 자리에는 현재는 서울서부 지방법원ㆍ검찰청이 들어서 있지만, 당초 한일병합 조약 체결전인 1908년 서울 서대문구에 지어졌던 '경성감옥'이 수용공간이 적어지자 이곳 마포구 공덕동에 지은 후 1923년부터는 '경성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어 불렀었다.

경성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동안 대전형무소와 함께 무기수나 장기 수형자를 수용한 곳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의 숙부인 김형권이 옥사한 곳이기도 하다. 저의 증조부 또한 이곳에서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지난 1928년 5월 20일 이었다. 이런 중요한 경성형무소를 자취도 없게 철거한 후 공공기관을 건축하였다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어떻게 해야 아픈 과거를 잊지 않고 미래 발전의 동력으로 승화 시킬 수 있을까? 바로 이곳 경성형무소 자리 옆에라도 '경성형무소 식민지 역사관'을 건립함으로서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은 어떤가 한다. 비록 민족의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역사라 할지라도 일정 규모라도 복원해 전시함으로서 이를 후손들에게 보여주고 물려줘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포 경성형무소는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의 상징으로 악명이 높았던 형무소로 수많은 애국지사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옥고를 치루다 목숨을 잃은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곳이다, 이렇게 됨으로서 현재 표지석 하나 달랑 있는 문제점을 극복하고 산 체험의 장이 되어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거나 수모를 당하는 일이 없게끔 교훈 삼는 역사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들은 과거의 진실한 역사를 통하여 나라사랑 정신을 본받게 되고 애국정신의 근본이 될 것이라 점 때문이다.

아울러 이를 계기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도 잊혀지거나 역사 속에 묻혀가고 있는 미발굴독립유공자가 없게끔 정부는 자료발굴과 그 명예를 찾아 주는데 앞장서야 하지 않는가 한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는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재를 위해 그리고 먼 미래를 위해 반드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국가가 해야 할일은 시간이 흘러도 반드시 한다는 교훈을 남기기를 원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광복 70주년을 맞은 오늘, 국가보훈과 나라사랑에 대한 국가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재인식하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국민은 국가가 반드시 책임진다는 풍토가 확고하게 정착되기를 바라며 진정한 보훈은 말이나 구호보다 실천이 우선되고 나라위해 희생하신 애국선열이나 호국영령이 제대로 대우받고 추앙받게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기를 바란다. 글쓴이/정병기<미발굴독립유공자 후손/ 정용선 선생의 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관련 자료찾아 36년 고군분투

정용선(鄭溶璿, 1883년 ~ 1928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편집] 생애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투사. 정용선의 행적에 대해 구여순이 1919년 2월 28일 동생 은득(銀得)의 요청으로 3월 3일 상경하여 3·1운동에 참가하고 곧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3월 12일 고향으로 돌아와, 동지 최정학(崔正學)·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정용선(鄭溶璿) 등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어 배포하고 14일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 문서에 남아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명 서류가 없어 국가적인 유공자로 공인은 못 받은 상태이다. 그의 증손인 정병기(2010년 현재 53세)는“아버지와 친척 등의 증언을 종합하면 증조부인 정용선(1883년생) 선생은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던 독립운동가가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 날아왔다고 한다. 결정적인 증거로 그는“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증조부 이름을 족보에서 파버렸고 증조부가 실종된 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켰다는 사실은 독립운동을 했음을 뒷받침하는 명백한 ‘정황증거’라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 호적등본을 보면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는 기록 외엔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병기는 증조부가 독립유공자임을 인증하기 위해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주고 사오기도 했다. 일본 외무성에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2009년엔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까지 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국가의 독립유공자 자격 인증에 대해 정병기는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지난 80년 12월 실수로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더욱이 일본 외무성은 1995년까지 조선인 수형인 명부를 보관했지만 우리 정부는 단 한번도 그 서류를 요청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다. 객관적인 인증을 위해 더더욱 증빙자료가 필요한 현실이다. [편집] 참고자료/분류: 1883년 태어남1928년 죽음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형된 사람

http://www.youtube.com/watch?v=xSxb0IcQq1U
KBS 독립운동가 기록찾기 30년의 노력
www.youtube.com

1. 국권 피탈(한일 합방)이후
1910년대 ㅡ 비밀결사운동(독립 의군부,대한 광복회,송죽회 등),독립운동기지 건설,(만주지역의 삼원보 - 신흥관학교,용정,명동,한흥동, 연해주지역의 신한촌,대한 광복군 정부,미주지역의 대한인 국민회,외교활동 등),3.1운동
1920년대 ㅡ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6.10만세운동,광주항일 운동,무장독립군의 항일 투쟁(신흥 무관 학교, 서로 군정서, 대한 독립단, 대한 독립군,북로 군정서,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의열단,한인 애국단 등
1930년대 ㅡ 한.중 연합 작전(한국 독립군 - 쌍성보 전투,대전자령 전투,사도하자 전투,동경성 전투 등, 조선 혁명군 - 영릉가 전투,흥경성 전투),사회주의 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노동자운동 등),동북 항일 연군,조선 의용대,조선 의용군
1940년대 ㅡ 한국 광복군

2.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실력 양성운동

물산 장려 운동 : 우리나라사람이 만든것을 사서 쓰자는 운동

문맹 퇴치 운동 : 문맹을 퇴치하여 민족의 독립을 이루자는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대학을 설립하여 백성들을 가르쳐서 독립운동에 노력하자는 운동

3. 항일운동
학생운동 : 비밀결사 - 민중 계몽,차별 교육 반대
6.10만세 운동 - 일제의 수탈,식민지 교육에 반발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한일 학생 충돌 ,경찰의 편파 처리,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 운동

국내 독립군 : 보합단,천마산대,구월산대 ,만주 독립군과 연결
 

< 주요 사건 정리 >

우리민족의 주요 독립운동

3 . 1 독립 만세운동

1910년 경술국치 이 후, 우리 국민들은 주권을 상실당하고 있던 상태에서, 1차대전이 끝나고 윌슨에 의하여, 민족자결주의라는 원칙이 발표되자, 이것을 우리 민족에게도 적용시켜 줄 것을 일제에 청원한 것이 민족대표 33인의 청원서입니다..
즉, 독립을 요구했다기보다는 일제에 대하여 조선민의 참정권을 보장해줄 것을 요청하는 형식이었습니다, 이 청원과 별개로 학생들에 의한 만세운동이 진행되었고 이 만세운동은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 되어 탄압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3 .1 독립만세운동입니다.  3 .1 운동을 계기로 일제 탄압속에 우리 민족의 자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김좌진장군의 청산리대첩  ( 1920년 )

1920년 9월 10일부터 12일까지 김좌진(金佐鎭)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2,500명 독립군이 만주 허룽현 청산리 백운평, 천수평, 등지에서 세차에에 걸친 전투에서   5만의 왜군을 대파하였습니다

6 . 10 만세 운동  ( 1926년 )

1926년 6월 10일,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운동입니다.  학생들은 3 . 1 만세 운동에 이어 다시 한번 만세 운동을 일으켜 민족의 의지를 일어나게 할려고 했습니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한 이 만세 운동에는, 학생 수백명 정도가 참석하였습니다. 순종 대여행렬때 일어난 이선호의 선창소리로 이루어진 이 운동에는 학생들이 주도했으며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자 곧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만세를 불렀으며 이 만세소리는 종로3가의 서울에 퍼?으며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신간회 조직  ( 1927년 )
1920년대 후반에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결성된 대표적인 항일단체로서  안재홍 . 이상재 백관수 . 신채호 . 신석우 . 유억겸 . 권동진 등 34명이 발기하였습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  ( 1929년 )

.1929년 11월 3일에 전남 광주에서 한일 학생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을 계기로 하여, 평소의 민족 차별에 대한 분노와 반일감정이 폭발하여 대규모의 반일 학생시위가 일어난 것으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가서 전국 각지의 많은 학생들이 항일 시위를 벌였고,  이어 일반 국민들까지 가담하였습니다. 이 운동이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퍼진 데에는 신간회의 역할이 컸습니다.

광주 학생항일 운동은 일제의 민족차별에 대한 반대 투쟁으로서 3 . 1운동 이 후에 일어난 반일 학생 투쟁 가운데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민족 운동이었고, 이 운동은 이제까지의 동맹 휴교 형태에서 벗어나 가두시위 형태로 발전하였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이후에도 학생들은 비밀 결사를 조직하여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다.

이봉창열사 의거  ( 1932년 )

1932년 1월 8일 이봉창열사는 일본 왕이 만주국 푸이[溥儀]와 도쿄 교외에 있는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히로히토를 향하여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조사과정에서 배후인물인 김 구 선생님의 신원을 끝까지 밝히지 않고, 가공의 인물 백정(白貞善)으로 둘러댔습니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이치가야[市谷]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이슬로 사라지셨습니다.

윤봉길의사 의거  ( 1932년 )

1932년 김 구 선생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및 상하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리는 훙코우공원에 들어가 폭탄을 던져 일본 상하이 파견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貞次] 등을 즉사시키고, 일본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주중(駐中)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 등에게 중상을 입혔습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5월 25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부 군법회의 예심에서 오사카로 이송, 12월 18일 가나자와 형무소로 옮겨져 19일 총살당하셨습니다.

진단 학회 조직  ( 1934년 )

1934년 한국의 역사 . 언어 . 문학 등을 연구하기 위해 학술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항일군대 광복군 결성  ( 1940년 )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강화에 즈음하여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항일군대 광복군을 결성하였습니다.

#총사령에는 이청천(李靑天)장군,  참모장에는 이범석(李範奭) 장군이 취임하였습니다


조선어학회 사건 ( 1942년 )

일제 우리 민족에 대한 극심한 탄압속에 우리말까지 말살시키려는 의도가 드러날 즘에1921년 12월 3일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님의 제자 10명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학술단체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였습니다. 그러자 일제는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조선어학회의에 관계된 분들을 억지로 죄를 덮어 씌워 감옥에 투옥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 1910년대 단체 및 3.1운동 - 자세히 정리>
대한광복회(1913)
 -1910년대 항일 결사 중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단체.
- 채기중,김상옥 등이 조직한 대한광복단을 모체로 하였다.
 -군대식 조직으로 박상진이 총사령, 김좌진이 부사령이었으며, 각 도를 비롯 만주에도지부를 설치하였다.
 -활동목표는 만주에 독립군 기지를 만들고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있다.
- 활동목표의 추진에 필요한 자금을 마룐하기 위하여 각지의 부호에게 의연금을 납부하게 하였다.
- 각지의 친일파를 색출하여 처단하기도 하였으나 밀고자에 의하여 일제에 발각되고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많은 단원들이 체포당함으로써 활동이 중단 되었다.
 
조선국권회복단(1915)
 -서상일,이시영 등이 단군을 받들고 국권회복운동과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낼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음.
 
자립단(1915)
 -단원의 회비를 모아 실업을 경영하고 청년교육을 하였음.
 
기타 
-선명단(1915),국민회의(1915) 등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조직되었음.

 3.1독립선언
  (1)배경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 상해의 신한청년당은 김규식을 민족대표로 파리에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전달하고 국제적 협조를 얻으려 함
 -2.8 독립선언(1919)
 일본에서 유학하던 유학생들은 도쿄에서 독립 요구 선언서와 결의문을 선포하고 이를 일본정부에 통고한 뒤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는 국내외의 민족지도자들이 독립시위를 구체화 하는데 영향을 미침.
 
(2)3.1운동의 전개(1919)
 -손병희.이승훈,한용운등 종교계의 대표들이 앞장서서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여 독립선언서를 발표.
 -서울의 탑골(파고다)공원에 모였던 각급 학교학교학생과 시민들이 시가지로 나와 만세시위를 전개, 거의 같은 시기에 지방에서도 만세시위가 잇따라 일어났다 온 민족이 이에 가담하여 태극기의 물결과 독립만세의 구호가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 파급되어 갔다. 이를 일제는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가옥과 교회, 학교등을 방화하느가 하면 파고 하였다.
 -화성 제암리 학살 사건은 3.1운동 때 일제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적나라게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건임. 1919년 4월 15일 화성제암리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30여명을 교회에 가두고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학살한 다음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름. 또한 제암리의 민가 81호를 모두 불태워 버렸음.
 
**3.1운동은 3단계로나눠 볼 수 있다.
 제 1단계: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 제작 배포함으로써 만세시위에 점화를 하는 단계로 이때는 비폭력주의였다.
 제 2단계: 학생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상인,노동자들이 만세시위, 파업,운동자금제공 드의 방법으로 적극 참여 함으로써 도시로 홧산 되었다.
 제 3단계: 전국적.거족적으로 확산된 만세운동은 전국 농촌으로 확산, 농민들의 참여로 시위규모가 엄청나게 확대 되었다. 이때 무력저항운동으로 변모하여 시위대들이 면사무소, 헌병주재소,토지회사,친일지주 등을 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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