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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하의 견상넘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2017-03-24 0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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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60 추천:31

천하의 견상넘 '이토 히로부미'(伊藤 博文)

伊藤博文(いとうひろぶみ)
이등박문, 천하의 ㅌㅌㅌ
역대 일본 총리
초대 이토 히로부미→제2대 구로다 기요타카→
제3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4대 마츠카타 마사요시→5대 이토 히로부미→6대 마츠카타 마사요시→7대 이토 히로부미
8대 오쿠마 시게노부→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10대 이토 히로부미→11대 가쓰라 다로
1841.10.16[1] ~ 1909.10.26
수상 임기
초대 1885년 12월 22일 - 1888년 4월 30일 (3년 4개월)
제5대 1892년 8월 8일 - 1896년 8월 31일 (4년 1개월)
제7대 1898년 1월 12일 - 1898년 6월 30일 (6개월)
제10대 1900년 10월 19일 - 1901년 5월 10일 (7개월)

도합 8년 6개월(2720일)을 지냈다(역대 3번째로 김). 1885년 만 44세 2개월의 역대 최연소 총리로 취임해 마지막 총리를 지낸 1901년에는 만 60세에 조금 모자란 (만 59세 7개월) 나이였다. 그리고는 후진으로 물러나 조선 침탈과 식민화에 착수한 원흉.
야마구치 현 출생.
야마가타 아리토모,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조슈3조옷"으로 불리는 인물.
한자 발음으로는 이등박문이며 국내에서는 이런 호칭으로도 많이 불린다. 아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한국인에게 나쁜 쪽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역사 속 인물. 한국의 어르신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풍신수길이라 부르는 것처럼 이 사람을 이등박문으로 더 많이 부르는 편이다.[2]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일본인 중 한명. 워낙 한국에서 이미지가 나쁘다보니 이토 성씨를 가진 다른 일본인들마저 한국인들의 편견에 힘들어할때가 많다. 심지어 한국을 굉장히 좋아하던 한 일본인 유학생이 한국에서 자신의 성씨에 대한 편견을 버티지 못하고 울면서 유학도중에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충격적인증언 도 있다. 이 글을 본 위키러들은 이런 편견을 가지지 말자. 만약 이 글을 보는 당신이 김씨인데, 한 외국인이 자신에게 "김정일 친척이냐?"고 물어보면 기분이 어떨 것 같은가?? 이토 씨는 일본에서 인수로 따지면 5~6위나 될 정도이다. [3]
일본에서는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현 일본의 의회제도와 양원제를 확립한 인물로서 위인으로 분류된다. 물론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히노 아키히로의 대표적인 별명[4]이기도 하며, 가끔 비유되는 경우가 있다.

목차

1 출생과 정치활동
2 암살
2.1 1차 시도
2.2 2차 시도
3 인격
4 평가 - 전형적 제국주의 정치인, 온건파는 훼이크
5 지폐 속 인물

1 출생과 정치활동


원래 천민이었으나 히로부미가 어릴 때, 그의 아버지 주조가 이토 미즈이 다케베라는 하층 무사에게 근실함을 인정받아 그의 양자가 되면서 상황이 바뀐다. 사실 주조가 이토의 양자가 될 당시 이토는 무사 계급이 아니었지만, 몇년 뒤에 하층 무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층 무사라고는 해도 실제로는 서민에 불과한 낮은 신분이었으며 젊어서는 몸이 빼빼 말라 호리병이라고 불렸다 한다. 그래도 무사 신분이었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는 당대 조슈번의 교육자로 유명했던 요시다 쇼인 문하에 들어 공부할 수 있었으며, 여기서 공부한 것이 인연이 되어 후에 유신 3걸로 불리는 기도 다카요시의 부하가 되고, 영국 유학을 통해 조슈번의 외국통으로 인정받게 된다.
대단히 두뇌가 명석했는데, 오래 공부한 것도 아님에도 서양제도의 장점을 제대로 파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일본제국헌법을 제정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귀국한 뒤에는 조슈번에서 일하며 전후 평화협상 등에 종사하였고, 조슈와 막부 사이에 막장전쟁(幕長, 막장이 아니다)이 터진 뒤 막부와의 타협을 생각하던 보수파를 몰아내는 데 참여, 이후 조슈번을 주도하게 된 소장파의 일원이 된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 참여했으며, 조슈와 사츠마 사이에 벌어진 정한 논쟁 등의 여러 정쟁에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한 덕택에 여러 요직을 거치며 영향력을 쌓아 이후 알력다툼 끝에 메이지 정권의 최고 실권자가 되었다. 1885년에는 내각제 시행과 함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뒤이어 추밀원 의장, 의회 창설과 함께 귀족원 의장에 취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렸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관련이 깊은데, 전봉준의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조선에 간섭을 시작해 을사조약으로 조선통감부가 설치된 뒤에는 초대 통감에 취임해 식민화 작업의 기초를 닦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함께 침략 원흉으로 악명이 높다. 한국과 관련되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당시 일본에서도 입지전적인 인생사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되어 총리가 된 후 '이마타이코(今太閤: 오늘날의 태합.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파쿠에서 물러난 뒤에 불린 칭호다)'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토의 행적이나 인물됨을 보면 정말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슷한 점이 많다.[5]

2 암살
2.1 1차 시도

이토 히로부미가 을사조약을 하고 얼마 후 수원에 놀러 갔다. 이 와중에 안양[6]에 사는 농부인 원태우라는 사람이 있었다.[7] 원태우는 조국을 도적질한 이토 히로부미와 조국을 몰수당하게 만든 을사조약에 대단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이토 히로부미가 수원으로 놀러 갔다 돌아 온다는 사실을 알아내자 안양에서 매복해 있다가 열차 레일에 바위를 걸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배신자가 생겨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 있는 열차가 오는 것이 목격되자 이 배신자가 바위를 치우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그럼에도 원태우는 짱돌을 집어서 그걸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힘껏 던졌다.[8] 짱돌은 유리창을 깨고 이토 히로부미의 마빡에 정확하게 헤드샷 되었다. 이 때 깨진 유리조각도 같이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에 무려 8조각이나 박혔다. 이토 히로부미는 뇌진탕을 일으켰으나 동승하고 있던 주치의가 응급조치를 해서 살아났다.[9]
원태우는 바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온 몸을 상처로 도배하다시피 하여 불구가 되었다. 이때 원태우는 너무 모질게 고문을 당하는 바람에 정말로 성불구까지 되어서 후사를 남길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후 일경들에게 시종일관 감시를 당하며 외롭게 살았는데, 다행히 대한독립을 보고 1950년에 돌아가셨다. 미수에 그쳐 안중근 의사에 비해 알려진 정도는 떨어지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각오로 뛰어든 고인의 명복을 잠시나마 빌도록 하자.'
이분의 모습이 어땠는가는 안양역 1번 출구에 가면 이분을 새긴 동판이 있다.
안양역을 다니시는 분들 계시면 한번 보고 묵념..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그 동판이란 게 역으로 통하는 에스컬레이터 한가운데 있는데다가 제법 멀리 있어서 동판에 새겨진 글귀 읽기도 쉽지 않고 저게 누군지 이름 읽기도 어렵다. 꼬라지가 이 모양이라 안양 사는 사람 대부분이 저게 그냥 장식인지 원태우를 기리기 위한 동판인지 전혀 모른다.
2.2 2차 시도
안중근은 합이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합이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합이빈역에 정차했다. (우덕순 열사도 잊지 말자.)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세 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네 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힘,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힘,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힘.[10]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1]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까레야 우라![12] 까레야 우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고 그대로 사망. 참고로 이토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으며, 그의 손자도 "유언은 없다"고 증언했다.
긔 외의 내용은 # 이 기사 참조. 유언, 제2 암살설 외 다른 떡밥도 분쇄한 기사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이토는 한일합방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운 이런식의 의견이 나왔다는 말이 정설화 되있으나 책 본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일본편에서의 묘사는 이토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는 식으로 내용 전개된다.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암살로 인해 한일합방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건과는 별개로 이토 주재로 이토의 자택에서 열린 1909년 4월의 회의에서 조선병합은 사실상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여하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막바지에 다른 한직이나 다름없었고, 신진 정치인들이 꾸물꾸물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던 때였다. 또한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른 시각도 있는데, 사실상 한일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왕세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조선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았다는 것 등을 보자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여담으로 이토는 이 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복장이나 신체 등의 요소로 분간하기 어려웠던 것. 이에 안중근 의사는 체념했으나 군중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바람에 안중근 의사가 바로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13]
참고로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KBS 역사스폐설에서 그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전 독립기념관 관장인 김삼웅 교수는 안중근 평전에서 안 의사가 이토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14]고 썼는데 이는 당시 시간이나 주변에 있던 사람 등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취재진도 꽤 있었다는 듯. [15]
3 인격
"남자는 배꼽 밑으로 인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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