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엔 모처럼 벗님들을 만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앞으로 어떻게 지금의 상황이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 등을 나누고 밤 늦게 돌아왔습니다. 동네의 펍에서 남자 몇 명이서 이런 저런 수다를 떠는 재미를 느끼는 것도 참 오랜만이긴 했습니다. 아마 이것도 한국 총선이 뜻밖의 결과로 끝났기 때문에 가능했겠지요. 물론 그 뒤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이 다시 우려를 자아낼 만 합니다만, 그래도 지금같으면 정권교체는 가능할 거라는 의견들이 더 많았습니다.
어제 그 자리에서 저는 2004년 총선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반대하는 민심이 모여 당시 열린우리당을 제 1당으로 만들어 준 사건. 그때 이걸 지켜봤던 저와, 그리고 뜻이 비슷했던 친구들은 이제 승리가 왔다며 기뻐했었습니다. 그때 그 의석이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의 기대를 알기나 하듯,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이란 것이 제기됐습니다. 거기엔 국가보안법, 사학법, 언론관계법, 과거서 진상규명법 등을 크게 손보거나 혹은 관련 법들을 과감히 개폐하겠다는 의지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수구세력의 공세는 국보법 개혁 혹은 철폐를 위한 노력을 무력화시켰습니다. 사학법과 관련해서는, 이른바 수구 기득권 세력들이 촛불 시위를 벌이는 진풍경까지도 만들어냈습니다. 이들은 아예 국회 등원마저도 거부하며 저항했습니다. 단지 학교 운영진에 이른바 '사외 이사'를 두어 경영 투명성을 제고하자는 그 조항 하나가 그들에겐 자기 밥줄을 죄는 것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 앞에서 그들의 단결은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열린우리당의 간판을 달고 당선된 사람들 중 일부는 당시 한나라당과 계급적 이익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었다는 한계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지역 기반이 전라도가 아니었다면 아마 한나라당으로 갔을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혁 입법안들은 지지부진한 정치적 공방 끝에 결국 기득권들이 원하던대로 처리됐고, 국민의 정치에 대한 불신은 당연히 극에 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명박은 대통령이 됐고, 그 뒤론 여러분들이 모두 보아 왔던 그대로입니다.
아무튼, 17대 총선의 기적같았던 일을 지켜봤던 것이 12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한국의 정치를 계속 지켜보고 있습니다. 의회권력의 교체가 모처럼 성공했지만, 그것이 기쁘게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불안감 때문입니다. 그때의 배신감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회권력만의 교체로는 안 된다는 것, 그것도 분명합니다. 일단 정권교체가 되어야 그나마 이 의회권력교체를 통해 보여진 민심을 담을 그릇이 분명히 만들어집니다.
결국 시민은 자기들이 보여주었던 분노를 그대로 감시와 비판을 통한 견제의 칼날로 만들어내야 합니다., 천안함과 어그러진 남북관계, 세월호 진상규명, 굴욕적 위안부 협상, 교과서 문제, 독도문제, 신자유주의적 시스템을 버리고 복지국가로 가야 할 문제, 왜곡된 저질 언론들을 바로잡는 문제, 그밖에 몰상식들이 자리잡고 있는 사회를 다시 상식이 기준이 될 수 있는 사회로 돌려놓기 위해서, 그 사회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계속해서 현실정치를 견제할 수 있는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몸은 미국에 있지만, 이곳에 있는 동포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관심들을 늦추지 않으려 합니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17대 의회의 '망가진 기적'을 다시 목도하고 싶지 않으니까.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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