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입니다. 몇 일간 고민하다 개인적으로 깨달은 내용을 옮겨둡니다. 다만, 한분이라도 우리를 깨닫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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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년, 위기 극복 방안
- 칠천량에서 명량까지. 이순신 장군을 돌아봄 -
2017년 정유년. 1월 19일
1597년 정유년은 격동의 해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장군이 맡은 바다에서 거둔 승전이 육상 전투의 거듭된 패배로 위태위태했던 나라의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던 때였다.
선조임금은 전쟁 소강기에 얻은 잘못된 첩보를 근거로 수군이 부산포에 출전하여 왜군을 무찌를 것을 지시하였으나 왜군의 계략임을 간파한 장군은 왜군에 고립되어 수군을 잃을 것을 우려하여 응하지 못했고 왕명 불복죄로 파직되어 의금부로 압송된 장군은 반드시 이순신을 죽이겠다는 선조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4월에 특사로 석방된 후 백의종군 처벌을 받게 된다.
곧이어 모친이 여수에서 장군을 보기 위해 상경하다가 배에서 사망하고, 장군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7월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장군이 6년간 애써 키운 1만여명의 수군과 150여척의 전선을 잃고 나라는 더 이상 버텨낼 힘을 잃은 바로 그 시기였다.
희망은 철저히 무너져내린 폐허에서 거짓말처럼 싹트는 것일까. 장군을 알아본 백성들은 이제야 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이 백의종군중인 장군에게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백성들의 실날 같은 희망에 화답하기 위함이었는지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장군은 괴멸된 수군을 폐하고 육군에 합치라는 조정의 명령에 대해 그해 9월에 이렇게 답하게 된다.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 힘으로 막아 지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으며, 비록 전선은 적으나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전투에서 도망친 경상우수사 배설이 숨겨둔 배 12척에 수습한 배 1척을 더해 13척으로 왜적과 맞붙은 명량해전은 9월 16일이었다.
장군은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깨고 또 한번 나라를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해낸다.
그러나 장군에게 정유년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해 10월에 장군이 아끼던 셋째 아들 면이 충남 아산에서 후퇴하던 일본군과 전투중 전사하게 된다.
이듬해 1598년 장군의 나이 54세에, 전쟁에는 관심이 없던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을 설득하여 승전을 이어가던 중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시게 되고, 이후 장군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300년 동안 멈추게 하여 일본이 동아시아의 제국이 될 기회를 빼앗았으며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일본에서 조차 세계를 바꾼 군사지도자 10인중 한명으로 꼽힐 만큼 수많은 이로부터 비교불가능한 난세의 영웅으로 칭송 받게 된다.
무너질 대로 무너졌던 1597년 정유년, 그리고 수백년이 지나 맞이한 2017년 정유년의 초입에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어떠한 위기극복 방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첫째는 희망을 되찾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왜군에 유린당한 백성들은 희망을 찾을 수 없었지만 철저히 망가지고 버림당한 장군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장군은 모친상과 원균이 지휘한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딛고 명량에서 그 희망의 불꽃을 다시 점화시킬 수 있었다.
IMF 체제를 뒤돌아보아도 우리는 희망을 놓치지 않았었다. 지금 굶주린 배를 언제고 반드시 채울 수 있다고, 내일은 내 부모와 아이들에게 더 나은 것을 줄 수 있다고, 내가 가진 몸뚱이로 할 수 있는 희생이 모여, 멀지 않아 더 나은 날이 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런 희망이 지금은 어디에 가 있는 것인가? 희망을 되살리기에 우리는 지금 너무 멀리 와있는 것인가?
둘째는, 해야 할 것을 동시에 진행하라는 것이다.
장군은 무너진 수군과 병사들을 재건하는 일, 아무리 ?아도 장군의 진영에 남아있으려는 백성들의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일, 중과부적 상태에서 적을 상대하기 위해 화포와 무기를 갖추고 개량하는 일 등을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결론부터 말해 장군은 해야할 일 그 어느 것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군사훈련 틈틈이 둔전을 일구어 식량을 자급하고 어업과 소금 생산을 통해 따르는 백성들까지 보살폈으며 과거에 개량한 각종 총통도 수리하고 개량하는 일에도 힘을 아끼지 않았다.
혹자는 현재의 정유년 위기가 국정농단 논란과 탄핵 추진 과정에서 증폭되었다고 말한다.
왜란이 우리가 자초한 것이 아니거늘 싫다고 외면할 수 있을까?
국정농단이 있었더라도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니 지금이라도 사실 확인 절차를 중단하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장군에게서 배워야 한다.
조사할 것을 조사하게 하고, 판단할 사람들은 판단하게 하며, 동시에 많은 이들이 굶주리지 않게끔 필요한 작업도 동시에 진행하면 된다.
당신이 그러하셨듯, 필요한 일들은 적절한 사람들이 합리적인 방법으로 나눠 맡아 진행하면서 위기를 극복해나가면 될 일이다.
탄핵이 거추장스럽다고 하는 이는, 탄핵과 무관한 둔전을 가꾸는 일에 몰두하면 되고, 왜군을 대비하는 일에 온 전력을 다하는 이들을 방해하거나 비방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장군이 그랬듯, 각자 따로 떨어져 장군의 지시로 진행되던 모든 일들은 결국 언제고 한군데 모여 이 나라를 지탱하고 적군을 몰아내며 다시 희망의 노래가 이 땅 위에 넘쳐흐르게 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증명할 것이다.
셋째는 신상필벌이다.
병사와 백성을 그토록 아끼던 장군은 출전 명령에 불복해 탈영한 수군을 체포해 효시했고 군사를 모집할 때 정원을 속인 관리들도 같은 처분을 받았다.
용맹한 의병을 의병장으로 임명하면서 보낸 공문에서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거든 가장 심한 한명을 본보기 삼아 처형하고 그로 인한 엄정한 군령의 회복이라는 소중한 기회를 잃지 말라는 서릿발 서린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반면, 전투를 치른 후 올린 장계에서는 싸움의 선봉에서 당신이 직접 확인한 사실을 기반으로 1, 2, 3등을 지정하여 포상할 것을 조정에 건의했고 조정의 판단이 늦어지게 되면 자신의 책임으로 직접 상을 주기도 했다.
넷째는 엄정한 자기 책임이었다.
1594년 11월 28일의 일기 뒤에 장군은 “도망갈 수 없다(難逃)”라는 두 글자를 적어두었다.
이 엄정한 자기 책임 때문에 장군은 자신의 본영 근처인 여수에 모친이 피난와 있음을 알았으면서도 1594년 1월에 하직 인사를 드린 후, 시찰을 핑계로 어머니를 찾아뵙지 못했고 모친은 정유년에 여수에서 아산으로 올라오던 배위에서 사망하시게 된다.
위기를 누가 감당하려 할까?
뜨거운 곳에 손이 닿으면 움츠러들 듯 생명이 걸린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스스로 도망갈 수 없다고 선언하고 책임과 부담의 한가운데로 묵묵히 걸어들어갈 사람은 누구일까?
2017년 현재의 위기도 모두들 강건너 불 보듯 자기의 책임 범위에서 미뤄두는 상황 속에서 과연 극복될 수 있을까?
부담을 떠않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일컬어지는 세태 속에서 장군처럼 자기 책임의 영역속에 위기를 가둬두고 해결하려는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다섯째는 부당한 명령은 기꺼이 거역하는 신념이었다.
장군은 38세 되던 해, 상관의 부당한 인사 청탁을 거부한 결과 모함을 받아 수군만호라는 종4품 벼슬에서 파직 당했으나 곧 복직했고, 선조임금의 부산포 출전 왕명 거부죄로 사형선고를 받으나 백의종군하고 결국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게 된다.
현재의 위기는 권력자의 부당한 명령을 무조건 수용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초한 것이다. 파직과 사형선고가 거듭되어도 나라를 위해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던 장군의 신념이 위기를 극복하고 나라를 구해낸 전환점이 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1597년과 2017년에 반복되는 위기의 극복방안을 장군에게서 찾으면 찾을수록 나는 깊은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당신의 혜안을 확인하면 할수록, 가슴 깊이 신음처럼, “우리는 이런 인물이 없다”는 쓰디 쓴 회한에 빠질 뿐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하루전에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거북선의 실전 점검을 마친 저 위대한 리더를 우리는 어디서 구하고, 키우고, 활용해야 하나. 진정한 리더가 사라진 시대의 초입에서 확인하면 할수록 우리의 빈자리만 커갈 뿐이었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백의종군하는 장군의 남루한 복장을 먼발치에서 보고 다가가 그 임을 확인하고 이제는 살았다라고 외치는 백성중 한명에 불과할 뿐인 내가 40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우리에게 전해주는 장군의 말씀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 광장에 우뚝 서서 무심히 거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슬픈 어버이들의 천막과 그리고 촛불로 만들어진 성난 물결이 일렁이는 그 모습까지 낱낱이 지켜본 장군께서 후손들에게 전하는 말씀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이순신이다.
우리 하나하나가 이순신이다.
우리가 왜군에, 외세에, 그리고 어지러운 정치에 신음하던 백성들이면서 우리 하나 하나가 우리 삶의 리더이다.
도망갈 곳은 없다고 자신에게 선언하면서 가슴속 깊이 꺼진 듯 하던 희망의 불씨를 다시 키워놓아야 하는 것도 우리요. 누구는 탄핵의 일을, 누구는 다른 이들을 먹고살게 해주는 일을, 또 다른 누구는 나라를 외세로부터 지켜내는 일을 마치 따로이면서 함께 하듯이 해내야 하는 일도 우리 모두의 일인 것이다.
엄정한 신상필벌을 통해 무너진 나라의 기강을 세우고 정의가 다시 이 땅에 가득하게 할 이도 우리요. 우리 모두가 위치한 바로 그곳에서 나라를 망칠 부당한 명령을 주저 없이 거역해서 소중한 생명들을 지켜내고 위기가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할 이도 우리요. 다 지켜내고서, 널리 나라를 이롭게 꾸려갈 이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니, 우리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어 마치 장군처럼, 나라를 위기에게 구해낼 이도 바로 우리인 것이다.
마치, 작은 반딧불이 하나가 작은 불씨를 품고 날 뿐이지만 하늘에 명멸하는 불씨를 만들어 내고, 작은 촛불이 모이고 모여 바다를 이루고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랑처럼 휘몰아치는 파도를 만들어내곤 하지만, 그 마음은 본디 하나였던 것처럼.
그렇게 깨달아서,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이땅에 희망을 되찾게 하는 일, 그런 우리의 삶이 모이고 모여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장군께서 남기신 유지가 아니였던가.
몇 일을 고민하던 나는 그런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임진년에 시작된 왜란에서, 장군과 함께 나라를 구해낸 이도 국민들이 아니였던가.
심장이 터지도록 전선의 노를 저은 격군도, 화살에 혼을 담아 날리던 수군도, 부산포에서 전사한 녹도만호 정운도, 가족을 지키다 전사한 아들 면도, 의금부로 압송되는 수레를 눈물로 전송한 이도, 백의종군하는 장군의 곁을 지킨 이들도 우리 모두가 아니었던가.
위기 때마다 우리는 거기에 있었고, 위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눈물 흘리고, 딛고 서고, 싸우고, 죽고, 다시 살아 질긴 목숨으로 이 땅에 희망을 불러온 이도 우리 자신이 아니었나.
위기의 한복판 속에 변함없이 살고 있지만, 이런 생각에 이르게 해준 당신께 감히 감사드린다.
장군은 옛말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으니,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던 그 당시 당신의 나이 48세를 훌쩍 넘긴, 지금의 나는 감히 이렇게 속으로 되뇌어 본다.
우리가 주인이 되어 이끄는 삶이 희망을 낳고 다시 한 번 우리는 위기를 극복할 것이다.
반백년 살아본 이제야, 80년대 젊던 시절, 우리가 주인이라는 말을 뼛속 깊이 체감한다.
우리는 이겨낼 것이며 새로운 정유년을 살아낼 것이다.
깨달음을 준 장군께 감사드린다.
아둔한 나로썬 참으로 황홀한 각성이었다.
2017년 1월 19일, YSE (smallbike from 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