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합이빈역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난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과 조를 나누어 우덕순은 채가구역을, 안중근은 합이빈역에 매복했다. 근데 기차는 채가구역을 그냥 통과하고 합이빈역에 정차했다. (우덕순 열사도 잊지 말자.)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세 발 저격하고 그 주위의 일본 측 인물도 네 발 저격했다. 1탄은 이토의 오른팔 윗부분을 관통하고 흉부에 박힘, 2탄은 이토의 오른쪽 팔꿈치를 관통해 흉복부에 박힘, 3탄은 갈비뼈 아래로 들어가 허리에 박힘.[10]그리고 남은 총알로 일본 총영사 가와카미의 팔꿈치에 1발, 이토의 수행비서 모리의 복부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다나카의 왼쪽 무릎에 1발, 만주철도 이사 나카무라의 오른쪽 장딴지에 1발을 맞췄다.[11] 하지만 민간인이 다칠 것을 우려하여 머뭇거리다가 체포당했다. 안중근은 체포당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까레야 우라![12] 까레야 우라!"
이토 히로부미는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의 저격을 받고 그대로 사망. 참고로 이토는 열차 내로 옮길 때까지 살아있었지만 혼수 상태에 빠져 유언조차 남기지 못했다. 즉,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으며, 그의 손자도 "유언은 없다"고 증언했다.
긔 외의 내용은 # 이 기사 참조. 유언, 제2 암살설 외 다른 떡밥도 분쇄한 기사이다.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서 이토는 한일합방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운운 이런식의 의견이 나왔다는 말이 정설화 되있으나 책 본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일본편에서의 묘사는 이토는 한일합방을 시급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았을뿐 언젠가는 반드시 한반도를 일제의 아래에 넣으리라 생각했다. 는 식으로 내용 전개된다.
일각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까지 생각하지 않았지만 암살로 인해 한일합방이 빨리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이 사건과는 별개로 이토 주재로 이토의 자택에서 열린 1909년 4월의 회의에서 조선병합은 사실상 결정되었다.그러므로 위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여하간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통감이란 직책은 그의 정치 행보에선 막바지에 다른 한직이나 다름없었고, 신진 정치인들이 꾸물꾸물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던 때였다. 또한 사망 시점에서 이토는 통감 자리도 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다른 시각도 있는데, 사실상 한일합방을 확정짓기 위한 일들은 대부분 이토가 했고, 메이지 덴노가 그리 반대했는데도 끝내 그를 설득시켜 왕세자 요시히토의 방한을 추진한 것도 조선통감을 맡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였으며, 통감 자리를 내놓은 후 그는 다시 추밀원 의장 직을 맡았다는 것 등을 보자면 그가 정치권에서 아예 밀려나는 상황은 아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여담으로 이토는 이 때 일행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기에 누가 이토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고.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흔치 않았기 때문에, 복장이나 신체 등의 요소로 분간하기 어려웠던 것. 이에 안중근 의사는 체념했으나 군중들 중 누군가가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이토가 뒤를 돌아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 바람에 안중근 의사가 바로 저격을 할 수 있었던 것. 정말 천재일우의 기회였다.[13]
참고로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는 이토가 사망했을 당시에 입고 있었던 내복(…)을 보관하고 있다. 그 내복을 통해 어디에 총탄을 맞았는지 알 수 있다(KBS 역사스폐설에서 그 박물관을 찾아가 이토가 입었던 내복을 촬영했다).
전 독립기념관 관장인 김삼웅 교수는 안중근 평전에서 안 의사가 이토를 암살한 것이 아니라[14]고 썼는데 이는 당시 시간이나 주변에 있던 사람 등을 통해 짐작 가능하다. 취재진도 꽤 있었다는 듯. [15]
3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