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사를 보니, 시민단체에서 수학 교육의 분량을 줄이자는 주장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주장을 볼 때마다 좀 답답합니다.
한국에서 교육에 목숨을 거는 이유는, 잘들 아시겠지만 그것이 좋은 직업을 갖고 높은 수입을 얻기 위해 거쳐야 하는 필수관문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근래 경제가 안 좋고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학벌->돈 으로의 연결고리가 많이 약해진 감이 있지만, 그래도 아직 학벌은 성공의 가장 큰 필요조건 중 하나이며 모두가 여기에 목숨을 겁니다.
현실적으로 명문대를 가기 위한 경쟁은 엄연히 존재하고, 그렇다면 결국 "어떤 기준으로 줄을 세울 것인가" 의 문제가 반드시 대두됩니다. 그 어떤 교육정책도 이 문제를 결정적으로 피해가지 못합니다. 줄세우기의 시점과 방법을 어떻게 하느냐의 차이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 하에서, 현재 수학은 가장 강력한 줄 세우기의 용도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수학포기자들이 고통을 겪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서 수학의 효용성에 대해서 얘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쟁력을 위해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따위의 얘기도 안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현실적으로, 수학의 분량을 줄이거나 난이도를 확 줄여서 수학으로 인한 변별력을 의미 없게 만들어버린다면, 과연 그 이후에는 무엇이 강력한 변별기준으로 등장할지에 대해 얘기하고 싶습니다. 과연 뭐가 될까요? 국어? 사회? 아닐 겁니다. 왜냐 하면 국어 사회는 아무나 시간을 오래 투자하면 점수를 올리기가 쉽기 때문에, 변별력을 확보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 뭐가 후보일까요? 저는 그것이 영어가 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수포자보다는 영포자가 적지 않냐고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영어실력은 그 속성상 본질적으로 유년기에 해외생활을 경험하게 해줄 만큼 탄탄한 경제력의 부모를 만났느냐에 의해 크게 좌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벌의 정점인 몇 개 명문대를 가기 위한 관문에 경제력이 미치는 영향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시민단체 여러분, 과연 정말로 이게 여러분들이 원하는 바인가요?
수학이 비록 많은 수포자를 양산할지언정, 수학은 철저히 공정하며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로 문이 열려 있습니다. 쓸데없이 어렵게 끌지 않고 간단히 말할게요. 부잣집 애나 가난한집 애나, 수학으로 입시를 겨루는 것이 영어로 입시를 겨루는 것보다 훨씬 공정합니다. 바로 이 부분이 중요합니다.
저는 요구의 방향이 달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으로 하여금, 수학과 관련이 먼 전공의 경우에는 과감하게 수학 점수를 입시 과정에서 배제시킬 것을 제안하는 방식이 적절합니다. 그러나 수학과 관련이 깊은 분야의 경우에는 수학 점수를 보는 것이 너무나 타당하며, 현행 교육제도의 수학 교육 분량이나 난이도를 떨어뜨려서도 안 됩니다. 요지는, 수학과 상관 없는 전공으로 대학 갈 거면 아예 수학을 포기해도 되도록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맞지, 수학 분량을 줄이라고 말하는 건 틀려먹었다는 겁니다. 필요한 사람은 수학을 충분히 공부해야 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누구나가 원하는 최상위 명문대(예를 들어 설카포 급이라고 할게요)는 입시 과정에서 수학 점수의 비중을 여전히 높게 유지할 것입니다. 따라서 수포자들이 명문대에 진학하기는 계속 어렵겠죠. 그래도 차라리 그게 낫습니다.유복한 집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해외 경험 쌓고, 영어 하나 잘하는 걸로 명문대 휩쓰는 꼴 보기 싫다면 말입니다.
P.S.) 솔직히 말해서, 대다수의 수포자들은 수학 분량 줄인다고 해도 여전히 수포자입니다. 그래서 분량 줄이는 것도 아무 의미 없는 행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