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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今臣戰船尙有十二隻" 세계최강의 조선 전함의 ♬←☏ 2017-04-26 10: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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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今臣戰船尙有十二隻" 세계최강의 조선 전함의 탄생

"今臣戰船尙有十二隻" 이때는 스페인과 대영제국의 트라팔가 대 해전이 있기 한 세기 이전에 이미 조선에서 최무선의 화포를 배에 장착한 조선의 함대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본 우주선 "배세루"였었다. 이런 배를 만든 주인공이 배설이고 조선이 외부세계로 당시 눈을 돌렸더라면 여대로의 전설처럼 일본과 중국을 다스렸을 것이고 세계역사가 달라 졌을 것이다.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 1597.7.23

 

부산항 곳곳에 기지를 틀고 땅에 짱밖힌 14만 대군을 수군으로 공격하라는 무지한 조선군 지휘부의 명령이 불가하다는 원균을 권율은 곤장까지쳐서 병사들을 사지에 몰아 넣게 되고(칠천량패전) 이순신 장군이 5년간 양성한 158척의 전함과 약 2만 여명의 병사들을 이억기 장군이 이끌다가 칠천량에서 적의 기습으로 완전괘멸 되고 말았다.


배설 장군은 사지에서 약 7개월 간의 14만 대군을 부산항에 봉쇄하여 주전장을 해상에서 치르려든 전술을 포기하고 시급히 전함 12척으로 진도 명량으로 약 430km를 항해하면서 낮에는 배를 개조하고 밤에는 항해를 하면서 마지막 일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진도로 작전을 행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배설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을 복권 시켜주기를 요구하는 장계를 올리고 복권을 기다리지만,,,

이에 선조대왕은 수군을 폐하라고 지시를 한다...



1,임란왜란

고니시 선봉 15만 대군은 침략 20일 만에(원균 이순신방어)에 한양이 점령당하고 왕자 공주 포로가 되었으며,  선조 이하대신들 발빠르게 도망 행차 1년가까이 줄행랑 36계 뿐이었음에도 그렇게 무지한 조정이 백성들 도망 죄를 다스린다?

2,정유재란

 가토 선봉(토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20일내 한양점령 약속 출병) 1월부터 7월 14일까지 부산포에서 14만 대군은 봉쇄당하고 조선땅 어디도 내주지 않음(배설 방어)기존 임진왜란에 울산 부산 남해안 일본군 주둔지 제외하고 추가로 내준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주전장을 배설의 요구대로 해상에 10여회 이상 치르게 됨,

칠천량 패전 이후 9월부터 일본군의 육지 상륙을 허용한 결과 호남 대학살과 일본 교토의 대규모 학살로 인한 증거인 코무덤 발생 조선인구 급감(권율 방어실패) 조선 파괴공작이 실시되었다.

토요토미 사망으로 일본 내 권력다툼으로 종전 전쟁의 판정
1, 일본 ㅡ일본의 조선정벌은 실패, 조선파괴는 성공
2, 조선ㅡ침략방어는 성공, 내정 민생은 파괴당함
3, 명나라ㅡ일본 명나라 전쟁을 조선의 비용으로 조선에서 전장화하여 명나라 보호에는 성공,

부수적 효과 과도한 전비와 병졸들 전사로 민심이반현상으로 명나라 국가붕괴초래,



장작귀선의 출현[粧作龜船(맹선)배설1551~1559]


 베세루노 장작귀선 전장 53.67미터, 폭 21.77미터로 백 개의 노를 가지고 있었으며 정면에 거북의 귀두 위에 대포 2발이 아래에 5발이 장착된 판자를 뒤집어썬 장갑선이였다. 쿠키 요시타카의 세계최고의 전함의 배가 되는 거대한 전함이 나타나 마구 600여척의 함대를 아작 내고 있었다. 만일 그 베세루의 장작귀선 앞에서 대포를 맞는 날에는 바로 사망이였다. 측면에는 양측에 각각 12발의 대포가 장착되어 불을 뿜었다. 그 크기는 쿠키 요시타카의 칠병포를 장착한 배들의 약 두배 정도로 추정된다. 


"오~ 베세루! 자신도 모르게 ‘가메 베세루’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조선수군의 입안에 일본군이 있는 것과 같았다. 일본군들이 저항하자 조선의 장작귀선들에 승선한 조선수군들 함성이 들렸다. 장작귀선의 뚜겅이 열리는가 하는 사이에 무수한 화살들이 내리꽃혔다."(명량 왜곡과 진실 본문 중)



조선의 장작궈선 전함(맹선)들이 크기의 규모나 화포를 안전하게 장착 약 2km 사거리를 유지하여 세계최강의 해군임에는 분명했었다. 세계 물정에 빠식했던 일본의 토요토미가 스페인과 맥시코까지 부하들을 보내 선박기술을 배우게 하였듯이 배설의 맹선 '배세루ㅡ우주선'은 칠천량 패전에서 가장 큰 나포대상 이었음을 확인해는 야스쿠니 신사에 그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고한다.


대영제국의 해군들이 세계를 제패하기 한 세대 이전에 배설은 이미 이러한 선박을 건조했음에도 선조들이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세계 바깥 세상에 눈을 돌리지 못하고 당파싸움질이나 하고 신분에에 스스로 갇혀 살고 있었다.

천자총통과 지자총통 2km에 달하는 사거리를 가진 장거리 화포와 현자총통(玄字銃)과 로켓 신기전(神機箭), 폭발형 포탄인 진천뢰(震天雷)를 발사하는 대완구(大碗口) 등의 무기를 장작귀선에 탑재 시켰었다.


철갑선에 이러한 무기를 다량 장치하면 부력을 이기지 못하고 수군들과 함께 자침될 것이다. 실지 원균 장군이 많은 판옥선을 자침시킨 것으로 실록은 전하는데 배설장군의 전함은 규모면에서 세계최대 최강의 무기를 가지고도 당시 경상수군이라는 이유 하나때문에 차별받고 뒷통수를 맞아 운명하셨다. 

더 큰 세상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고 전공다툼으로 바톤처치를 "썩은 12척을 주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고종과 왕후 배설 장군 해원식(억울함을 푸는 제사),

배설 장군을 해원하고 추가 증직 시킨 후  고종 황제는 영국인 토마스에게 조선을 꺼져가는 조선국을 구해 달라며 ‘배설 장군처럼 나라를 구해달라고 부탁했으며, 성과 이름도 영국인 토마스에게 ‘배설’로 하사했다.(19년 #)






3, 구국의 정신 배설 본받기(고종)의 노력



                                  (사진출처:배설기념재단 홈피)

E T (Eernest Thomas )토마스는 16살 때부터 일본에서 살다가 1904년 한국에 왔다.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의 특별 통신원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종군기자로서 입국했다. 일제에 침탈당하는 한국을 보면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한매일신보를 양기탁과 함께 창간했다

일본 이토 히로부미와 일본 전체가 배설이란 이름에 대한 컴플렉스로 영국인 토마스를 죽게 만들고 민 왕후마저 무참하게 살해하고 말았다.

민황후는 궁전의 곤녕전과 복도로 딸린 옥호루에서 자살됐다. 사바틴이 목격한 궁녀들의 봉변, 미국인 군사고문 다이가 목격한 민황후 봉변 장면, 고종이 거처하던 침소인 곤녕전으로 일본 낭인 오카모도 등이 황제의 침전 용상 우측에서 황제와 순종에게 황후의 거처를 심문하면서 민황후가 양녀로 삼았던 겁에 질린 일본인 소가의 딸을 끌고 와서 민황후 를 묻고 한 여인을 심문하자 고종이 용상쪽에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완력으로 향하자 오카모토등이 황제의 용포를 잡아 제지하다 용포가 찢어지자 어께를 눌러앉혀 위협을 한다. 순종 태자가 호통치자 상투를 잡아 벽에 내동댕이치고 칼등으로 목을 후려처 기절시키는데 후일 순종이 승하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낭인들은 궁녀들을 하나하나 폭행하며 옷을 모두 벗기고 애기를 낳은 왕후임을 국부 검사를 하고 황후냐고 일일이 심문한다. 의심가는 상궁 몇 명의 가슴을 칼로 베고 난간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에 러시아 미국 청나라가 항의하자 일본은 민왕후시해사건의 주범인 미우라 공사 외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잠시 구치하고 검찰이 조사하여 살인죄의 범죄혐의가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석방돼었다. 민왕후와 궁녀들이 일본법으로는 모두 자살로 처리 되었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오미노쿠니 이카군 구로다 마을 武家출신으로 풍신수길의 모든 업무를 대신할정도의 최고 실력자, 임진왜란을 설계하고 총지휘한 인물로 당시 약 44세 였고, 당시 동생인 黑田句沈은 약 39세 였으며, 풍신수길의 교지인 금으로 만든 부채와 장군도 두 개를 주어 선봉을 세워 출전하였고, 중군장으로 장남인 ?田長政, 쿠로다 나가마사는 당시 약 24세에 불과했다. [ 1568~1623 ] 구로다 요시타카는 직접 자신이 성주성 제2차 진주성전투까지 참전하여 시찰한 후 돌아갔었다. (배설장군이 획득한 하시바 히데카츠의 황금부채에 黑田孝高의 黑田句沈이 弟, 종문에 황금부채 )




 

칠천량 전투에서 아군이 전멸될 위기에서도 배 12척과 약 2.000여 병사를 수습하여 한산도 본영으로 복귀 청야전술을 호남일대에 펼치면서 패전한 모습으로 진도로 들어오니 모든 조선군과 백성들이 울었으며, 이에 배설은 진도에서 쌀과 양식을 풀어(민정붕) 주민들과 함께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상유 12척(尙有12隻)이라는 명구는 바로 배설(裵楔)장군이 칠천량(漆川樑) 한산도 귀환 후 장군은 청야작적을 성공리에 마쳐 왜적의 한산도 본영 침범을 사전에 차단하였고, 호남 일대 백성들이 피란 할 수 있도록 했을뿐만 아니라 청야 전술을 시행하여 남해안 일대에 7개월간 굶주린 일본군의 도적질을 미리 차단하였었다.

 

 

 

 











1595년 1597년 배설이경상 우도 수사로 재직하면서 거북선 제작을 순조롭게 하는데 비해 경상좌도 수사 배홍립이 능력이 딸린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조실록을 토대로 해석해보면 거북선이 통일된 규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병영 고을마다 편리한 곳에서 제작하게하고 있다는 점이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구해낸 장작귀선도 이 때 만들어진 대형전함이라는 것이다. 조정에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 뿐 아니라 모든 병영에 거북선이 제작되었는데, 규모가 적은 판옥선위에 갑판구조라고 보여진다.(이순신장군진영은 60~130명 규모의 판옥선에 갑판을 쒸움)

 

 

 

1597년 7월 23일 이순신의 장계에서 배설의 전함은 승선인원이 약 200명이라고 밝힌 점, 대부분 조선의 거북선은 규모가 60~70명선의 기존의 판옥선에 지붕과 귀두를 설치하고 대포를 장착한 것으로 최대 승선인원이 130명 이내이다. 그리고 병영마다 형식적으로 한 두대 정도 보유하여 실제 전투에 사용되기 어려웠다. 반면 배설의 장작귀선은 나주의 목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아예 새로 배를 건조 했다. 그 규모가 가히 놀라울 정도로 약 200명 승선한다는 점은 이순신장군이 밝힌 장계에 나와있다.

 

 

임진왜란을 총지휘하고 성주성과 진주성 까지 시찰한 黑田孝高가 돌아가서 만든 귀갑차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구로다 요시타카가 배설의 활동에 매우 놀라고 돌아 갔다면, 당연히 배설의 전함인 장작귀선에서 영감을 받아 귀갑차를 제작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龜甲車(장작귀선에서 모방)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黑田孝高가 직접 참여했다. 침략을 위한 일본의 공성전용 병기입니다. 관(棺) 모양으로 만든 큰 궤 속에 돌 등 무거운 것을 채우고, 잘 부서지지 않게 생우피(生牛皮)로 여러 겹을 싸서 사륜거(四輪車)에 얹은 것이다. 갑주(甲胄)를 입은 무사가 이것을 끌고 성을 공격하였다.

사람이 들어갈만한 수레 위에 철판을 깔아놓은 형태, 이 안에 들어가서 성문까지 이동하면 성벽위로부터 날아오는 끓는 물이나 화살, 동맹이 등에 보호 받을 수 있었다. 중국 충차와는 다르게 그냥 보병 수송용 수레였습니다.


 

 

 

黑田孝高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龜甲車)등의 설계에도 참여했다.

구로다 요시타카의 귀갑차를 살펴보면 과거 일본의 공성전병기와 다른 점이 세가지가 있다.

1, 철판으로 깔아 놓았다는 점(괘짝 속에돌과 흙을 넣음)

2, 생 우피로 를 여러겹 감쌓다는 점,

3, 甲胄를 입은 무사들이 동원되었다는 점,


 

 

 

 

보통 조선의 판옥선의 세배정도의 크기에다 두꺼운 장작으로 갑판을 덥고 그 위에 화전을 피하기위해 철판과 병사들의 갑옷을 펼쳐 우피와 함께 지붕에 쒸웠다는 자연스런 이해가 된다. 멀리서 보면 철갑선으로 보이는 것이나, 갑주를 원료로 우피등이 썩였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화전을 방지하기위한 장대에서 물을 퍼서 수시로 뿌려주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근접해서 장작귀선을 관찰 했다고 보여진다. 조선해역전도에서 보듯이 경상우도 수군의 장작귀선은 귀두에서 대포가 나오지 않고 귀두 위쪽 갑판부분에 두발의 대포가 보인다. 그리고 귀두도 배의 아래 중간 부분에 돌기형으로 녹청색으로 나와 있어 기능이 없다. 단지 상징성과 시각적인 효과 뿐이다.

확대한 장작귀선의 전면부 그림이다. 측면은 단순히장작으로 구성되어 있고 날카로운 칼이 보인다.

그림 좌측에 장작귀선의 모습이보인다. 일본 수군의 주요 전투 형태인 등선육박전술(登船:肉薄戰術 : 적의 배에 뛰어들어 무기를 들고 싸움)에 대비하여 개발된 돌격 군함이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거북선의 등에는 거북 무늬가 그려져 있고,(우피나 갑주의 크기만 함) 그 위에는 날카로운 못과 같은 것들이 꽂혀져 있어 적의 접근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좌측에 조금 보이는 배가 장작귀선이다. 그림처럼 대포가 위에 있고, 거북돌기는 아래에 상징적으로 있어 거북 머리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지 않다.

김억추 장군(金億秋將軍)의 현무공 실록,(기록 보존)

“전라수사(全羅水使) 현무공 김억추(金億秋) 장군(將軍)이 말한 장작귀선(粧作龜船)을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장군(裵楔將軍)이 만들어 이것을 이 순신이 1597년(年) 9월(月) 16일 명랑해전에서 사용하여 전승신화(戰勝神話)를 남겼다” 라는 기록외 다수의 기록에서 배설이 사비(진주 유지와 백성들)를 투입 나주의 나대용의 기술로 나주의 배목수들이 장작귀선을 섬진강 어귀에서 건조했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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