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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호남 선비 - 청백과 효를 겸비한 선비, 송흠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송흠, 공직초기에 최부(崔溥로 부터 ‘공직의 길’ 배워
등록날짜 [ 2017년06월20일 09시48분 ]

역마를 타고 오다니 - 송흠과 최부의 일화
삼마태수 송흠이었지만, 공직 초기에는 최부(崔溥 1454∽1504)로 부터 ‘공직의 길’을 배웠다. 1)

초당 허엽(1517∽1580)이 말하기를, 응교 최부는 나주 사람이요, 정자 송흠은 영광 사람이다. 성종(1457∽1494, 재위 1469∽1494) 말년에 최부와 송흠은 홍문관에서 같이 일하고 있었다. 고향도 같은 전라도라 가깝게 지내는 터였는데 두 사람은 함께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갔다.


하루는 영광 삼계(지금은 장성군 삼계면)에 사는 송흠이 나주에 있는 최부를  찾아갔다. 점심 겸상을 물린 뒤 최부가 송흠에게 느닷없이 무슨 말을 타고 왔느냐고 물었다. 송흠은 역마를 타고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최부가 말하기를 “나라에서 역마를 준 것은 한양에서 그대의 집까지였고, 그대의 집에서 내 집까지는 개인적인 일인데 어찌 정부에서 내준 역마를 타고 올 수 있는가?”라고 질책하였다.


조정에 돌아온 즉시 최부는 송흠을 탄핵하였고 송흠은 파직을 당했다. 파직당한 날 송흠은 최부에게 사직 인사를 하니 최부가 말하기를 “자네는 아직 젊네. 앞으로는 더욱 조심하여야 할 것이네”하였다. 2) 이는 허엽의 문집 <전언왕행록>에 실려 있다. 3)


송흠은 공직 초기의 잘못을 교훈 삼아 더욱 조심하여 일곱 번이나 청백리에 선발되었다.

그러면 최부는 누구인가? 그는 나주에서 태어나 해남 정씨와 결혼하여 처가인 해남에서도 살았다. 그의 호 금남(錦南)도 나주의 옛 이름인 금성의 금(錦)과 해남의 남(南)을 각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그는 사림의 종주(宗主) 김종직 문하에서 공부 한 청렴하고 강직한 선비였다.


최부는 사리사욕과 방탕 그리고 무사안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 간관(諫官)이었다. 그는 훈구대신과 임금의 종실과 외척 그리고 후궁과 환관들의 타락을 신랄하게 공박하였고 심지어 임금의 잘못까지도 낱낱이 거론하였다.


한번은 연산군에게 ‘학문을 게을리 하고 오락을 즐기며 국왕이 바로 서 있지 않다’고 상소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3월, 사간원 사간인 그가 올린 상소는 너무나 격렬하여 다음 달에 그가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명나라에 갈 때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간의 직책을 회수하여 버렸다.


1498년 7월에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연산군 눈 밖에 난 그가 무사할 리 없었다. 붕당을 하였다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맞고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를 갔다.


그로부터 6년 뒤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최부는  곤장 100대에 노비가 되어 거제도로 유배 가는 것으로 되었으나, 연산군은 그리하지 않았다. 참형(斬刑)을 명한 것이다. 이 때 썼을 시가 전해진다.
 
북풍이 다시 세차게 부는데              北風吹更急 
남녘 길은 어찌 이렇게 멀까.            南國路何長 
매화는 차갑게 잔설을 이고              梅冷封殘雪 
말라버린 연꽃 가지 작은 못 속에 있네.  荷枯立小塘 

'연산군일기'에는 그에 대한 졸기(卒記)가 적혀 있다.


 '최부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정직하였으며 경서(經書)와 역사에 능통하여 문사(文詞)가 풍부했고, 간관(諫官)이 되어서는 아는 바를 말하지 아니함이 없고 회피하는 바가 없었다.' (연산군일기 1504년 10월25일)

송흠과 최부의 일화 제2탄


한편 『지지당 유고』에는 송흠과 최부의 일화 제2탄이 실려 있다.
1504년에 최부가 한양으로 압송당할 때 송흠은 길에서 최부를 만났다. 송흠이 최부에게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하신다면 어떤 여한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었다. 최부가 답하기를 “부모의 산소가 무안에 있는데 석물을 아직도 세우지 못하였고, 막내딸을 시집보내어 이것이 여한이라”고 하였다. 송흠은 “내가 마땅히 받들어 주선하겠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송흠이 전라감사가 되어 묘소에 입석(立石)을 하고, 응교 김자수의 아들 김분과 막내딸의 혼사를 주선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훌륭하게 여겼다. 4)

송흠과 최부. 두 사람은 정말 아름다운 인연을 가진 조선의 선비이다.

 
1) 송흠은 나이 33세인 1492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2) 송흠과 최부의 일화는 국민권익위원회 유튜브에도 소개되어 있다. : 〔역사 속 청렴이야기〕 최부와 송흠의 청렴

3) 허엽의 <전언왕행록>은 『지지당 유고』에 실려 있다.

4) 최부는 슬하에 딸만 셋을 두었다. 큰 딸은 유계린에게 시집갔는데, 유계린의 아들이 유성춘, 유희춘이다. 차녀는 나주의 나질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김분에게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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