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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내산서원과 8열부 정려비를 찾아서

우리 문화유적들 모두에게 떳떳하게 보여 지도록 지방정부 차원의 관심 필요한 것
등록날짜 [ 2014년06월28일 23시04분 ]

                                    영광 내산서원과 8열부 순절비를 찾아서

유월도 벌써 하순으로 흐르고 있다. 어제부터 비가 내린다더니 햇볕은 눈부시고 신록은 윤기가 가득하다. 며칠 전 향토사학을 연구하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제 내산서원과 백수해안도로 쪽으로 한번 다녀오자는 제의였다.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한번 다녀오고 싶었는데 잘되었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어제였다. 친구는 과천에서 KTX로 내려오고 차는 내가 준비했다. 우린 송정리역에서 만났다. 그리고 곧장 영광으로 달려 갔다.

내산서원은 수운 강항선생을 모신 사당으로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에 있다. 잠깐 강항선생의 생애를 살펴보자. 강항 선생은 호가 수은(睡隱)으로 불갑면 유봉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 총명이 남달랐다고 전한다. 5세 때 전라감사 신응시가 그의 재주를 시험하기 위해 다리 각(脚)자로 명제를 하자 즉석에서 「脚到萬里心敎脚- 다리가 만리를 가지만 마음이 가르친 것」이라고 응수하여 전라감사를 경탄케 하였다. 또한 7세 때에는 책장수의 맹자 한질을 즉석에서 암송함으로서 책장수가 천재라 하여 맹자 한질을 주려고 했지만 받지 않자 정자나무에 걸어놓고 갔다. 후에 그곳에 맹자정 기적비를 건립하여 기념하고 있다. 강항선생은 정유재란 당시 형조좌랑이었다. 휴가를 받아 영광에 내려 온 사이 왜란이 발발하자 곧바로 남원의 분호조판서 이광정의 휘하에 들어가 군량미를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남원성이 함락되자 영광으로 돌아와 김상준과 함께 의병 수백 명을 모아 고경명 장군의 휘하로 가려 했으나 영광이 함락되자 군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는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가기 위해 논잠포(염산)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왜군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강항의 처는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하고 아들도 물에 빠져 죽었다, 강항과 남은 식솔들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면서 한시도 그냥 보내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적정과 지리를 살피고 문물과 풍토, 관직, 적정의 강약 등을 유심히 살펴 몰래 기록했다. 그리고 그것을 귀국하는 김석복과 명나라 사신 왕건공 등을 통하여 조정에 전달했다. 이른바 적중봉소(敵中奉疏)이다. 적중봉소를 보면 그의 우국충정을 엿볼 수 있다. 선비로서 조국의 안위를 걱정하고 어떻게 하던지 왜란을 극복토록 하겠다는 충성심이 짙게 배어있다. 그는 체류 중에 일본인 승려 호소와라 세이카(藤原 醒호)와 아카마스(赤松廣通) 등에게 주자학을 전수하여 일본 주자학의 비조가 되었다.

그는 체류 4년 만에 승려들의 도움으로 어렵게 고국으로 돌아 왔다. 그리고 선조 임금을 뵙고 일본의 적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선조는 위로와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후일을 기약한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고 향리에 묻혀 후학들을 가르치는데 전념했다.

우리 역사에서 해외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더러 있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인물을 들어보면 백제시대에 일본에 한자를 전수한 왕인박사, 신라시대 해상무역을 통해 상권을 장악한 장보고 대사, 조선시대 일본에 주자학을 전수한 강항선생 등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산 서원은 그런대로 잘 관리되고 있었다. 유물전시관을 둘러보았다. 직계 후손이자 관리를 맡고 계신 강종원 선생으로부터 많은 일화도 들을 수 있었다. 우린 서원을 나와 불갑면 소재지에 있는 맹자정 기적비와 염산(논잠포)에 있는 강항선생 섭란 사적비를 둘러보았다.

일본에서는 강항선생의 인지도가 매우 높다. 반증이나 하듯이 강항선생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연구보고서도 많이 출간되고 있다. 강항선생이 최종 체류했던 오주시에선 대학교수들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매년 영광을 찾아온다. 그리고 강항선생의 사적지를 둘러보고 한국의 문화정책도 함께 엿보고 간다. 우리의 문화유적들이 그들에게 떳떳하게 보여 지도록 지방정부 차원의 관심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

백수 해안도로로 갔다. 대신리 해안도로 3거리를 지나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언덕 아래 있는 제각 비슷한 건물 앞에 바로 8열부 순절소비가 서있다. 8열부가 순절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한 비와 신위를 모신 제각에는 정유재란 당시 함평 월야에 거주하던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일가들의 비극적 수난사가 담겨 있다.

 몇 해 전에 후손들이 세운 건립기를 읽어 보자. 당시(1597년)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거주하던 동래정씨와 진주정씨 집안사람들이 정유재란을 당하여 서울로 피난을 가기 위해 영광군 백수읍 대신리 묵방포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가던 중 왜적선을 만나 피랍위기에 처하자 일행 중 12부녀가 스스로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 사실이 널리 알려져 광해 9년(1617년) 동국신삼강행실도에 그 내역과 그림이 수록되었으며, 숙종7년(1681년)에 열부로 지정되어 정려가 내려졌다.

당시 함께 피난을 가다 왜구에 붙잡혀 일본에서 3년간을 억류되었다 귀환한 정경득은 만사록(萬死錄)을 남겼고, 동생 정희득은 해상록(海上錄)을 남겼다. 조카인 정호인은 정유피난기(丁酉避難記)를 남겼는데 그들의 일기에도 그날의 동시순절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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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부는 동래 정운길(鄭雲吉)의 처 함양오씨(咸陽吳氏), 장남 정경득(鄭慶得)의 처 순천박씨(順天朴氏), 차남 정희득(鄭希得)의 처 함평이씨, 족질  정호인(鄭好仁)의 처 함평이씨이며, 진주 정함일(鄭咸一)의 처 함평이씨(咸平李氏)와 그의 딸 정씨, 진주 정주일(鄭主一)의 처 함평이씨, 진주 정절(鄭節)의 처 영광김씨(靈光金氏) 등이다. 이들의 정려각은 고향인 함평군 월야면에 세워져 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물에 빠져 죽으나 붙잡혀 죽으나 다를 바 없겠지만 여자로서 몸과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양 정씨 일가 부녀자들의 장렬한 순절은 비록 시대가 달라졌다지만 성이 상품화된 오늘날에 있어서  더욱 귀감이 되고 있다.
어느덧 해안도로에 석양이 물들고 있다. 영광은 글자 그대로 신령스러운 빛이 가득한 곳으로  오늘도 참 많은 것을 보고 배워간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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