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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의 수은 강항선생>일본 주자학의 아버지, 강항 (6)

강항선생과 후지와라 세이카, 아카마쓰 히로미치 등의 만남
등록날짜 [ 2015년03월06일 09시47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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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강항을 비롯한 유학자들과 가족들 38명은 사서오경을 베껴 쓴 대가로 조선으로 돌아 올 수 있었다. 그들은 160042일에 후시미를 출발하여 51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27)

 

강항의 귀국에는 세이카와 히로미치, 왜승 경안 등의 도움이 컸다. 특히 히로미치는 무사히 귀국 할 수 있도록 통행증을 얻어주고 대마도 까지 안내원과 뱃사공까지 지원하여 주었다. (28)  

. 후지와라 세이카 - 에도 시대 유학의 개조 開祖
이어서 유뮬전시관을 이리저리 보다가, 한 쪽에 후지와라 세이카라고 제목이 붙은 판넬을 보았다. 이 전시물은 위에는 후지와라 세이카 초상화가 있고, 아래에는 강항선생으로부터 주자학을 전수 받은 후지와라 세이카는 세이쇼 쇼다이와의 유불논쟁을 통해 새롭게 들어선 도쿠가와 막부에 주자학의 중요성을 인식 시켰고,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에 이르러 일본 주자학이 체계화되면서 일본 에도 시대는 그야말로 주자학의 시대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후지와라 세이카가 불교와 결별한 것은 16009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2-1616)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승리하고 교토에 왔을 때이다. (29) 이때 세이카는 니조성에서 세이쇼 쇼다이와 유불논쟁을 벌인 다음 불교와의 결별을 공언했다. (30) 

이 시기에 세이카는 이에야스로부터 강의요청을 받았다. 예전부터 이에야스는 주자학의 신분질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초청을 받은 세이카는 유복 儒服을 입고 이에야스를 찾았다. 이에야스는 세이카에게 잘 가르쳐 달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세이카는 강의를 시작하기 않았다. 의아해 하며 이에야스가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를 묻자, 세이카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장군님의 복장은 제 강의를 듣는 복장이 아닙니다.”
몸을 가지런히 하지 않고 성현의 가르침을 배우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의미였다.

당시에 이에야스는 간편복을 입고 있었다. 세이카의 말을 들은 이에야스는 옷을 정복으로 갈아입고서 세이카의 강의를 경청하였다. (31)

이후 이에야스는 세이카에게 에도 막부에서 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이카는 이에야스의 권유를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것은 160010월에 자결한 아카마쓰 히로미치 때문이었다. 

1600915일의 세기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서군 장수 이시다 미쓰나리(1563-1600)가 참수를 당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친분이 깊었던 아카마쓰 히로미치도 자결을 명받았다. 이에야스의 분노를 산 것이다. 제자이면서 후원자인 히로미치를 잃은 세이카는 통곡하였다. 세이카는 히로미치의 죽음을 애도하며 만시를 30수나 지어 영전에 바쳤다. (32)  
사진 : 후지와라 세이카 영정

 27) 강재언, p 285, 내산서원 수은 강항 선생 동상을 제막하면서라는 동판에도 선생은 후지와라 세이카의 친절한 도움으로 적지에서의 천신만고 끝에 귀국하게 되시었다.”고 적혀 있다.
28) 강항의 귀국 기록은 <간양록> ‘섭난사적적중문견록에 실려 있다.
29)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음력 915(1021) 일어난 전투이다. 

전투의 본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그 권좌를 두고 벌어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다툼이었고, 일본 전국의 다이묘가 두 세력으로 나뉘어 싸운 결과 도쿠가와 측이 승리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확고부동한 패자(覇者)의 자리에 올라 에도 막부를 세우는 발판을 다지게 되었다.  

30) 세이쇼 쇼다이(西笑承兌 1548 ~ 1608)는 일본의 교토 상국사 승려인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바둑 상대였고 막부 문서 담당(외교등) 실세였다. (위키백과, 세이쇼 쇼다이, 강재언, p 290) 그는 15979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교토에 코무덤을 세웠을 때, 공양법회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31) 세이카가 승복을 벗고 유복을 입은 것은 환속을 의미하고 유학자로 다시 태어났음을 상징하는 징표이다. 세이카와 이에야스의 에피소드는 후세에 널리 전해지고 있다. (호사카 유지, p 151-154)
32) 강재언,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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