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사태로 지역경제가 엉망이다. 관광산업도 쑥대밭이다. 오죽했으면 ‘여름휴가는 우리나라에서’라는 슬로건을 새누리당이 내걸었을까. 한편 신임 법무부장관은 ‘부패척결을 통한 공정사회 만들기’를 강조했다. 취임식에서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내린 부정부패는 자원의 효율적 분배를 가로막고 공정한 경쟁을 방해해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고 지적했다.
공직자여, 이번 여름에 청백리 기행을 하시면 어떨까? 수신(修身)과 힐링을 겸할 수 있는 청렴체험 말이다. 그곳이 바로 청백리의 고장 장성군이다. 장성군에는 부자(父子) 청백리 송흠과 송익경 그리고 백비(白碑)의 주인공 박수량의 흔적이 있다.
송흠(1459∼1547)의 흔적은 삼계면에 있는 관수정(觀水亭)과 뒷산의 묘소 그리고 기영정이다. 관수정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로 그가 말년에 지은 정자이다.
송흠의 별명은 삼마태수(三馬太守)이다. 목민관이 부임할 때는 전임 고을에서 말 일곱 마리를 받는 것이 관례였는데 그는 세 마리의 말만 받았다. 본인이 탈 말, 어머니가 탈 말, 아내가 탈 말, 각 한 필이었다. 이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6조’에도 소개되어 있다.
그는 예산도 절약하였다. 여산군수로 있을 때는 호산춘이란 술을 손수 빚어 접대비용을 줄였고, 호산춘 담그는 법을 한글로 적어서 부녀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1544년에 왜구가 경상도 사량진 포구를 습격하여 수군과 백성들을 마구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86세의 송흠은 병조판서 경험을 살려 중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왜구를 막으려면 수군을 보강하고, 판옥선을 만들 것을 건의했다. 그리하여 1555년에 판옥선이 만들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이었다.
관수정 뒷산에는 송흠의 묘소가 있다. 묘비명은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이 지었다. 관수정 앞에는 기영정이 있다. 전라도 관찰사 송인수가 1543년에 중종의 명을 받들어 정자를 짓고 노인잔치를 베풀었다.
송흠의 호는 지지당(知止堂)이다. 지지는 ‘멈추는 것을 안다’는 의미인데 노자의 <도덕경> 제44장에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하였다.
한편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에는 백비(白碑)로 유명한 박수량(1491-1554)의 묘소가 있다. 박수량은 별세 시 가족이 상여를 메고 고향에 갈 돈 조차 없어 명종임금이 장례비를 지원하여 준 청빈한 선비였다. 명종은 묘비를 하사하면서 “그의 청백함을 알면서 비에다 새삼스럽게 그 실상을 새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백에 누(累)가 될지도 모른다.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 하였다 한다.
박수량은 청빈하였을 뿐만 아니라, 권력실세에 대한 부정부패 척결에도 앞장 선 강직한 검찰관이었다.
1552년에 박수량은 전라도 관찰사를 하였는데 이 때 그는 영의정 이기의 오른 팔인 광주목사 임구령을 구속시켰다. 명종은 영의정 이기가 사헌부·사간원으로부터 탄핵을 받자, 이기가 거느린 양인(良人)이 전국에 몇 명이나 되는 지를 팔도의 관찰사에게 조사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어명에도 불구하고 7도의 관찰사는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은 권력자 이기의 보복이 두려워서 감히 조사를 못 하고 있었는데, 유독 박수량은 조사를 방해한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시키라고 임금에게 보고하여 임구령을 구속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록에 적은 사관(史官)은 그를 명신(名臣)이라고 극찬하였다.
또한 박수량은 전라도 관찰사로 근무한지 두 달 되었을 가을에, 날씨가 너무나 불순하여 백성들이 병에 걸리고 임산부들이 죽을 위험에 있음을 직시하고 조정에 약제 지원을 요청하였다. 진실로 애민(愛民)하는 목민관의 행동이었다.
박수량의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이다. 정혜는 청백수절(淸白守節)의 정(貞)과 애민호여(愛民好與)의 혜(惠)를 의미한다.
공직자여, 이 여름에 장성군에서 청렴체험을 하시라. 왜 염결(廉潔)해야 하는 지를 느끼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