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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류성룡과 <징비록>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우리는 과연 ‘징비’하고 있는가?
등록날짜 [ 2015년09월17일 10시07분 ]

1600년 1월에 류성룡은 옥연정사에 소나무를 심었고, 5월에는 대나무를 심었다.  그가 송죽을 심은 뜻은 무엇이었을까.

이즈음 류성룡은 임진왜란 7년 전쟁 글을 썼다. 1604년에 그는 책을  탈고하였다. 책 이름도 <난후잡록>에서  <징비록>으로 고쳤다.

1604년 7월에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을 썼다. 여기에는 <징비록>을 쓴 사연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겪은 일들을 기록한 것이다.(중략) 아! 임진년의 전화(戰禍)는 참으로 참혹했다. 수십일 사이에 한양 · 개성 · 평양 세 도읍을 상실하였고 팔도가 와해되었으며 임금이 피난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지금과 같이 평화를 되찾은 것은 하늘 덕분이다. (중략)

시경(詩經)에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내가 그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여 나무라고 훗날의 환난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한다.)” 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 

백성들이 떠돌고 정치가 어지러워진 때에 나처럼 못난 사람이 나라의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기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기울어지는 기틀을 바로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시골에 눈 뜨고 살아서 구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으니 어찌 나라의 관대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근심과 두려움이 조금 진정되어 지난날의 일을 생각할 때 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중략) 이 일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신하인 내가 나라에 충성하고자 하는 간절한 뜻과 나라에 보답치 못한 죄를 빌기 위한 뜻이 함께 담겨있다.

                                 갑진년 7월  서애 류성룡
 
<징비록>은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극히 소수의 사람만 보았다. 1633년에 류성룡의 아들 류진이 <서애집>을 간행하면서 그 안에 수록되었다. 1695년에는 일본 교토에서 <징비록>이 간행되었다. 일본판 서문은 가이바라 엣켄이 썼는데, 그는 서문에서 “비록 나라가 커도 전쟁을 좋아하면 반드시 망한다. 비록 천하가 평안하여도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험하다. 전쟁을 좋아하고 잊는 두 가지를 어찌 경계하지 않겠는가? 조선은 전쟁을 잊었기 때문에 거의 망할 뻔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징비록>은 정작 조선 조정에서는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징비록>을 폄하하였다. 1607년 5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을 읽어보자. 

풍원부원군 류성룡이 졸하였다. (중략) 일찍이 임진년의 일을 추기(追記)하여 이름하기를 <징비록>이라 하였는데 세상에 유행하였다. 그러나 식자(識者)들은 자기만을 내세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고 하여 이를 기롱(欺弄)하였다.
                  
한편 1601년 10월에 류성룡은 청백리로 뽑혔고, 12월에는 서용(敍用)의 명이 내렸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물러나서 말년을 보내도록 하여 달라고 선조에게 청하였다.   
 1604년 3월에 선조는 관직을 복구하였으며, 7월에 호종공신 2등에 책봉하였다. 류성룡은 상소를 올려 공신록에서 이름을 삭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는 선조로부터 내려 온 모든 것을 사양한 것이다.  

1607년 5월6일에 류성룡은 세상을 떠났다. 66세였다. 12일에 부음이 전해지자, 선조는 승지를 보내 조문하게 했다. 백성들도 슬퍼했다. 5월13일자 선조실록을 읽어보자.  
   
3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했다.
사신은 논한다. 도성(都城) 각 상점의 백성들이 빠짐없이 묵사동(墨寺洞)에 모여 조곡(弔哭)하였는데 그 숫자가 1천여 명에 이르렀다. 묵사동에는 유성룡이 살 던 집의 터가 남아 있었다. 각 아문의 늙은 아전 30여명도 와서 곡하였다. 시민과 서리(書吏)등이 본가가 청빈하여 치상(治喪)을 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포(布)를 모아 부의(賻儀)하였다.

(중략) 시사가 날로 잘못되어가고 민생이 날로 피폐해지는데도 지금 수상(首相)된 자들이 모두 이전 사람만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추모하기에 이른 것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백성들 역시 불쌍하다.

그랬다. 조선 백성들은 불쌍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 된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북쪽 오랑캐가 나라를 짓밟았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인조 임금이 삼전도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고두례를 하였다. 징비(懲毖)를 못한 탓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 때 뿐이었을까. 1910년에 조선은 일본에게 아예 망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는 과연 ‘징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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