程度가 넘지 않도록 잘 조정하고 평소에 몸가짐이나 生活을 잘 조절하여 항상 분수를 지킨다는 뜻을 내포한 '節齋公'이라는 호를 통해 먼저 節齋公 姜永球先生을 알 수 있었다.
매사에 節齋를 생활 신념으로 가지신 그런 분이셨던 건 아닐까.
영광에서 백수읍으로 들어가면서 이제는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자연부락인 명산(대절산을 명산으로 말해옴)마을에 다다른다. 자자유촌해 온 마을로 諱는 永球이시며 字는 民老이고 號는 節齊公이신데 姜永球先生께서 말년까지 사셨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서 근대화가 되기 전까지에는 영광에서 이곳까지 들어오려면 한시간이상이 걸린 곳인데 옛날부터 '아리랑고개'로 불리우는 고개를 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곳에 명산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일본순사 놈들이 제법 눈치가 밝고 영악한 것은 그 지역의 동향과 인사에 대한 파악을 모조리하고 들어온 것으로 파악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조금도 과장됨이 없다.
節齋公 姜永球先生께서는 엄격하고 뚜렷한 가치관으로 그 당시에 드물게 향토에서 선비정신을 가지셨던 분이셨던 것 같다.
일본순사들은 이 곳을 방문할 때는 아리랑고개에서 부터 말에서 내려 節齋公 姜永球先生께서 거쳐하는 곳까지 걸어서 들어와 인사를 드리고 지금의 백수읍일대를 순시해 왔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先代로부터 천석, 만석궁을하시고 바둑을 즐기시며 四書三經과 禮學에 이미 높은 경지에 달했다고 現存하는 이 마을 노인들은 말씀하신다.
또한, 한의학에도 밝으셔서 많은 저서를 남기셨으나 보관부실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서적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그 당시 민간요법인 쑥뜸을 좋아하신 節齋公 姜永球先生께서는 매일같이 습관처럼 쑥뜸을 하셨다고 지인들이 귀뜸해 준한다.
또, 말년 무렵 어느 날 바둑을 두시다가 쓰러지시니 바둑판과 함께 온갖 좋다는 한약재를 커다란 가마솥에 다 넣고 탕재를 해 드시기도 했다고 전한다.
의학이 발달한 지금에서는 다소 난해하지만 그 당시로는 쉽게 이해가 되는 부분이리라.
先生께서는
당시 하인이나 노비들에게도 人心을 잃지 않아서 韓國戰爭으로 이지역의 피해는 다른 지역보다 훨씬 심각했으나 팔남매를 둔 先生의 자식들까지 조금의 피해도 없었단다.
節齋公 姜永球先生께서는1964년 10월에 영광백수중앙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하고 학교발전위원으로 활동한 명성에 비해 덜 알려진 부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향토를 지킨 어른들을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필자가 백수초등학교를 찾아 나선 2015년 12월 31일은 여느 농촌학교가 거의 그러하듯 어느덧 90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학교발전을 위해 부지를 희사한지 51년이 넘었다는 기록을 보며 착잡한 심정을 한편으로는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농촌지역의 학교로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節齋公 姜永球先生의 공적비가 웬지 을씨년스럽기만 해 뜨거운 가슴으로만 품고 서쪽바다로 지는 해를 보내드리기 위해 총총히 빠져나왔다.
앞으로 17개 광역시도 각 지역을 위해 헌신, 노력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소박하게 전할 것을 다짐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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