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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편소설>睡隱 姜沆先生과 李氏夫人이야기

세간에 덜 알려진 민감한 사안이라 소설이 더 조심스러워
등록날짜 [ 2016년01월03일 16시04분 ]

◇ 수은(睡隱) 강항선생(姜沆先生)과 이씨부인(李氏夫人) 이야기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명종22년 1567년 정묘(1세) : 5월 17일, 영광 불갑 유봉리에서 몽오(夢梧) 강극검공(姜克儉公)과 모친 영동 김씨(화순)의 5남 1녀 중 중 넷째로 태어났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구성하였고 논픽션과 픽션을 융합하여 선생의 발자취 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했던 마음을 선남선녀로 쉽게 나타내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했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지금으로부터 450여년 전 전남 영광 한 마을에 신동으로 불리는 천재소년이 살고 있었다.


3세에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맏형인 저어당 강해(姜瀣)로부터 배우기 시작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학문 성취가 놀라울 정도였다


5세 때 일이다. 전라감사 백록 신응시가 영광에 들렸다. 강항은 전라감사 백록 신응시가 각(脚)자로 명제하여 글을 지어 보라하니 곧 이어 “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이라는 칠언 시(七言 詩)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을 정도로 이 지역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에 까지 신동으로 입소문이 나 있었다.

이어 강항이 7세 때의 일이다. 제법 학식이 높은 한 책장수가 영광 불갑면 안맹마을(현재 불갑면 안맹리)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때 책장수에게 반갑게 소년 강항이 다가와 대뜸 맹자 (孟子)한 질을 보여 달라고 하였다. 책장수는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린아이가 느닷없이 다가와 맹자 한 질을 보여 달라하자 그는 한동안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마지 못 해 건네주며 골려줄 생각에 골똘했다.


이런 책장수의 행동거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강항은 맹자 한 질을 첫 장부터 의젓하게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책장수는 그가 너무나 젊잖게 자리를 잡고 마치 책에 빠져드는 듯 맹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뿐 아니라 하도 어이가 없어 꾀를 내 골려줄 생각으로 마침내 자발적으로 내기를 걸었다.


“네가 ‘맹자’를 읽고 있는 모습이 제법이구나. 네가 맹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을 한다면 이 책(맹자 한 질)을 모두 주겠다.”고 비웃으면서 능청스럽게 거듭 내기를 청했다.


그러나 7세 소년 강항은 책장수의 내기걸기 약속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못 들은 척 계속 책만 뚫어지게 보며 맹자 책 1권을 넘어 2권, 3권으로 옮겨가며 진지하게 읽고 있을 뿐이었다.


책장수는 미더움에 연신 하품을 하며 책을 읽고 있는 소년을 지켜보고 있다가 어느덧 서너 식경(食頃)이 흘러 강항이 맹자 책을 모두 되돌려주면서 공손하게 책장수에게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아저씨!! 구하기 힘든 맹자 책을 읽게 해주셔서 참으로 고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툭툭 바지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 집에 가려고 했다. 책장수는 속으로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한편으로는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 네가 나하고 내기를 했잖느냐, 왜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이냐?”며 힐책을 하였다. 어린 강항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책장수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방금 책을 읽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말씀까지 드렸는데...“ 거듭 책장수는 ”옳거니“ 하며 내심 속으로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너에게 맹자 한질을 보여주면서 책을 읽어 보는 것을 허락하되 맹자책을 모두 알고 있는지, 내기를 했잖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이냐?“ 그러자 소년 강항은 그때서야 씩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방금까지 들여다본 맹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줄줄 암송해 나갔다.


오히려 책장수가 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첫 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그 다음 장을 펼쳐보면서 소년 강항이 암송하는 대로 따라 연신 책장을 넘기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언제 끝났는지도 모르게 맹자 한 질 끝 부분을 읽어 내려가고 있는 강항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책장수는 한동안 멍하니 소년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윽고 강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책장수에게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아저씨! 고맙습니다, 언젠가 아저씨가 우리 마을에 들리시게 될 것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오늘처럼 우리 마을에 오시게 되면 맹자 책 한질을 몽땅 읽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오늘 오셔서 맹자 한 질을 다 보여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이미 이 맹자 책 내용들은 모두 내 머리 속에 다 들어 있으니 이제 맹자 책은 저에게 그냥 주려고 하지 마시고 괜찮으니 다른 마을로 가셔서 이 맹자책 마저 파시고 돈 많이 버세요.“라며 소년 강항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쏜살같이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던 책장수는 어린 소년과 내기를 했지만 어른으로서 부끄럽고 염치(廉恥)를 생각해 볼수록 그냥 갈 수가 없었다.


결국 책장수는 영광 불갑면 그 마을 정자에 맹자 책 한질을 매달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책장수는 다른 마을로 분주히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혼잣말처럼 “장안(長安) 소문에 의하면 호남지역에 신동이 있다더니 이 마을에서 내가 드디어 그 신동을 오늘에서야 만나게 된 게야!!” 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안맹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훗날 이 마을 정자에 맹자 한 질을 걸어 논 곳을 발굴해 내 맹자정(孟子亭)이라 이름 지으니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맹자정(孟子亭)이 강항선생의 고향 마을인 영광군 불갑면사무소 근처에 역사적 사실로 남아있게 되었다.


강항이 8세 무렵이었다. 강항의 부친 몽오공 강극검 공은 지금까지 큰 형 강해(姜瀣)에게서 글을 배웠으나 더 큰 학문을 접하게 해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때마침 인근 무장현 구암마을에 훌륭한 학자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걸 수소문(搜所聞)해 알게 되었다. 그는 죽곡 이장영 선생으로 광주목사를 지내고 향리에서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부친 강극검은 강항을 죽곡 선생에게 보내기로 마음 먹었다. 이내 초봄이 되자 날씨도 차츰 따뜻해졌다.


강극검은 어느 날 강항을 불렀다. “항아, 네가 지금까지 형들로 부터 공부를 배웠다만 아직 낮은 산에 올랐을 뿐이다. 산은 자꾸 높아지고 큰 산까지 오르려면 훨씬 많은 학문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큰 학문은 큰 스승을 만나야 한다.


무장현에 죽곡선생이 계시는 구나. 조만간에 채비를 차리고 그 분에게 갈 수 있도록 배편을 마련할 터이니 단단히 준비하도록 하여라.“


3월 초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일찍 강항은 무장현 죽곡 선생을 뵙기 위하여 길을 떠났다. 무장현 칠암포구에서 내려 다시 한나절을 걸어 구암마을에 도착하였다. 마을을 둘러싼 산에는 괴상한 바위들이 많았다. 마을 앞에는 강물이 흘렀다.


강 둑에는 자운영 독새기 같은 풀들이 파릇파릇 올라오고 있었다. 괴이한 바위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강물이 바위를 돌아 흐르는 마을 속으로 깊숙히 들어오니 웬지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죽곡 선생의 집을 찾아 들어 갔다.


며칠전부터 연락을 받은 죽곡 선생은 소년 강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항은 우선 죽곡에게 큰절로 인사드렸다. “ 선생님 강항입니다. 저의 아버님께서 ‘학문이란 배울수록 더 배울게 많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스승님을 찾아 봬라고 해 오늘에서야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렇더냐!! 그래, 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잖아도 몇 달 전에 너의 아버지로 부터 연락이 있었다. 너의 글재주에 대한 이야기도 잘 들었다. 부디 더 열심히 공부하여 큰 그릇으로 거듭 났으면 좋겠구나.“


강항은 구암 마을에 들어서면서 마을 강가에 큰 바위가 흡사 서있는 사람 얼굴 같은 형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생긴 바위인지 가장 궁금해 했다. “ 스승님, 이 마을엔 매우 특이하게도 여기 저기 괴이한 바위들이 많은데요. 특히 강가에 서 있는 저 큰 바위는 무슨 바위인가요?“ 


죽곡은 강항의 당돌한 첫 질문에 너털웃음으로 답하면서 “그렇단다. 이곳 마을을 둘러싼 산들에는 큰 바위가 많고, 바위마다 재미있는 전설이 있단다. 특히 강가에 서 있는 저 큰 얼굴바위는 큰 바위 얼굴 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큰 바위 신령님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신령스런 바위라서 몇 년 동안 오래 오래 보면서 소원을 빌면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전해 오고 있다. 너도 매일 아침 큰 바위 얼굴을 보면서 소원을 빌어 보거라.


저 큰 바위 신령님은 수천년 동안 저곳에서 저렇게 깊은 생각을 갖고 마을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지. 이곳에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어려운 일에 처하거나 각자의 소원을 빌면 저 큰 바위신령님은 골똘히 생각하여 어려운 일을 이겨갈 수 있는 가르침을 준다고 마을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믿고 있지.


또 사람들은 자기 처지를 생각하면서 고심을 하게되면 세상만사를 헤쳐나갈 수 있는 정도(定道)를 알게 된단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저 큰 바위얼굴의 큰 가르침과 신령스러움을 받아야 한단다.


적게는 개인으로부터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 까지 일을 처리할 때는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여 모두에게 공평하게, 모두에게 이롭게 처리해야 한다. 나는 네가 저 큰 바위얼굴의 큰 가르침을 받아 큰 그릇이 되기를 바란다.“


소년 강항은 죽곡 선생 문하에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매일 아침 일어나면 먼저 큰 바위얼굴을 보고 품은 뜻을 다지며 깊이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했다.


강항은 매양 공부가 끝나면 죽곡 이장영 선생의 막내딸인 함평 이씨 소녀(훗날 애생이 엄마로 둘째부인)와 어울리며 소꿉친구로 함께 마을 뒷동산과 냇가에서 자주 어울려 놀았다.


이곳에서 개울가, 뒷동산은 강항에게는 자연스러운 놀이 공간으로 충분했고 마을 앞 냇가에는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거기에서 멱도 감고 송사리나 붕어, 매기 등의 물고기 잡는 재미에 행복한 유년(幼年)시절을 보냈다. 학당의 또래 친구들과 강항은 늘 이씨 소녀(애생이 엄마)를 챙겨주며 함께 놀았고 둘이서는 자연스럽게 또래 아이들처럼 가깝게 지냈다.


죽곡 선생의 가르침은 참으로 엄격했다. 글을 가르치면서 늘 선비정신과 애국충정을 같이 가르쳤다. 벼슬만을 탐하는 벼슬아치가 되면 결코 안 되며 임금과 백성을 위하는 선비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매사를 큰 바위신령님처럼 골똘히 생각하여 매사를 담담히 처리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구암마을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반년이 지나게 되자 죽곡 선생은 강항에게 몇 일간 고향에 다녀오도록 하였다.


“항아 이제 고향에 부모님께 다녀 오거라. 학문도 중요하지만 간간이 몸이 무탈함을 알려 드리는 것도 효도의 근원이다.“ 다음날 소년 강항은 구암마을을 나서서 한나절 만에 칠암마을 포구에 도착했다.


마침 포구 입구에는 인근마을에서 유일한 유생들의 학당인 칠암마을 향교가 수십 년 전부터 자랑스럽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날은 유별나게도 이 향교를 중심으로 글깨나 하는 유림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들은 서슴없이 천재 소년 강항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때 강항이 신동이라는 소문이 조선 팔도에 자자했던 터라 유림들은 소년 강항을 거듭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 마을 유림들은 송나라 주자가 집필했다는 중국역사서 통감강목을 건네주며 읽어 보라고 권했다. 강항은 통감강목을 건네 받자 마자 조금도 막힘없이 줄줄 읽어 갔다.


결국 강항은 그 책을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밤새도록 읽고 또 읽어 내려갔다. 다음날 아침 강항은 마을 유림들 앞에서 통감강목을 줄줄 외우니 칠암마을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신동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드디어 칠암마을 유림 중 한 원로가 나서서 “오늘 우리 칠암마을에서 천재소년 신동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마을의 경사입니다. 그리하여 이 칠암 마을을 앞으로는 중국고서 통감강목을 다 암송해 버린 신동이 우리 마을에 왔으니 `강목촌`이라 명명했으면 하오!!“ 라고 말하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찬동(贊同)하여 칠암 마을을 강목촌(綱目村)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뿐 아니라 9세에 강항의 학문의 깊이는 더해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라는 시를 지어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학문에 뜻을 두고 전념하였으나 가까이에 이씨 소녀가 있었기에 매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강항은 10세가 되자 죽곡선생 문하에서 2년여 수학을 마치고 이씨 소녀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이 유봉마을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강항은 고향 유봉에 돌아와 엄격한 부모님의 훈육과 가풍아래 학문에 전념하며 선비로서의 길을 닦아 나갔다. 불행은 날벼락처럼 다가온다.


강항이 14세에 들어 모친인 김씨부인이 돌아 가셨다. 강항은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혈육인 어머니의 죽음을 당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면서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효심이 남달랐다.


둘째 형 준과 셋째형 환과 함께 3년간 시묘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어린 나이에 벌써 지극한 부모에게 효사상의 선비로서 덕목을 실천하며 참다운 선비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16세에 책문으로 향시에 합격하고, 21세에는 향선 3장 시험에 합격하여 이름을 날렸다. 드디어 22세에는 진사로 뽑혔다. 22세가 되자 이 해 진주 김씨와 결혼을 하였고 안정된 가정에서 이미 과거에 합격한 맏형인 저어당 해(瀣)와 둘째 형인 준(濬)에 이어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항이 1591년 25세에 집안에 또 다시 불행이 찾아 들어왔다. 선조는 ‘호남의 문장가는 강 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나 이런 문장가인 강 해를 선조는 정여립사건에 연루시켜 신묘사화로 몰아 저어당 강 해를 억울하게 죽였다.


이때부터 강항은 이를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하며 애상(哀傷)해 하였으나 겉으로 그러한 자취를 감추면서 항상 스스로를 경계하며 지켰다.

조선 중기 선조는 즉위(1567년) 이후 사람을 널리 등용하고 유학 경서와 저술을 간행하였으나 재위 중 동서, 남북 등 사색당파싸움으로 붕당(朋黨)정치로 서로 갈라지고 지리멸렬한 싸움으로 국제정세를 오판하여 이어지는 참혹한 왜침의 임진왜란을 막지 못했다.


1592년(선조26년) 졸지에 나라가 짓밟혀 왕과 조정이 의주 까지 쫒겨가고 말았다. 전국적인 의병 봉기와 더불어 조정은 명나라를 끌어들임으로 1년 4개월 만에 가까스로 선조는 다시 한양에 입성하게 된다.

16세기 후반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라는 인물이 등장해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열도를 통일했다.(1591년)


통일을 달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무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무사들을 모아 대륙출병의 야욕을 불태웠다. 오랜 기간의 싸움에서 얻은 제후들의 강력한 무력을 해외로 방출시켜 국내의 통일로 치안이 불안했던 왜국의 안전을 도모하고 신흥세력을 억제시키면서 조선까지도 지배하겠다는 대륙 침략의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1592년 4월 14일 일본군은 고니시가 인솔한 1번 대는 병선 700여 척으로 부산포에 침입하였다. 곧바로 부산진과 동래성을 점령했다. 가토가 인솔한 일본군 2번 대는 4월 19일 부산에 상륙하여 경상 좌도를 택하여 울산을 함락하고 충주로 향하였다.


일본군은 9번 대 까지 총병력 10만을 연달아 투입하여 불과 20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다행히 전라도는 진격로에서 벗어나 큰 피해는 없었다.


그러나 전 국토는 전쟁 상황에 들어갔고 정규 병력이 턱없이 부족하고 어디에서 사태가 일어나면 그곳이 중심이 되어 군병을 모으는 모병제였기 때문에 군병을 모으는 것이 쉽지 않았다.


선조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의주까지 피난가고 조선 팔도는 일본군에 순식간에 짓밟히고 조선은 그야말로 아무런 힘도 없는 허수아비만이 사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


다행히 지방마다 향토를 이끌던 유생과 선비 승려 등이 변변한 병기도 없이 오직 의기(義氣)만으로 스스로 의병이 되어 일어났다. 영광에서도 유림 유생들과 함께 강항은 의곡 군기등을 모아 제봉 고경명 의병소에 보내는 등 기울어 가는 나라의 등잔불같은 운명을 붙잡기 위해 힘을 바쳤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1593년 4월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호남지역까지 다니며 군민을 격려하며 민심을 수습하려 힘썼다. 전시상황 속에서도 조정(朝廷)은 전주에 분조를 두고 인재(문관, 무관)를 보충할 수 있도록 전주에서 과거시험을 치러 인재를 등용토록 했다.


이때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이 전주에서 실시한 과거시험(별시문과)을 치루기 위해 27세(1593년)의 강항은 전주에 올라가 하룻밤을 객주(客主)집에 묵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던가. 강항은 뜻하지 않게 소꿉친구인 이씨 소녀를 운명처럼 이곳 객주 집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씨 소녀(죽곡선생의 첩실로 막내 딸)는 과년(瓜年)해 구암마을인 고향을 떠나와 수년전부터 이곳에 올라 와 먼 친척인 객주를 도와주며 장사를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강항은 단호하게 이씨 소녀를 짐짓 모르는 척하고 오로지 과거시험에만 전념하여 별시문과 병과에 합격하고 객주 집에 있는 이씨 소녀( 훗날 이씨 부인이며 애생이 엄마)몰래 곧바로 고향인 영광 유봉마을로 내려왔다.

강항이 언제 어떻게 내려간 영문도 모른 체 며칠 동안을 뜬눈으로 밤을 보낸 이씨 소녀의 생각은 남달랐다. 어릴 적 함께 온 마을을 돌아다니며 뛰어 다니며 놀았던 사이로 오매불망(寤寐不忘) 꿈속에서 그리던 정인(情人)이었으며, 이미 어린 시절 천재소년 강항으로 기억하고 있던 이씨 소녀는 어릴 적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가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강항이었다.

이씨 소녀는 그동안 일편단심의 마음으로 강항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채 살아 가다가 이처럼 낯선 타관 땅에서 다시 재회를 하고 보니 ‘이게 내 운명이구나‘ 라고 다짐을 하며 오로지 하나의 생각에 잠겨있었다.


마침내 이씨 소녀는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하면서 오로지 강항만을 생각하며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어서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을 찾아 갔다.
 
이미 진주 김씨 부인과 결혼한 강항의 단호하고도 엄격한 외면 속에 이씨 소녀는 수일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에게만 품은 애틋한 사랑을 이루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길거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집안어른들은 한결같이“이러다가 한 처자를 우리 마을에서 굶주림에 횡사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침내 주변 마을 집안 어른들이 문중회의를 열어 ‘사대부 가문에서 처첩을 두는 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해 내 어른들의 허락을 받아서 강항은 두 번째로 이씨 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지 못한 강항은 이씨 부인을 맞이하고서야 처음으로 딸(애생이)을 얻어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어 강항은 30세에 이르러서야 꿈속에 바다 속 해룡이 가슴으로 품고 들어오는 태몽으로 아들을 얻었는데 태몽과 같이 이름을 용(龍)이라 지었다. 그의 아들 용(龍)과 애생이에 대해 얼마나 사랑이 깊었는지, 당시 31세에 영광 논잠포 앞바다에서 아들 용과 귀염둥이 애생이를 잃고 통한 속에 시를 써 남기기도 했다.


강항의 처절하고도 비통한 심정 속에서도, 극도로 절제한 아픔과 슬픔은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 아프게 배어나고 있다.

아이야 !! 아비를 잊지 말라.  (兒兮莫望父)
무고한 너를 죽게 만든 것이 오직 나의 죄라 (致汝無辜惟我罪)
평생(백년)토록 부끄럽고 원통해서 가슴이 미어지고 매우 한탄스러운 눈물만 마구 흐른다.
(百年慙痛淚闌于) 


강항과 이씨 부인과는 참으로 모진 인연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에도 계속 이어져 존재한다. 정유재란이 발발(勃發)하고 피란길에서 강항(姜沆)과 이씨 부인은 이미 논잠포 앞바다에서 예고도 없이 생이별(生離別)을 했기에 서로가 지금까지 생사(生死)를 까맣게 모르고 있으며 여자인 이씨 부인은 더더욱 왜놈들의 전쟁 난리 통에 강항의 식솔(食率)로부터 홀로 떨어져 건너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황망(慌忙)하게도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왜놈들이 일으킨 전란 통에 급기야 포로로 바다 한 부분인 이름 모를 왜선(倭船)에 끌려와 일주일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순천 앞바다 왜선(倭船)에서 외로이 식솔(食率)들과 신세 한탄(恨歎)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이씨 부인의 외침을 저 건너편 배편에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이날 이씨 부인의 흐느낌과 외침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하는 절규의 외침이었다. 냉기로 가득한 남해 바다를 온통 한으로 적시며 그 통곡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애처롭고 처절하고도 가냘프게 바람에 묻어 들려오고 있었다.

“영광사람 어디에 없소?!”

이 절규(絶叫) 속에 품은 속마음은 얼마나 님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고 영광사람을 찾아 그와 아들과 딸인 용과 애생의 생사 소식을 듣고 싶어 그랬으랴 싶다.

“여보시오!! 영광사람 어디 없소!!!”

건너편 배에서 들려오는 짧은 외마디 소리에 건너편 배에서 그와 함께 있던 둘째 형수가 깜짝 놀라며 강항(姜沆)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한 것이다.

“서방님! 저기 저 사람!! 애생이 엄마가 분명하오!!!” 연신 건너편 배에서 쓰러질 듯 들려오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씨 부인의 애간장을 끓이는 소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말마적인 외침으로 넓고도 넓은 공허한 바다에서 메아리만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포로이면서도 무지막지한 왜선에서 그렇게 야무지게 대항했던 이씨 부인은 애석하게도 다음날까지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왜놈들에게 당당하게 아우성으로 맞서다가 결국은 왜놈들에게 뭇매를 견디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다.

강항(姜沆)과 이씨 부인(李氏 夫人)의 만남은 인생에서 우연(偶然)과 필연(必然)을 우리들로 하여금 교훈처럼 받아들여지고 그 당시 이씨부인(李氏夫人)의 절개와 지조를 현재까지도 높이 칭송하며 앞으로도 실로 귀감(龜鑑) 되고 지아비를 섬기는 여인의 행동으로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강항(姜沆)은 이를 칠언시(七言詩)로 부부의 서러운 이별과 처절한 슬픔을 피눈물로 섞어 노래한다.  

 *상사한(相思恨)
   창해망망월욕담(滄海茫茫月欲沈)
   푸른 바다 아득히 멀리서 달이 지려는데,
   누화량노습리금(淚和涼露濕罹襟)
   이내 눈물이 차디찬 이슬로 변하여 내 옷깃 적시네.
   영영일수상사한(盈盈一水相思恨)
   그렁그렁한 눈물이 한줄기 흐르는 건 님을 그리워하는 한(恨)이니,
   우녀응지차야심(牛女應知此夜心)
   우리 둘이 오늘 밤 이 아픈 마음을 그대만은 알리라.

이러한 아픔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생 포로로 끌려간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사상과 선비정신은 그 어떠한 역경(逆境) 속에서도 이후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강항이 31세에 모진 포로생활을 하면서 일본 교토 후미성에서 여섯 살이나 더 많은 왜승(倭僧) 순수좌를 제자(弟子)로 받아들인다. 순수좌와 나눈 이야기 중에 왜군의 장수인 적송광통이 등장하게 된다. ‘철천지원수와 같은 나라이며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던 강항에게 순수좌는 여느 왜인하고는 달랐다.

순수좌 역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폭정에 이미 질려 있었고 중국이나 조선이 왜국을 침략해 순수한 왜민족을 보호해줬으면 한다는 대화를 나눈다.

이 말에 깜짝놀란 강항은 순수좌와 속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끊임없이 갖게되고 순수좌의 마음을 안 강항은 성재기와 사상와기를 직접 적어 성과 와를 아호로 내려준다.

그리하여 순수좌는 후지와라세이카라(등원성와)는 유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필담(筆談)을 통해 강항휘초를 전수하였으며 사서오경을 발문해 일본유교(日本儒敎)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이미 강항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을 넘어 조선의 유교경전과 주자학(朱子學) 사상으로 도학(道學)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최고의 지성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왜국에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1% 식자층 부류의 승려계급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왜승(倭僧)으로 신유학 사상에 잔뜩 목말라 있었으며 최고봉에 오른 강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경제부국을 말하는 현대 일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강항의 적중 봉소에 의하면 이 당시 왜놈들의 99%가 무지(無知)랭이 민족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을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에도(江戶) 시대가 시작될 때를 기준으로 중세(中世)와 근세(近世)로 나뉜다. 같은 봉건시대면서 왜 시대를 나누는 것일까? 그것은 생활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

그때까지는 종교불교의 영향이 컸으므로 학문은 승려를 제외하면 일부 학자 또는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유학의 전파로 인한 영향으로 종교를 배제한 합리적인 교육이 일반 대중 사이에 확산되어 사숙(私塾)과 데라고야(寺小屋)와 같은 서당에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전국적으로 뻗어 나갔다.

그 곳에서 사용한 교본의 대부분은 소학부터 시작해 강항휘초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이었다.

'공자, 맹자 曰….'

 크게 소리를 내어 읽으며 무릇 교육과는 인연이 없던 일반 서민들이 처음으로 글자를 알고 학문에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 척박한 사무라이시대에서 기초가 다져진 신유학은 곧바로 이어지는 명치유신을 몰고 오는 근세 문화의 개막에는 많은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활동이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강항(姜沆)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피노되어 간난신고를 거치며 너무나도 비참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그가 강항휘초를 통해 발문한 사서오경의 일역(日譯)에 힘써 일본인의 신교육과 문화 부흥에 헌신한 공적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일본에 수은 강항선생연구회 무라까미 쓰네오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강항은 충효사상과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정신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정립하면서 하루도 심의(深衣)를 벗지 않고 조선선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생활했으며 적국에서도 항상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에 순수좌는 유교의 복심이랄 수 있는 심의(深衣)에 동경하게 된다. 강항이 아침과 저녁을 맞이하면서 선비로서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고 의관을 정제하는 모습에 매료되어 한사코 심의의 제작과정에 매달리게 된다.

거듭 순수좌의 열정에 감동을 받은 강항은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의관의 정제기술까지 전해주게 된다.

그러나 강항은 결코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시시때때로 탈출을 계획했다.

한 번은 강항이 오즈에서 탈출을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의 무자비한 침략을 엄히 꾸짖는 문장(文章)으로 석가모니가 천벌을 내려 마침내는 혹독한 대가를 치룰거라는 엄청난 벽서(壁書)사건을 벌인다.

그런데 별안간 그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가 횡사(橫死)를 하자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자기가 뜻한바 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를 북문 밖에 묻고 그 위에 황금으로 장식한 전각을 짓고 남화라는 승려는 비문에 이렇게 썼다.

“대명 일본에는
온 세상 떨친 호걸이 났도다.
태평한 길을 열었으니
그의 덕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아라.“

이 글을 본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격분(激憤)하여 붓으로 죽죽 문질러 버리고 조선국 침탈(侵奪)에 대한 비난의 글을 주저하지 않고 막힘없이 써 내려간 장문의 글은 수은 강항의 대범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逸話)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 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다는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았구나!!
탕알 만한 네 땅 지금 타인 손에 들어 갔느니라
(탕알 만한 하찮은 놈) 무슨 일로 청구(靑丘=조선) 땅에 당돌하게 대들었나!!!“

적의 땅 일본에서 그것도 포로의 몸으로 일본의 최고의 통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를 욕되게 꾸짖다니, 보통의 담력(膽力) 가지고 또는 범인(凡人)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사건이었다.


강항(姜沆)은 비록 왜국 한 곳에 갇힌 몸이지만 당당하게 기개(氣槪)를 펼쳐 당시 식자(識者)층인 일본인들의 간담(肝膽)까지 서늘하게 했다.

그의 저서「간양록(看羊錄)」에서 그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선비정신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익히 삼국시대의 백제인으로 추정되는 왕인이「천자문」과「논어」로 일본유학의 씨를 뿌리고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우게 했다면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일본 강호 막부 문화에 주자학을 뿌리내려준 인물로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오즈시에서는 ‘홍유 강항선생 현창비’를 세워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족적을 남기고 일본에서 유명한 일본인 당시 유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본 유교 책자에는 조선에서 정치의 근본이 된 주자학을 비롯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모든 유학 서적들은 강항(姜沆)선생에 의해 선생이 발문(跋文)하여 선생의 머릿속의 학문만을 베껴 쓰고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일본의 서책(書冊)들로 만들어 졌기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의 텍스트임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충분히 영악한 근대와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이후 앞 다퉈 중국 현지의 원서(原書)와 검증해본 결과 강항이 발문한 서책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서임을 입증하고 나서야 그의 위대함을 재삼(再三) 인정해 오-즈시에 성역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유재란의 폐해(弊害)로 빚어진 왜놈들의 포로생활 중의 강항의 가르침이 곧 지금의 일본의 근대사의 지표(指標)가 되었고 일본의 진정한 근대사 유교가 되었다.

또, 어제와 오늘의 일본에 명확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놀랍게도 이를 발전시켜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화(化)사상으로 변화를 꾀하여 이와 같은 학문의 원동력으로 일본경제가 바로서고 사회질서가 잡혀 지금의 일본이 반듯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강항은 당시 일본 고승들에게 경전(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 정주학을 가르쳐주는 등 조선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식자층의 일본인들이 지금도 ‘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그를 공경(恭敬)하고 있다.

강항(姜沆)은 이토록 포로생활 속에서도 일본 유일의 지식층인 순수 좌 후지와라 세이카와 성주 아카마쯔 히로미치(赤松廣通)에게 유교를 전파해 근대일본이 제대로 정립되도록 했다.


그리하여 얻어진 지리와 군사시설 등 적국의 실정(적중봉소)을 죽음을 무릅쓰고 권율장군의 노비인 김석복 편에 보낸 것이 그 하나요, 다음은 교토에 와서 중국의 사신(使臣) 왕건공(王建功) 편에 보낸 것이 그 둘이며, 신정남 편에 보내진 것이 셋으로 고국에 은밀하게 왜장들의 인물됨과 그 수를 헤아리게 하는 ‘임진정유입구제왜장수(壬辰丁酉入寇諸倭將數)’를 기록하여 임금에게 다다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적중봉소를 받은 선조는 당시 크게 감탄하고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는 각 진의 장군들에게 돌려보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포로생활 중의 강항(姜沆)은 수제자(首弟子)인 후지와라 세이카의 충언(忠言)으로 조선 땅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一念)에 왜놈들에게 글을 써주기도 하고 그들이 원하는 시를 지어주면서 고국에 돌아갈 금전(金錢)을 모으기 위해 틈틈이 은화(銀貨)를 모아 갔다.

그는 매일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강항과 그의 식솔들이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는 도중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준비해준 배를 갈아타고 선조 33년(1600) 3년간 포로생활에서 34세에 가족들과 함께 38명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조선인 포로 중에는 이미 각 지역에 명문귀족 집안의 여성에게는 열녀각 정문(旌門)을 조정으로부터 받게 되고 남성에게는 충신(忠臣)으로 정절비를 받은 자가 왜국에서 풀려난 포로에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의 각 문중에서는 대혼란이 발생되고 말았다.


이처럼 강항은 이들을 적지(敵地)에서 데리고 올 때 계획은 큰 배를 구하고 50여일을 바다에서 하루하루를 생활해야하는 음식과 식량을 조달해 어렵고도 힘들게 구해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과 문중의 묘한 관계로 ‘그곳에서 생사만 확인해주면 됐지! 왜 조선국으로 데리고 들어왔느냐’며 힐책을 받기도 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문중의 귀함만을 강조하는 어처구니없는 당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는듯하다.

강항이 귀국 후 선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종용했으나 백형 저어당 해의 신묘사화의 폐해를 직접 눈으로 봐온지라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더욱이나 선조는 당파에 치우쳐 강항을 영광 땅에 후학양성이라는 명분아래 가두어 두고 만다. 그러던 1603년 아들 시만이 태어난다.

강항은 부단히 노력해 운제마을로 학당을 옮겨 60여명의 명문자제와 문중의 학자를 길러낸다. 강항의 사촌들은 고려말시대의 高麗三隱 [고려삼은]인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의 신유학을 그대로 이어받기위해 20여명의 사촌들도 함께 아호를 은(隱)자를 고집해 사용했다.

정유재란의 폐해로 왜놈들에게 자식을 모두 잃은 강항(姜沆)은 이처럼 고향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을 무렵 이미 46세로(1613~1616) 셋째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문중과 집안어른들이 모두 나서 성사된 후실(後室)로 들어온 20대의 이조이 부인은 오로지 강항(姜沆)만 바라보고 살았으며 금슬이 좋아 사내아이 2명을 슬하(膝下)에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昨今)의 역사적 문헌과 족보에는 셋째부인인 이조이 부인에 대한 설명과 동기 또는 배경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엄연히 이조이 부인의 소생(所生)으로 두 명의 남자아이가 태어나 현재까지 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도 애생이 엄마라는 함평 이씨 부인은 역사 속에 정실(正室)부인으로 인정받아 존재하는데도 이조이 부인에 대한 자료는 네 줄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조이 : 형조좌랑 강항의 첩(정부인)이다. 남편이 죽자 음식을 딱 끊어버렸다. 상복을 입던 날 두 살배기 젖먹이를 내버려둔 채, 상복에 달린 배띠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 때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창시자인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살펴봐야 한다. 공자의 출생은 공자의 아버지가 60세가 넘어서 난 첩의 소생이다. 공자의 처음 직업도 변변치 않은 장사나 장례를 치러주며 밥벌이를 하고 살았고 동네 무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자는 이후 말년의 학문의 깊이와 제자들로 인해 성인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지금 중국의 곡부 땅에는 공자의 3대 공부, 공묘, 공림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공자의 77대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세계 공씨 성을 가진 자만이 묻힐 수 있는 성지(聖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구국(救國)의 심정으로 애국애족(愛國愛族)하고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강항(姜沆)을 우리는 이제는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잘못된 역사를 현시대에 맞게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본처인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이 태어나 소생(甦生)되어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소설(픽션)처럼 말한다면 그것이 더 선비정신으로 지성의 반열에 오른 수은 강항(姜沆)선생과 정부인(貞夫人) 김씨 부인으로서는 더 부끄러운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더 고민해 보고 각성(覺醒)해 보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필자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께서 가장 힘들고 험난한 전란(戰亂) 속에서도 꿋꿋한 선비정신의 충절과 효심을 보여준 선비로서 그 험난한 시대를 모범적이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지향(志向)하셨기에 감히 용기를 냈다.

역사는 사실적으로 기록되어야 하기에 ‘두 분의 이씨 부인이야기’가 소설화(小說化)작업으로나마 삼가 이조이 부인을 흠모하면서 기록했음을 일가친척(一家親戚)을 비롯해 독자들께 선보인다.

묻어둘 때 묻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깝게 가고자하는 노력은 후대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임을 밝히면서 이점을 양해해 주기를 거듭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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