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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편소설>睡隱 姜沆先生과 李氏夫人이야기

세간에 덜 알려진 민감한 사안이라 소설이 더 조심스러워
등록날짜 [ 2016년01월03일 16시04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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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은(睡隱) 강항선생(姜沆先生)과 이씨부인(李氏夫人) 이야기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명종22년 1567년 정묘(1세) : 5월 17일, 영광 불갑 유봉리에서 몽오(夢梧) 강극검공(姜克儉公)과 모친 영동 김씨(화순)의 5남 1녀 중 중 넷째로 태어났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의 어린 시절을 토대로 구성하였고 논픽션과 픽션을 융합하여 선생의 발자취 중에 가장 인간적이고 자기의 나라와 겨레를 사랑했던 마음을 선남선녀로 쉽게 나타내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했음을 미리 알려드린다.>


 

지금으로부터 450여 년 전 전남 영광에 천재 소년이 살고 있었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이미 5세에 ‘각도만리 심교각(脚到萬里 心敎脚)’ 이라는 칠언 명시(七言 名詩)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수은 강항은 저어당 해(齟齬堂 瀣, [맏형]<저어당 : 이이 율곡선생 문인>)로부터 3세부터 사서오경(四書五經)에 모두 통달했다. 강항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함부로 범접(犯接)할 수 없는 경지에 이미 도달하였고, 학문의 깊이가 놀라울 정도로 높아 호남지역을 떠나 신동(神童)으로 입소문을 타고 장안까지 번지고 있었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이 7세 때의 일이다.
제법 학식이 높은 한 책장수가 영광 불갑면 안맹마을 근처를 지나가던 중이었다. 이때 책장수에게 반갑게 어린 강항이 다가와 서책(書冊) 목록을 살펴보고서는 다짜고짜 맹자(孟子) 한 질을 달라고 하였다.

책장수는 이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어린아이가 느닷없이 다가와 맹자 한 질을 달라고 하자 그는 한동안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장난삼아 넌지시 맹자 한질을 건네주며 골려줄 생각에 골똘했다.

이런 책장수의 행동거지(行動擧止)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린 소년은 맹자 한 질을 첫 장부터 의젓하게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책장수는 그가 너무도 젊잖게 자리를 잡고 마치 책에 빠져드는 듯 맹자(孟子)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뿐 아니라 하도 어이가 없어 꾀를 내 마침내 내기를 걸었다.
 
“네가 ‘맹자’를 읽고 있는 모습이 제법이구나. 네가 맹자(孟子)를 처음부터 끝까지 暗誦을 한다면 이 책(맹자 한 질)을 모두 주겠다.”고 눈을 내리 깔며 비웃음을 감추지 않은 채 능청스럽게 말하였다.

그러나 어린 강항은 책장수의 ‘맹자(孟子) 한 질을 걸고 내기하자’는 말에도 아랑곳하지도 않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계속해 책만 들여다보며 맹자(孟子) 책을 끝부분까지 진지하게 읽고 있을 뿐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책장수는 미덥지 않음에 연신 하품을 하며 내기에 대답 없이 맹자(孟子) 책만 보고 있는 그런 소년을 머쓱하게 옆에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언제 맹자(孟子)를 봤냐는 듯 천진난만하고 밝은 표정으로 어린 강항은 “이젠 됐어요!! 아저씨, 책을 읽게 해주셔서 참으로 고마워요!!” 말하고는 툭툭 바지를 털고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나 가려고 하자 책장수는 속으로 ‘네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한편으로는 준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하고 내기를 했잖느냐!!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이냐?”며 힐책(詰責)을 하였다. 이내 어린 소년은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책장수에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방금 책을 읽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말씀까지 드렸는데...” 거듭 책장수는 “옳거니!!” 하며 내심 쾌재(快哉)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내가 너에게 맹자(孟子) 한 질을 주면서 책을 읽어 보는 것을 허락하되 다 읽고 나서 맹자에 대해 암송(暗誦) 여부에 대한 내기를 나하고 했잖느냐?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없는 것이냐?” 라고 말하였다.


어린 강항은 그때서야 씩 웃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표정으로 방금까지 들여다본 맹자(孟子)를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없이 줄줄 일어 내려 갔다. 책장수는 첫 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다음 장을 펼쳐보면서 강항이 암송하는 대로 따라 연신 책장을 넘기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언제 끝난 지도 모르게 맹자(孟子) 끝부분을 읽어 내려가는 그 소년 강항을 보며 책장수는 깜짝 놀라 기겁을 하며 한동안 멍하니 소년 강항에게 홀린 듯 얼굴만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소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책장수에게 거듭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아저씨!! 고마워요. 아저씨가 우리 동네에 들리시게 될 날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며 손꼽아 기다렸거든요. 매번 궁금했던  맹자(孟子)를 꼭 읽고 싶었는데 비로소 오늘에야 맹자 책 한 질을 다 보게 될 줄 몰랐거든요. 다행히 오늘 아저씨가 오셔서 맹자(孟子)를 다 보여줘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이미 맹자(孟子)책 내용은 이미 제 머리 속에 다 들어있으니 그 책은 이젠 저에게는 필요 없어요. 저는 괜찮으니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다른 마을로 가셔서 많이 파세요.”라며 소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빨리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한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책장수는 어린 소년과 내기를 했지만 어른으로써의 체통(體統)과 염치(廉恥)를 생각해 볼수록 난처해 지고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결국 맹자(孟子) 한 질 내기를 한 그 불갑면 한 정자에 맹자(孟子) 한 질을 걸어두고 갔다. 책장수는 혼잣말로 “장안의 소문에 의하면 호남지역에 신동(神童)이 있다더니 이곳에서 내가 그 신동(神童)을 드디어 만나게 된 게야!!” 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며 이 마을을 지나갔다.

그곳에 동네 사람들이 맹자(孟子) 한 질을 걸어 놓은 정자(亭子)를 일컬어 맹자정(孟子亭)이라 이름 지으니 지금도 여러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는 맹자정(孟子亭)이 강항선생(姜沆先生)의 고향 마을인 영광군 불갑면 소재지에 남아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하듯 어린 소년 강항은 이미 학문의 깊이가 이렇게 높은 경지까지 올라와 있었다.

소년 강항과 공음 강목촌

수은 강항(睡隱 姜沆)이 7~8세 무렵 염산 논잠포구에서 배편으로 아주 가까운 구암마을에 학문의 정신적(精神的) 스승인 죽곡 이장영 선생을 자주 찾았고 9세 무렵까지 구암 마을의 이웃 마을인 칠암마을을 이웃하는 동네로 자주 놀러 가곤 했다.

이로 인해 강항(姜沆)은 이곳 구암 마을에 살고 있던 함평 이씨 부인인 죽곡 선생의 막내딸과 자연스럽게 여러 차례 소꿉동무로 자주 어울려 놀았다.

<특히 막내인 강영(시시당)은 손위 형인 강항과 일가족이 모두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갈 때 신변(身邊)을 정리해 이곳 구암마을로 정착했으며 이후 말년까지 왜적으로부터 전혀 노출이 되지 않는 천혜적인 요소를 갖춘 이곳 구암마을에서 일평생(一平生)을 마감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강항에게 엄하게 글을 배우고 나중에는 진사(進士)까지 오르게 된다.>


강항(姜沆)은 이처럼 구암마을에서 또래 아이들끼리 모여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나면 자연히 한가로운 시간을 가까운 시냇가에서 보냈고 시냇물이 흐르는 넓은 평야지대은 마을의 들판과 뒷동산을 찾아 항상 함께 어울려 놀았다.
 
이처럼 개울가, 바닷가, 마을 동산과 들판은 강항에게는 자연스러운 놀이 공간으로 충분했고 주변에 그럴싸한 놀잇감이 없어도 구암마을 앞 개울가에는 맑은 물이 쉼 없이 흐르고 있었기에 강항의 이곳에서의 생활은 더욱 막힘이 없었다.

마을 개울가에 깔린 다슬기도 줍고 싫증이 나면 잡다한 송사리, 피라미 물고기들을 잡기도 하고 때론 멱과 머리를 감으며 물장구 치고 뒷동산에서 진달래도 따며 시간가는 줄 모르게 놀기도 했다. 산과 들에는 풍요로움으로 항상 가득했다. 머루와 다래를 따먹기도 하고 진달래와 들꽃을 쳐다보면서도 저도 모르게 나오는 웃음에 한없이 마냥 신나게 유년기(幼年期)를 보내고 놀았다.

강항(姜沆)이 8세 때인 1574년 어느 날 이미 주변 마을에 신동(神童)으로 파다하게 알려진 이후 칠암마을에 들렀을 때 일이다.

동네 유림(儒林)들 사이에서 강항이 신동(神童)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따로 불러 동네 어른들과 유학자들이 그를 상대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마을 유림(儒林)들은 송나라 주자(朱子)가 어렵게 중국 역사서를 집필(執筆)했다고 소문난 중국고서(中國古書) ‘통감강목(通鑑綱目)’을 건네주며 한번 읽어보라고 권했다. 강항(姜沆)은 중국고서(中國古書)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들자마자 막힘이 없이 줄줄 읽어가면서도 ‘통감강목(通鑑綱目)’을 다 읽어 내려갈 때까지 손에서 결코 책을 놓지 않았다. 그는 밤을 하얗게 새워 ‘강목(綱目)’을 읽고 또 읽어서 그 다음날 동네어른들과 유림(儒林)들 앞에서 줄줄 외우니 칠암마을 온 동네가 발칵 뒤집어질 정도로 찬사(讚辭)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드디어 유학자 중 한 원로가 나서서 “오늘 우리 칠암마을에서 천재 소년 신동(神童)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이 마을의 경사입니다!! 그리하여 이 일곱 봉우리의 칠암마을을 앞으로는 ‘강목(綱目)촌’이라 명명(命名)했으면 하오!!” 라고 말하자 모두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찬성을 하며 이 칠암마을을 ‘강목(綱目)촌’이라 불리게 되었다.

또, 그는 9세에 인간의 도리를 말하면서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이는 어릴 적 마음이 성인(成人)이 되어서도 변함없이 갖춰야 하며 이어져야 한다는 세간(世間)의 발표에 그 당시 선비들은 신동(神童)의 말에 겸허(謙虛)함을 갖추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강항(姜沆)과 이씨 소녀와의 어린 시절의 만남은 채 2년도 되지 않은 짧은 만남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애틋했던 소꿉놀이 친구인 어린 소년(강항)과 소녀(이씨 부인)의 만남은 훗날 결코 우연만은 아니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인연(因緣)이던가?!

또, 강항은 9세에 유성약천성부(幼成若天性賦)를 지었는데 어릴 때 습성을 익혀두면 성인이 되어 천성과 같이 된다는 내용의 시문(時文)을 지어 주변을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10세에는 또 멀리 충청도 지역을 찾아나서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가 예(禮)와 경학(經學)을 활용하고 터득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다양하게 학문을 일찍 익힌 강항은 엄격한 가풍(家風)과 선비로서의 갈 길이 정해져 있었던 터라 고향인 영광 불갑 유봉마을로 다시 돌아왔다.

그는 영광 옥당골 너머 무장현 구암마을과 충청도 지역에서 불갑 유봉마을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고향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14세 어린 나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된다. 강항(姜沆)은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어머니로부터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고 인생의 허무함을 처음 당하는 단계에 효심(孝心)은 남달랐다.

3년간 시묘(侍墓)살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토록 그는 죽음을 넘어 효 사상에 입각하여 효심(孝心)과 애틋한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 일평생을 살았던 것이다.

승승장구하는 강항

강항은 이윽고 16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이후 강항(姜沆)은 1588년 진사가 되었고, 1593년 27세(1593)에 문과에 급제, 이듬해 봄에 교서관(校書館) 정자(正子)가 되었다.

29세(1595)에 박사에 올랐고, 30세(1596) 봄에 성균관 전적,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 형조좌랑이 되었다.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22세에 진사가 되어 마침내 진주 김씨(晋州 金氏)와 결혼을 하였고, 안정된 가정에서 이미 과거에 합격한 맏형인 저어당 해(齟齬堂 瀣)와 둘째 형인 준(濬)에 이어 과거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

27세(1593년)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시상황 속에서 이 당시 선조는 조정을 전주에는 광해군과 두 군데에 분조로 나누어 관리(管理)를 하도록 명하였다. 이러한 체제 속에서 경기 이남은 광해군 체제에 속해 있었기에 그는 별시문과(別試文科)와 병과(兵科)를 치루기 위해 전주로 올라가 하룻밤을 객주(客主)집에 묵게 된다.

그런데 이게 무슨 기구한 운명의 만남이던가? 강항은 뜻하지 않게 소꿉동무인 이씨 소녀를 운명처럼 이곳 객주(客主)집에서 다시 마주치게 된 것이다. 이씨 소녀는 과년(瓜年)해 구암마을인 고향을 떠나와 이곳에 이미 수년 전에 올라와 먼 친척인 객주(客主)를 도와주며 장사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강항의 결심은 단호했다. 어릴적 그토록 다정했던 이씨 소녀를 짐짓 모르는 척 냉정하게 대하고 오로지 과거시험에만 전념하여 별시문과(別試文科)와 병과(兵科)에 합격하고서는 이씨 소녀의 눈을 피해 곧장 고향인 영광으로 내려왔다. 강항이 그토록 차갑고 냉정하게 대했으나 이씨 소녀는 그런 강항이 언제 어떻게 내려간 영문도 모른 채 며칠 동안을 뜬 눈으로 밤을 지내고 나서 당시 이씨 소녀의 생각은 남달랐다.

어릴 적 함께 거침없이 온 동네를 뛰어놀았던 오매불망(寤寐不忘) 꿈속에서 그리던 정인(情人)이었으며 이미 그 시절 천재소년(天才少年) 강항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이씨 소녀는 어릴 적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지나가 밤낮으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이씨 소녀는 그동안 일편단심(一片丹心)의 마음으로 강항에 대한 그리움에 휩싸인 채 살아가다가 이처럼 낯선 타관 땅에서 다시 재회(再會)하고 보니 ‘이게 내 운명(運命)이구나’라고 다짐을 하며 여러 생각에 골똘했다.


이씨 소녀는 오로지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回想)하면서 강항만을 생각하며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그의 고향을 물어물어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을 찾아 내려갔던 것이다.

이미 진주 김씨 부인과 결혼한 강항(姜沆)은 단호하고도 냉정하게 이씨 소녀를 외면(外面)했다. 이씨 소녀는 유봉마을 어귀에서 일주일 넘게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그에게만 품은 애틋한 사랑을 몸과 마음으로 표출(表出)해 갔다.

급기야 문중어른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한 처자(處子)를 우리 마을에서 굶주림에 횡사(橫死)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마침내 집안 어른들이 문중회의(門中會議)를 열어 ‘사대부(士大夫) 가문에서는 처첩(妻妾)을 두는 것은 큰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해 이씨 부인의 사랑을 허락(許諾)받아서 두 번째로 이씨 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을 보지 못한 강항은 이씨 부인을 1593년에 맞이하고서야 처음으로 딸 애생(愛生)이가 태어나 또 다른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맛보게 된다. 그러다가 1596년에 아들 용이가 태어난다.

강항은 1597년 정유년 초, 강항(姜沆)은 공조 · 형조좌랑으로 승진을 거듭해 그해 봄에 휴가를 얻어 고향 유봉마을에 와 있었다.

의병장 강항

그러던 그해 8월에 정유재란이 터지자 분호조(分戶曹) 참판이 되어 전라도 군량미 수송책임을 지게 되었던 것이다.  갈수록 전세(戰勢)가 기울어져 7월에 한산 섬의 관문이 무너지고 8월에 호남의 중심인 남원이 힘없이 함락 당하자 수성을 했던 관리들은 도망가기에 급급해지자 강항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인 영광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분연히 일어나 고향 영광향교에서 수성을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싸웠다.
계속해 전세가 불리해지고 영광 땅은 온통 불바다였다. 영광을 수성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져 피난길에 오르자 의병장인 강항은 식솔들과 의논을 마친 후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기 위해 배편으로 남행(南行)을 감행했다.

그러나 뱃사공인 종놈이 자기 처자식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한밤중에 노를 엉뚱하게 저어 서포인 논잠포에 당도한다. 이러한 종놈의 변심(變心)으로 논잠포에서 왜적의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강항이 포로로 붙잡혀 뿔뿔이 흩어지게 된 가족들은 둘째 형 회은공 준과 셋째 형 퇴은공 환의 가족과 그리고 김씨 부인과 애생, 용이 같은 배에 있었고 부친은 다른 배로 흩어져 이씨 부인의 행방마저 묘연했다.

강항은 이씨 부인과의 사이에 딸 애생 뿐만 아니라 30세에 강항의 태몽에 바다에서 커다란 용이 승천해 올라가는 모습을 가슴에 담고 지은 이름으로 이씨 부인 슬하에서 귀한 아들이라 용(龍)이라 지었다. 애생이가 태어나고 그 당시에는 상당히 늦은 늦둥이로 얻은 아들이라 얼마나 귀하고 소중했으랴!!


아들 용(龍)과 딸 애생에 대해 얼마나 사랑이 깊었는지 당시 31세에 영광 논잠포 앞바다에서 아들 용(龍)과 딸 애생이를 잃고 통한(痛恨) 속에서 쓴 시(詩)에서 처절하고도 비통한 수은 강항(睡隱 姜沆)의 절제(節制)된 아픔과 슬픔이 날카로운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듯 아픔이 배어나고 있다.

“아이야!! 아비를 잊지 말라
아혜막망부(兒兮莫望父)
무고한 너를 죽게 만든 것이 오직 나의 죄라!!
치여무고유아죄(致汝無辜惟我罪)
평생(백년)토록 부끄럽고 원통해서 통한의 눈물만 마구 흐른다.”
백년참통누란우(百年慙痛淚闌于)


강항과 이씨 부인과는 참으로 모진 인연이 정유재란(丁酉再亂) 당시에도 계속 이어져 존재한다. 정유재란이 발발(勃發)하고 피란길에서 강항(姜沆)과 이씨 부인은 이미 논잠포 앞바다에서 예고도 없이 생이별(生離別)을 했기에 서로가 지금까지 생사(生死)를 까맣게 모르고 있으며 여자인 이씨 부인은 더더욱 왜놈들의 전쟁 난리 통에 강항의 식솔(食率)로부터 홀로 떨어져 건너편 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황망(慌忙)하게도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왜놈들이 일으킨 전란 통에 급기야 포로로 바다 한 부분인 이름 모를 왜선(倭船)에 끌려와 일주일여가 지나가고 있었다.

순천 앞바다 왜선(倭船)에서 외로이 식솔(食率)들과 신세 한탄(恨歎)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이씨 부인의 외침을 저 건너편 배편에서 처음 듣게 된 것이다. 이날 이씨 부인의 흐느낌과 외침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애간장을 타게 하는 절규의 외침이었다. 냉기로 가득한 남해 바다를 온통 한으로 적시며 그 통곡 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며 애처롭고 처절하고도 가냘프게 바람에 묻어 들려오고 있었다.

“영광사람 어디에 없소?!”

이 절규(絶叫) 속에 품은 속마음은 얼마나 님을 그리는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컸는가를 가늠해 볼 수 있고 영광사람을 찾아 그와 아들과 딸인 용과 애생의 생사 소식을 듣고 싶어 그랬으랴 싶다.

“여보시오!! 영광사람 어디 없소!!!”

건너편 배에서 들려오는 짧은 외마디 소리에 건너편 배에서 그와 함께 있던 둘째 형수가 깜짝 놀라며 강항(姜沆)에게 다급하게 다가와 귓속말로 전한 것이다.

“서방님! 저기 저 사람!! 애생이 엄마가 분명하오!!!” 연신 건너편 배에서 쓰러질 듯 들려오면서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이씨 부인의 애간장을 끓이는 소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단말마적인 외침으로 넓고도 넓은 공허한 바다에서 메아리만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포로이면서도 무지막지한 왜선에서 그렇게 야무지게 대항했던 이씨 부인은 애석하게도 다음날까지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왜놈들에게 당당하게 아우성으로 맞서다가 결국은 왜놈들에게 뭇매를 견디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고 만다.

강항(姜沆)과 이씨 부인(李氏 夫人)의 만남은 인생에서 우연(偶然)과 필연(必然)을 우리들로 하여금 교훈처럼 받아들여지고 그 당시 이씨부인(李氏夫人)의 절개와 지조를 현재까지도 높이 칭송하며 앞으로도 실로 귀감(龜鑑) 되고 지아비를 섬기는 여인의 행동으로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또한 강항(姜沆)은 이를 칠언시(七言詩)로 부부의 서러운 이별과 처절한 슬픔을 피눈물로 섞어 노래한다.  

 *상사한(相思恨)
   창해망망월욕담(滄海茫茫月欲沈)
   푸른 바다 아득히 멀리서 달이 지려는데,
   누화량노습리금(淚和涼露濕罹襟)
   이내 눈물이 차디찬 이슬로 변하여 내 옷깃 적시네.
   영영일수상사한(盈盈一水相思恨)
   그렁그렁한 눈물이 한줄기 흐르는 건 님을 그리워하는 한(恨)이니,
   우녀응지차야심(牛女應知此夜心)
   우리 둘이 오늘 밤 이 아픈 마음을 그대만은 알리라.

이러한 아픔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생 포로로 끌려간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애국애족((愛國愛族)하는 사상과 선비정신은 그 어떠한 역경(逆境) 속에서도 이후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다.

강항이 31세에 모진 포로생활을 하면서 일본 교토 후미성에서 여섯 살이나 더 많은 왜승(倭僧) 순수좌를 제자(弟子)로 받아들인다. 순수좌와 나눈 이야기 중에 왜군의 장수인 적송광통이 등장하게 된다. ‘철천지원수와 같은 나라이며 개, 돼지보다도 못한 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던 강항에게 순수좌는 여느 왜인하고는 달랐다.

순수좌 역시 도요토미히데요시의 폭정에 이미 질려 있었고 중국이나 조선이 왜국을 침략해 순수한 왜민족을 보호해줬으면 한다는 대화를 나눈다. 이말에 깜짝놀란 강항은 순수좌와 속마음을 툭 터놓고 대화를 끊임없이 갖게되고 순수좌의 마음을 안 강항은 성재기와 사상와기를 직접 적어 성과 와를 아호로 내려준다.

그리하여 순수좌는 후지와라세이카라(등원성와)는 유학자로 거듭나게 된다. 이처럼 필담(筆談)을 통해 강항휘초를 전수하였으며 사서오경을 발문해 일본유교(日本儒敎)의 비조(鼻祖)가 되었다.


이미 강항은 유교의 발상지인 중국을 넘어 조선의 유교경전과 주자학(朱子學) 사상으로 도학(道學)의 경지에 도달했으며 유학자로서 손색이 없는 최고의 지성의 위치에 올라와 있었다.
 
당시 왜국에서는 전쟁을 싫어하는 1% 식자층 부류의 승려계급인 후지와라 세이카는 왜승(倭僧)으로 신유학 사상에 잔뜩 목말라 있었으며 최고봉에 오른 강항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경제부국을 말하는 현대 일본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역사에서는 가정법이 없지만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강항의 적중 봉소에 의하면 이 당시 왜놈들의 99%가 무지(無知)랭이 민족이 일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을 중심으로 일본의 역사는,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끝나고 에도(江戶) 시대가 시작될 때를 기준으로 중세(中世)와 근세(近世)로 나뉜다. 같은 봉건시대면서 왜 시대를 나누는 것일까? 그것은 생활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

그때까지는 종교불교의 영향이 컸으므로 학문은 승려를 제외하면 일부 학자 또는 특권 계급만이 누릴 수 있었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유학의 전파로 인한 영향으로 종교를 배제한 합리적인 교육이 일반 대중 사이에 확산되어 사숙(私塾)과 데라고야(寺小屋)와 같은 서당에서 요원의 불길과 같이 전국적으로 뻗어 나갔다.

그 곳에서 사용한 교본의 대부분은 소학부터 시작해 강항휘초의 '사서오경(四書五經)'이었다.

'공자, 맹자 曰….'

 크게 소리를 내어 읽으며 무릇 교육과는 인연이 없던 일반 서민들이 처음으로 글자를 알고 학문에 접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은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는다. 이 척박한 사무라이시대에서 기초가 다져진 신유학은 곧바로 이어지는 명치유신을 몰고 오는 근세 문화의 개막에는 많은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활동이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강항(姜沆)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피노되어 간난신고를 거치며 너무나도 비참한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그가 강항휘초를 통해 발문한 사서오경의 일역(日譯)에 힘써 일본인의 신교육과 문화 부흥에 헌신한 공적을 하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일본에 수은 강항선생연구회 무라까미 쓰네오 회장은 입버릇처럼 말한다.

다시 그 시대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간다.
강항은 충효사상과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정신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바르게 정립하면서 하루도 심의(深衣)를 벗지 않고 조선선비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생활했으며 적국에서도 항상 겸손하면서 당당하게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한 번은 강항이 오즈에서 탈출을 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의 무자비한 침략을 엄히 꾸짖는 문장(文章)으로 석가모니가 천벌을 내려 마침내는 혹독한 대가를 치룰거라는 엄청난 벽서(壁書)사건을 벌인다.

그런데 별안간 그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가 횡사(橫死)를 하자 강항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마침내 자기가 뜻한바 대로 이루어졌다고 기뻐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그를 북문 밖에 묻고 그 위에 황금으로 장식한 전각을 짓고 남화라는 승려는 비문에 이렇게 썼다.

“대명 일본에는
온 세상 떨친 호걸이 났도다.
태평한 길을 열었으니
그의 덕 바다같이 넓고 산같이 높아라.“

이 글을 본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격분(激憤)하여 붓으로 죽죽 문질러 버리고 조선국 침탈(侵奪)에 대한 비난의 글을 주저하지 않고 막힘없이 써 내려간 장문의 글은 수은 강항의 대범한 성품을 알려주는 일화(逸話)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한 평생 경영한 게 한 줌 흙 된다는 말인가
열 층의 황금 전당 부질없이 높았구나!!
탕알 만한 네 땅 지금 타인 손에 들어 갔느니라
(탕알 만한 하찮은 놈) 무슨 일로 청구(靑丘=조선) 땅에 당돌하게 대들었나!!!“

적의 땅 일본에서 그것도 포로의 몸으로 일본의 최고의 통치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豐臣秀吉)>를 욕되게 꾸짖다니, 보통의 담력(膽力) 가지고 또는 범인(凡人)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사건이었다.


강항(姜沆)은 비록 왜국 한 곳에 갇힌 몸이지만 당당하게 기개(氣槪)를 펼쳐 당시 식자(識者)층인 일본인들의 간담(肝膽)까지 서늘하게 했다.

그의 저서「간양록(看羊錄)」에서 그의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선비정신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익히 삼국시대의 백제인으로 추정되는 왕인이「천자문」과「논어」로 일본유학의 씨를 뿌리고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우게 했다면 수은 강항(睡隱 姜沆)은 일본 강호 막부 문화에 주자학을 뿌리내려준 인물로 일본 유교의 비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오즈시에서는 ‘홍유 강항선생 현창비’를 세워 매년 추모하고 있으며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도 그를 중요한 인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일본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일본 성리학의 원조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족적을 남기고 일본에서 유명한 일본인 당시 유학자들을 수없이 많이 배출시키기도 하였다.

이렇듯 모든 일본 유교 책자에는 조선에서 정치의 근본이 된 주자학을 비롯해 사서오경(四書五經)과 모든 유학 서적들은 강항(姜沆)선생에 의해 선생이 발문(跋文)하여 선생의 머릿속의 학문만을 베껴 쓰고 그가 갖고 있는 지식이 일본의 서책(書冊)들로 만들어 졌기에 오로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하나의 텍스트임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도 충분히 영악한 근대와 현대의 일본학자들은 이후 앞 다퉈 중국 현지의 원서(原書)와 검증해본 결과 강항이 발문한 서책들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문서임을 입증하고 나서야 그의 위대함을 재삼(再三) 인정해 오-즈시에 성역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유재란의 폐해(弊害)로 빚어진 왜놈들의 포로생활 중의 강항의 가르침이 곧 지금의 일본의 근대사의 지표(指標)가 되었고 일본의 진정한 근대사 유교가 되었다.

또, 어제와 오늘의 일본에 명확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되었으며, 이후 일본은 놀랍게도 이를 발전시켜 명치유신(明治維新)과 화(化)사상으로 변화를 꾀하여 이와 같은 학문의 원동력으로 일본경제가 바로서고 사회질서가 잡혀 지금의 일본이 반듯하게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이뿐이랴!!
강항은 당시 일본 고승들에게 경전(經典)을 써주기도 하고 성리학(性理學) 정주학을 가르쳐주는 등 조선유교의 진수를 일본에 전파함으로서 식자층의 일본인들이 지금도 ‘해동강부자(海東姜夫子)’라고 부르며 그를 공경(恭敬)하고 있다.

강항(姜沆)은 이토록 포로생활 속에서도 일본 유일의 지식층인 순수 좌 후지와라 세이카와 성주 아카마쯔 히로미치(赤松廣通)에게 유교를 전파해 근대일본이 제대로 정립되도록 했다.


그리하여 얻어진 지리와 군사시설 등 적국의 실정(적중봉소)을 죽음을 무릅쓰고 권율장군의 노비인 김석복 편에 보낸 것이 그 하나요, 다음은 교토에 와서 중국의 사신(使臣) 왕건공(王建功) 편에 보낸 것이 그 둘이며, 신정남 편에 보내진 것이 셋으로 고국에 은밀하게 왜장들의 인물됨과 그 수를 헤아리게 하는 ‘임진정유입구제왜장수(壬辰丁酉入寇諸倭將數)’를 기록하여 임금에게 다다르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적중봉소를 받은 선조는 당시 크게 감탄하고 나라의 수비를 맡고 있는 각 진의 장군들에게 돌려보도록 조치하였다.


당시 포로생활 중의 강항(姜沆)은 수제자(首弟子)인 후지와라 세이카의 충언(忠言)으로 조선 땅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일념(一念)에 왜놈들에게 글을 써주기도 하고 그들이 원하는 시를 지어주면서 고국에 돌아갈 금전(金錢)을 모으기 위해 틈틈이 은화(銀貨)를 모아 갔다.

그는 매일 와신상담(臥薪嘗膽)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어느 날 강항과 그의 식솔들이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는 도중 후지와라 세이카와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준비해준 배를 갈아타고 선조 33년(1600) 3년간 포로생활에서 34세에 가족들과 함께 38명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포로들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그러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건 당시 조선인 포로 중에는 이미 각 지역에 명문귀족 집안의 여성에게는 열녀각 정문(旌門)을 조정으로부터 받게 되고 남성에게는 충신(忠臣)으로 정절비를 받은 자가 왜국에서 풀려난 포로에 포함되어 있어서 조선의 각 문중에서는 대혼란이 발생되고 말았다.


이처럼 강항은 이들을 적지(敵地)에서 데리고 올 때 계획은 큰 배를 구하고 50여일을 바다에서 하루하루를 생활해야하는 음식과 식량을 조달해 어렵고도 힘들게 구해 데리고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정과 문중의 묘한 관계로 ‘그곳에서 생사만 확인해주면 됐지! 왜 조선국으로 데리고 들어왔느냐’며 힐책을 받기도 했다. 참으로 무책임하고 문중의 귀함만을 강조하는 어처구니없는 당시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는듯하다.

강항이 귀국 후 선조가 여러 차례 벼슬을 종용했으나 백형 저어당 해의 신묘사화의 폐해를 직접 눈으로 봐온지라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더욱이나 선조는 당파에 치우쳐 강항을 영광 땅에 후학양성이라는 명분아래 가두어 두고 만다. 그러던 1603년 아들 시만이 태어난다.

강항은 부단히 노력해 운제마을로 학당을 옮겨 60여명의 명문자제와 문중의 학자를 길러낸다. 강항의 사촌들은 고려말시대의 高麗三隱 [고려삼은]인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의 신유학을 그대로 이어받기위해 20여명의 사촌들도 함께 아호를 은(隱)자를 고집해 사용했다.

정유재란의 폐해로 왜놈들에게 자식을 모두 잃은 강항(姜沆)은 이처럼 고향에서 후진양성을 위해 정진하고 있을 무렵 이미 46세로(1613~1616) 셋째부인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문중과 집안어른들이 모두 나서 성사된 후실(後室)로 들어온 20대의 이조이 부인은 오로지 강항(姜沆)만 바라보고 살았으며 금슬이 좋아 사내아이 2명을 슬하(膝下)에 얻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금(昨今)의 역사적 문헌과 족보에는 셋째부인인 이조이 부인에 대한 설명과 동기 또는 배경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엄연히 이조이 부인의 소생(所生)으로 두 명의 남자아이가 태어나 현재까지 대가 끊기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도 애생이 엄마라는 함평 이씨 부인은 역사 속에 정실(正室)부인으로 인정받아 존재하는데도 이조이 부인에 대한 자료는 네 줄로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조이 : 형조좌랑 강항의 첩(정부인)이다. 남편이 죽자 음식을 딱 끊어버렸다. 상복을 입던 날 두 살배기 젖먹이를 내버려둔 채, 상복에 달린 배띠로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조 때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그녀가 살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했다’

여기서 우리는 유교의 창시자인 성인(聖人) 공자(孔子)를 돌아보고 반면교사로 살펴봐야 한다. 공자의 출생은 공자의 아버지가 60세가 넘어서 난 첩의 소생이다. 공자의 처음 직업도 변변치 않은 장사나 장례를 치러주며 밥벌이를 하고 살았고 동네 무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공자는 이후 말년의 학문의 깊이와 제자들로 인해 성인의 반열(班列)에 올랐다. 지금 중국의 곡부 땅에는 공자의 3대 공부, 공묘, 공림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공자의 77대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세계 공씨 성을 가진 자만이 묻힐 수 있는 성지(聖地)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구국(救國)의 심정으로 애국애족(愛國愛族)하고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강항(姜沆)을 우리는 이제는 부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조선시대에 잘못된 역사를 현시대에 맞게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본처인 김씨 부인으로부터 자식이 태어나 소생(甦生)되어 후손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소설(픽션)처럼 말한다면 그것이 더 선비정신으로 지성의 반열에 오른 수은 강항(姜沆)선생과 정부인(貞夫人) 김씨 부인으로서는 더 부끄러운 사건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더 고민해 보고 각성(覺醒)해 보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 필자는 수은 강항(睡隱 姜沆)선생께서 가장 힘들고 험난한 전란(戰亂) 속에서도 꿋꿋한 선비정신의 충절과 효심을 보여준 선비로서 그 험난한 시대를 모범적이고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삶을 지향(志向)하셨기에 감히 용기를 냈다.

역사는 사실적으로 기록되어야 하기에 ‘두 분의 이씨 부인이야기’가 소설화(小說化)작업으로나마 삼가 이조이 부인을 흠모하면서 기록했음을 일가친척(一家親戚)을 비롯해 독자들께 선보인다. 묻어둘 때 묻더라도 역사적 사실을 조금이라도 진실에 가깝게 가고자하는 노력은 후대에서 마땅히 해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임을 밝히면서 이점을 양해해 주기를 거듭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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