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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임진왜란 전야(2) – 일본 정세를 명나라에 아뢸 것인가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징비록 동아시아 베스트셀러이기는 하지만, 아전인수 격으로 기록한 부분도 살펴야
등록날짜 [ 2016년11월27일 07시20분 ]

1591년 3월에 선조는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쟁이 없다’를 국론으로 정했지만 내심 찜찜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조에게 보낸 국서에서 ‘명나라를 정벌할 것이니 조선이 명나라 정벌에 앞장서 주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명나라가 이를 안다면 어찌할까 노심초사했다.    

4월에 선조는 일본의 정세를 명나라에 보고해야 하는지를 대신들과 의논했다. 영의정 이산해는 명나라에 보고하지 말자고 하였다.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산해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런데 대사헌 윤두수는 이를 숨길 수 없다고 하면서 곧바로 중국 조정에 보고해야 한다고 했다. 병조판서 황정욱도 윤두수의 의견과 같았다. 동인은 보고하지 말자고 하고 서인 은 보고해야 한다고 하니 선조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회의를 파하였다.(선조수정실록 1591년 4월 1일) 
 
5월에 선조는 이 문제를 다시 거론했다. 부제학 김수는 명나라에 알리지 말자고 했고, 병조판서 황정욱은 알려야 한다고 아뢰었다. 김수와 황정욱은 한참동안 설전 한 후에 선조는 다른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선조가 좌승지 유근에게 의견을 묻자, 유근이 아뢰기를, "신이 내의원(內醫院)에서 마침 좌의정 류성룡의 말을 들었는데, 그의 말에 ‘대의로 보면 중국에 아뢰지 않을 수 없다. (중략) 통신사로 갔다 온 사신의 말을 들어보면 「왜적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키지 않을 것이며, 출동시킨다 하더라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일본에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 온 사람에게서 들은 말이라고 말을 만들어 아뢰는 것이 아마도 좋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러자 선조는 유근에게 "내가 묻는 것은 승지의 의견이 어떠한가 하는 점이다.”라고 다그쳤다. 유근이 다시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대의로 보면 주문하지 않을 수 없지만 하나하나 그대로 주문할 경우 난처한 일이 생길 듯싶습니다. 가볍게 주문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이어서 선조가 수찬 박동현에게 의견을 물으니, 그는 이 일은 허술하게 할 수 없으니, 대신으로 하여금 널리 의논해서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개진하였다. 이에 선조는 박동현의 의견을 따랐다.  

다음날 아침 대신을 불러 의논해 결정하게 하니 영의정 이산해 · 좌의정 유성룡 · 우의정 이양원 등이 아뢰기를, "가볍게 주문하자는 유근의 설은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일본에 잡혀갔다 도망해 온 김대기 등에게서 들었다고 말을 만들어 주문하는 것이 가장 온당할 듯합니다." 하였다.  선조는 이에 따랐고 조정의 의논이 비로소 정해졌다. (선조수정실록 1591년 5월1일자)

이러한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은 ‘국조보감’과 ‘기재사초’에도 똑같이 적혀있다. 

그런데 류성룡의 징비록(국보 132호)에는 일본의 정세를 명나라에 보고한 경위가 선조수정실록과 상당히 다르게 적혀 있다. 징비록의 관련부분을 요약해보자.  

이때 왜의 국서에 ‘군대를 이끌고 대명국으로 뛰어 들어가겠다.“라는 말이 있었다. 내가 마땅히 명나라에 보고하여야 한다고 하니, 영의정 이산해는 숨기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조리있게 이야기하여 선조를 설득한 결과 김응남을 파견하여 명나라에 보고하게 하였다.(김시덕 역해, 교감 · 해설  징비록, p 120∽121)  

이를 두고 <연려실기술 제15권 선조조 고사본말(故事本末)>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조정 공론은 알리지 않기로 했는데 자기가 홀로 알리자고 아뢰었다고 적혀 있다. 윤근수가 일찍이 말하기를, “서애(西厓)가 임진년 일을 기록한 것이 공평하지 못하다. 모든 잘된 일은 다 자기에게 돌려 앗아갔다.” 하였다. 《석실어록(石室語錄)》

고록은 외교문서가 아니라 개인의 기록이다. 징비록이 동아시아 베스트셀러이기는 하지만, 아전인수 격으로 기록한 부분도 있다.

구국(救國)의 재상 류성룡의 자의적 서술 한 두 군데가 국보 제132호 징비록의  진실성을 의심케 한다. 징비록은 실록 그리고 관련 사료들을 두루 교차 검토하여 살펴야 한다. 송민순 회고록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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