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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 개최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 주최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주관해
등록날짜 [ 2017년09월22일 06시2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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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항선생묘소에서 큰절올리는 무라까미와 통역 윤홍식선생
문병현 기념사업회 이사와 김나연인기가수의 사회자 모습

수은 강항선생기념사업회(회장 박석무)가 주최하고 영광내산서원보존회(회장 강재원)가 주관한 '2017년 수은 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가 21일 영광내산서원에서 개최되었다.

이 날 '수은 강항선생의 국제학술세미나'의 위상을 감안해 이낙연국무총리가 3단 화환을 보내왔고 김종진문화재청장이 축하 난을 보내 와 행사의 격을 더 높게 자리매김했다.


식전공연으로 향삳간광주연맹회장 송은숙단장의 가야금연주와 간양록, 양철단장의 풀피리와 하모니커 연주, 추연화풍물단장의 흥겨운 가락에 이어 인기가수 김나연의 취입곡에 이어 1부 강재원회장의 개회선언의 시작으로 개회가 되었다.


 

인사말에 나선 박석무회장은 이 시대는 강항과 같은 인물이 절실이 필요하다며 강항선생은 1세기에 1명 나올까 말까 하는 대단히 학식이 높은 분으로 앞으로 영광군에서 가일층 선생의 선양사업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김준성영광군수는 축사에서 이 지역의 인물이신 강항선생의 선양사업이 본궤도에 오를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화답하면서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왕림해 줘 대단히 감사하다고 환영사 말미에서 강조했다.

 

이날 500여명의 참가자로 성황을 이뤘으며 내산서원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많은 인파의 운집으로 영광군청 한 관계자는 '내산서원에 놀라운 역사가 세워졌다'며 국제 학술세미나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2부 수은 강항선생 국제학술세미나 진행 중
진행 탁인석박사와 무라까미, 윤홍식통역자 모습

한편, 모든 행사가 끝나고 무라까미 쓰네오 강항선생일본회장은 윤홍식선생의 안내로 진주강씨광전남종회를 찾아 튼실한 강성의 역사를 되 짗어 보며 방명록을 기록하며 기념촬영 시간도 가졌다.

 

<아래는 발제한 3명중 김덕진교수의 발제문 내용을 소개하다.>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睡隱 姜沆先生의 역할과 위상

1. 머리말
2. 강항, 일본에 끌려가서 후지와라에게 주자학을 전파하다.
1) 정유재란 때 납치
2) 오즈에서 교토로 이송

3. 후지와라, 주자학 개조가 되어 근세 유학을 발흥하다.
1) 후지와라 묻고, 강항 답하다.
2) 주자학 경전 간행

4. 맺음말 : 강항, 동아시의 지성인이 되다.

1. 머리말 동아시아 지성사(知性史)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상 가운데 하나가 주자학(성리학)이다. 주자학은 12세기에 중국 송나라에서 발흥하여 14세기에 조선을 거쳐 16 세기에 일본으로 전파되어 서구 사상이 전래될 때까지 동아시아 사람들 의 삶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 39 - 그 주자학(朱子學)의 연구와 동아시아 전파에 크게 기여한 학자가 바로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이다. 따라서 강항이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고 그 위상은 어떠한 지를 알아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하지만 이 글은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작성된 것은 아니고, 기존의 연 구와 자료를 토대로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강항이 차지한 역할과 위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다만 기존 연구에서 사료를 오독(誤讀)하였거나 당시 상황을 잘못 해석 한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 잡았고, 특히 강항이 머물렀던 곳을 직접 답사 한 소회나 사진을 제시한 점을 의의로 삼고자 한다.

강항은 영광(靈光) 출신으로 1567년(명종 22)에 태어나서 1618년(광 해군 10)에 생을 마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유학자이다. 과거에 급제하 여 관직 생활을 하던 중에 임진왜란이 발생하였고, 전란 중에 왜군에 붙 잡혀 일본으로 끌려가 2년 8개월의 억류 생활을 하다 귀국하였다.

일본 교토에 있을 때에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라는 학 자에게 주자학을 전파해주었는데, 후지와라는 일본에 주자학을 보급하여 주자학이 일본의 새로운 사상으로 자리 잡는 데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 다.그래서 일본 근세 유학의 개조는 후지와라이고, 후지와라는 강항을 스승 으로 삼아 유학을 부흥시킨 사람이라는 것이 일본 학계의 보편적 주장이 다.

1) 일본에서 주자학이 일본을 무사 사회에서 문치(文治) 사회로 바꾸 는 데에, 그래서 일본 사회의 문화 융성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강항의 위 상은 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일본에서 먼저 일찍부터 강항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 다.

2) 여기에는 강항이 일본에 주자학을 전파한 사실을 알 수 있는 자료 가 일본에 소장되어 있고, 그마저 국내 연구자의 접근이 쉽지 않았던 점 도 작용하였다.

그러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국내 학자들도 강항의 일본에의 주 자학 전파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국내 학자들은 원천 자료에의 접근 난제 때문에 연구에 제약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필자는 강항의 전체 생애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글에서 다루어졌기 때문에 가급적 언급을 생략하겠다. 대신 일본에서의 생활상과 일본인에게 주자학을 전파해주었던 점을 중심으로 이 글을 작 성하겠다.
1) 아베 요시오(김석근 옮김), 퇴계와 일본유학, 전통과 현대, 1998, 29쪽. 2) 阿部吉雄, 日本朱子學と朝鮮, 東京大學出版會, 1965. 姜在彦, 「姜沆と江戶儒學-『看羊錄』にみる藤原惺窩との交友」, 季刊三千里 9, 三千里社, 1977. 姜在彦, 「日本朱子學と姜沆」, 季刊三千里 47, 三千里社, 1986. 辛基秀·村山恒夫, 儒者姜沆と日本-儒敎を日本に伝えた朝鮮人, 明石書店, 1991. 村上恒夫, 姜沆-儒教を伝えた虜囚の足跡, 明石書店, 1999.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 글도 새로운 발굴자료를 토대로 한 새로 운 주제연구가 아니라는 점도 미리 밝혀둔다. 미지한 면은 후일을 기약 하겠다.

2. 강항, 일본에 끌려가서 후지와라에게 주자학을 전파하다. 1) 정유재란 때 납치 강항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광 유림 55인의 일원으로 읍 성 수성을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역할은 문서를 관장하는 ‘장문서(掌文書)’였고, 직함은 진사(進士)였다(강항은 1588년에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하였다).
이 사실은 영광임진수성록(靈光壬辰守城錄)이라는 자료에 기록되어 있 다.
3) 강항은 1593년(선조 26)에 광해군이 전주에 주둔하면서 시행한 정시 (庭試)에서 병과로 합격하였다. 서인 측 인사인 우계 성혼의 문인이라고 하여 동인 측의 견제를 받았지만 전적, 공조좌랑, 형조좌랑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97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 조참판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으로 남원 일대에서 군량미 수송의 임무 를 맡았다. 3) 김경옥, 「수은 강항의 생애와 저술활동」, 도서문화 3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을 무찌른 후 호남을 점령하고 서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총 집결한 왜군에 의해 8월 16일에 남원성이 함락 당하고 말았다. 강항은 고향으로 내려와 영광군수 김상준(金尙寯, 1561~1635)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인을 모았다.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 왜군은 북상을 하다가 천안 직산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하였다.

한 주력부대는 경상도로 향하였지만, 또 다른 더 강력한 주력부대는 전라도로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9월 16일(일본 날 자)에 왜군은 정읍에서 전라도 점령 정책을 짰다. 그에 의하면, 영광은 무장⋅진원⋅창평과 함께 ‘中國衆’의 관할 구역이었 다.4) 주고쿠[中國, 지금의 야마구치, 히로시마, 오카야마] 지방 출신의 군소장수들이 영광을 맡았다는 말이다.

그들은 14일에 영광에 들이닥쳐 도살을 자행하였다(간양록). 이들의 기세 앞에 김상준과 강항이 조직한 의병은 흩어지고 말았다. 이에 강항 은 해로로 탈출하여 이순신 진영으로 가고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배를 탔 다. 항해한 지 9일 만인 9월 23일에 왜군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순신은 16일에 명량에서 대첩을 거둔 후 곧 바로 북상을 하여 17일 어의도(지도 부근), 19일 법성포, 20일 위도를 거쳐, 21일에 고군산도까 지 올라갔다. 20일에야 강항은 이순신이 위로 올라갔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게 되었다. 4) 김덕진, 소쇄원 사람들, 다할미디어, 2007, 276쪽. 
따라서 강항 일행은 이순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 다. 강항은 영광 칠산 앞바다에서 붙들렸다. 그곳 바다는 무안⋅함평의 점 령 책임자였던 ‘船手衆’ 관할 구역이었다.

‘선수중’이란 수군 무리들이란 말인데, 당시 수군은 시코쿠[四國] 출신들이 맡았다. 시코쿠에서도 이요[伊豫] 출신 군인들에게 강항은 붙들렸다. 당시 이요 성주는 도도 다카도라[藤堂高虎]라는 수군 장수였다. 간양록에도 도도 는 배로 무안에 갔다고 적혀 있다. 강항은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많은 식솔들이 왜군의 칼에 죽임 당했다. 우수영, 순천 왜교성, 진해 안골포, 부산을 거쳐 일본 으로 압송되었다.

쓰시마, 이키,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즈성[大洲城, 현재 에히메 현 오즈 시]에 유폐되고 말았다. 오즈성은 히지카와[肱川] 강변에 위치하는데, 1888년에 해체되었다가, 2003년에 복원되었다. 강항은 오즈성은 높은 산 꼭대기에 의거하여 있고, 산 아래는 맑고 깊은 긴 강물이 빙 둘러 흐른다고 하였다. 필자가 방문하여 천수각에 올라가 니 강항의 말처럼 빙 둘러 흐르는 강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여성 학예사가 있어 영어와 일본말을 섞어가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강항 선생이 억류되었던 오즈 성 오즈 성에서 바라본 히지카와 강 해가 바뀌어 1598년 4월, 강항은 슛셋키지[出石寺]의 승려 요시히도 [好仁]를 만났다. 슛셋키지는 이요 남쪽 40리에 있다고 간양록에 기록되어 있다. 오즈성 에서 현재 도로로 22.6km 또는 32.7km 떨어져 있다. 이렇게 멀리 떨어 진 슛셋키지를 강항이 직접 방문하였을까? 

간양록에는 그 어떤 단서도 나와 있지 않다. 하지만 본인이 40리 정도 된다는 기록을 남긴 점으로 보아, 직접 다녀왔 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뒤에서 말하겠지만, 이런 사실은 후일 분란의 소지가 되기 때문에 일부러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 는 알고 넘어가야 한다. 요시히도5)는 강항에게 자신은 히젠[肥前, 현재 규슈 사가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왜사(倭使)를 따라 우리나라 서울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말 하였다. 강항을 제법 예의로 대하며, 부채에다 시를 써주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5) 村山恒夫는 절에 있는 역대 주지 位牌를 통해 好仁이 快慶이라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

강항은 그와 친교를 맺고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 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하여 울산 사람 김석복으로 하 여금 본국으로 보내도록 부탁하였다. 강항은 요시히도와의 관계를 이렇 게 적었다.

금산(金山) 출석사의 중 호인(好仁)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자못 문자 를 해독하였습니다. 신을 보고 슬프게 여겨 예우가 남보다 더했으며, 따라서 신에게 그 나라 제판(題判)을 보여 주었는데, 방여⋅직관을 구 별하여 빠짐없이 다 기록한 것이기에 신이 곧 등사하였습니다(有金山出石寺僧好仁者。頗解文字。見臣哀之。禮貌有加。因示臣以其國題判。別方輿職官。該錄無餘。臣旋則謄寫).

금산(金山)은 해발 812m이다. “瀨戶內海國立公園”라고 하여 금산은 국립공원이었다. 출석사는 거의 산 정상 부위에 있다. 필자는 2016년 여름에 오즈성을 답사하고 택시로 출석사를 갔다. 굽이 굽이 산길을 달렸다.

비가 많이 와서 산사태로 길이 막혀 돌아가기도 했 다. 왕복 택시비가 1만엔 가까이 나왔다. 운전사는 매우 자상하고 친절 했다. 필자가 갔을 때 안개가 자욱했다. 조그마한 동종(銅鐘)이 절 건물에 걸려 있는데, 안내판에 고려에서 제작 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동종의 출처에 대해 村山恒夫는 도도가 돌아 올 때에 가지고 온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곳에 역사를 알 만한 사 람도 없고 나 자신 또한 언어가 서툴러 별다른 대화도 못 나누고 돌아와 못내 아쉬었다. - 46 - 출석사 입구 출석사 내부 여름철이라 수국(水菊)이 탐스럽게 만개하여 사진을 찍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5월에 강항은 오즈성 탈출을 시도했다. 임진년에 붙잡혀 와서 교토에 있다가 이요로 도망쳐 온 서울 출신 사람이 제의하여서 였다.

그는 은전(銀錢)도 있고 일본말도 할 줄 알아 조건이 되었다. 밤에 탈출 하여 80리를 걸었다. 두 발에 피가 흘러도 걸었다. 낮에는 대밭 속에 숨 고 밤엔 걸어 板島縣(현재 우와지마[宇和島])까지 갔다.

그곳 성문에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대자보를 써 붙이는 대담함도 보였 다. 우와지마성 또한 도도 다카도라가 지었다. 1900년 무렵에 櫓(망루)・城門 등이 해체되었고, 1945년 7월 12일 공습 으로 大手門(성 정문)이 소실되었다. 1960년 무렵에 천수각 등을 수리하 였다. 오즈성에서 우와지마성까지의 거리는 자동차 도로로 38.7km이다.

필자는 오즈에서 기차를 타고 가서 답사하였다. 성루에 오르니 항구 도 시 우와지마 시내와 항구가 한눈에 들어왔다.

강항이 탈출하다 붙잡힌 우와지마 성 우와지마 성에서 본 우와지마 시내 강항은 우와지마에서 10리 더 가다 그만 조선에서 자신을 붙잡은 信七郞에게 붙잡히고 다시 오즈성으로 이송되었다.

이후부터 감시는 더더욱 엄해졌다. 너무 무료한 나머지 성 밑에 있는 사 찰에 나가 놀았다. 아마 이때 출석사를 방문하였을 것이고 그때 요시히 도와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2) 오즈에서 교토로 이송 1598년 6월, 도도가 조선에서 교토로 돌아왔다.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축하를 받으러 나온 것이다. 도도가 부하를 보내 강항을 오사카로 가게 하였다. 배를 타고 세토나이카이를 가로 질러 8일을 가 오사카에 도착하 였다. 10층 누각이 허공에 높이 드러난 오사카성을 본 강항은 담이 떨리 고 정신이 싸늘해져 오래도록 진정되지 않았다.

오사카성의 웅장함에 놀 란 것이다. 강항은 오사카에서 다시 작은 배에 실려 요도강을 거슬러 올라 교토로 이송되었다. 강항이 탄 배는 桂川, 宇治川, 木津川 세 강이 합류하는 수 륙교통의 요지에 축성되어 있는 요도성[淀城]에 도착한 것 같다.
오사카성의 높은 천수각 오사카성의 거대한 성벽 통신사 일행들이 행차할 때에도 요도성에 배를 정박하고 걸어서 육로로 이동하였다.

강항이 우지가와[宇治川] 입구에 이르렀을 때에 왜적에게 빼앗긴 우리나라 병선이 정박되어 있었다. 그곳까지 끌고 온 우리나라 사람들을 우리 병선으로도 실어 날랐던 것이다. 그곳에는 진주성 전투 때에 붙잡혀 온 사람들이 집단 거주하는 ‘晉州島’라는 곳이 있었다.

강항은 요도성에서 걸어서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거처는 태창(太倉)의 빈 집에 마련되었다. 시촌(市村)이라는 늙은 사람으 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다. 1600년 4월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그곳에 서 머물렀다.

후시미성은 도요토미 사망 이후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철거되어 복숭아 밭으로 변했다가 뒤에 천수각을 다시 지었다. 그래서 현재 명칭은 후시 미모모야마성[伏見桃山城]이라고 한다. 그는 교토에 오자마자 왜국 실정을 알기 위해 왜승들과 교제하기 시작하 였다.

황제의 숙부인데 출가하여 大佛寺의 승려가 된 照高院, 加古, 慶安, 의원 노릇도 하는 意安⋅理安, 妙壽院의 승려 舜首座 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 글도 알고 이치도 아는 자들이 없지 않았다.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가 바로 舜首座였다.

그의 첫 인상에 대 해 강항은 다음과 같이 간양록에 평하였다. 妙壽院의 중 舜首座라는 자가 있는데, 京極黃門定家의 손자요, 但馬守 赤松左兵廣通의 스승으로서 자못 총명하여 고문(古文)을 이해하여 어느 글이라도 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품이 굳 세어 왜인에게 용납되지 못하였는데, 內府 家康이 그가 훌륭한 인재 란 말을 듣고서 왜경(倭京)에다 집을 지어 주고 해마다 쌀을 2천 석씩 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舜首座는 그 집을 버리고 살지 아니하였고 곡 식도 사양하여 받지 아니하면서, 유독 若州少將勝俊과 左兵廣通만을 데리고 놀았습니다(又有妙壽院僧舜首座者。京極黃門定家之孫。而但馬守赤松左兵衞廣通之師也。頗聰明解古文。於書無不通。性又剛峭。於倭無所容。內府家康聞其才賢。築室倭京。歲給米二千石。舜首座者捨室不居。辭粟不受。獨與若州小將勝俊左兵廣通遊). 舜首座는 1561년에 播磨国 三木郡 細河村(현재 兵庫県 三木市 細川町桃津)에서 藤原為純의 3남으로 태어났다.

7세에 불교에 입문하여 播州 龍野 景雲寺에서 공부하다가, 아버지가 전 사하자 숙부를 따라 교토 相國寺로 갔다. 언제인가는 모르지만 이름을 舜(蕣이라는 기록도 있음), 자를 文華라고 했고, 首座가 되어서는 妙壽院에 기거하였다.

舜首座는 사뭇 총명하여 옛글도 잘 알아 통달하지 않은 글이 없었다. 그리고 성격이 강직하여 왜인들 사이에 잘 끼지 않았고, 도쿠가와 이에 야스가 그의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 교토에 집을 짓고 해마다 쌀 2천 석을 주고자 했음에도 집도 쌀도 받지 않았다. 이런 강직성은 명분을 강조하는 유학에 경도된 결과였고, “지난번에 大閤의 塚殿에 붙은 글씨를 보니,

바로 足下의 글씨였다. 왜 스스로 몸을 아끼지 아니하는가?”라고 강항에게 말한 것도 이런 심성에서 나온 것이 었다. 그는 상당히 일찍부터 유학에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仁如集堯, 鳳宗韶 와 같은 선승들을 통해서 주자학을 처음 접했을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6) 서른이 못 된 1590년에 조선에서 통신사로 온 황윤길, 김성일 등과 교 토에서 교류하면서 주자학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33세 되던 1594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초청되어 에도에 가서 貞觀政要를 강의했다고 한다. 그는 이 무렵에 유학자로서의 자각을 확실히 하여 승 적을 벗고 이름을 肅으로, 자를 斂史로 고쳤고, 惺窩7)란 이때 지은 호이 다. 당시 일본에서는 유학을 잘 알고 있지 못하였다. 그래서 후지와라는 주자학을 더 공부하기 위해 1596년 6월에 규슈에서 명나라 선박을 타고 중국으로 가려고 했으나 風濤를 만나 중단되었고(간양록에는 1591년 신묘년 3월 薩摩州로 내려가서 海舶을 따라 중국에 들어가려고 하다가 병이 나서 京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6) 桂島宣弘, 「姜沆と藤原惺窩-十七世紀の日韓相互認識」, 전북사학 34, 전북사학회, 2009, 265쪽.
7) 그가 유학자가 되면서 스스로 지은 ‘세이카’(惺窩)라는 이름이자 호도 강항이 그를 위해 써준 ‘성재기’(惺齋記)와 ‘시상와기’(是尙窩記)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후시미 성 계속되는 왜란으로 그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다음해 1597년에 교토 로 돌아와 6經(易経, 書経, 詩経, 春秋, 礼, 楽経)을 전하였다. 바로 이때 후지와라는 강항을 만난 것이다. 3. 후지와라, 주자학 개조가 되어 근세 유학 발흥하다.

1) 후지와라 묻고, 강항 답하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는 일본 에도 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세력과 싸워 최종 승 리를 거둔 뒤 1600년 10월 그를 불러 대학을 강의하게 하자 승복이 아닌 유학자의 복장을 입고 나타났다. 불교 수좌의 지위를 버리고 온전한 유학자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당 시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유학은 대부분 승려들이 공부했으며, 유학의 위 치도 불교의 보조적인 학문에 머무르고 있었다. 후지와라는 1598년 교토에서 강항을 만났다. 장소는 후시미에 있는 아카마츠 히로미치[赤松廣通, 1562~1600] 저택이었다. 

아카마츠는 다츠노[龍野]의 성주로 후지와라와 친교를 맺고 그의 후원자 로 나선 인물이다. 이때 강항은 32세였고, 후지와라는 38세였다. 후지와 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강항을 운명처럼 맞이하였다. 강항과의 교유를 통해 유학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려고 하 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강항을 보자마자 갖가지 질문을 쏟아냈 다. 먼저 이런 질문을 하였다.

신에게 우리나라의 과거 보는 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경연(經筵)⋅조정(朝廷) 등의 절목(節目)을 묻기에, 신은 대답하기를, ‘초야의 사람이라 미처 참여하여 듣지 못했다.’ 하였고, 단지 과거⋅석전 등의 대개를 알려 주었더니, 중은 매양 실심하여 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내가 중국에서 나지 못하고 또 조선에서도 나지 못하고 일본에서도 이런 시대에 태어났단 말인가(問臣以我國科擧節次及春秋釋奠經筵朝著等節目 臣答以草茅之人 未及豫聞 但告以科擧釋奠等大槩僧必憮然長嘆曰 惜乎吾不能生大唐 又不得生朝鮮 而生日本此時也).

후지와라는 유학의 대학자에게 제사를 올리는 석전제(釋奠祭)에 대해 물었다. 강항은 석전의례를 잘 설명해주었다. 강항도 후지와라와의 만남 에 대해 상당히 만족해 하였다. 이 점에 대해 후지와라의 제자 하야시 라잔은 후지와라 행장에서, “강항 이 아카마쓰氏 집에 와 있었다. 항은 선생(후지와라 세이카)을 보고 일본 에도 이런 인물이 있음을 기뻐하고 함께 얘기를 나누었다.

항이 이르기를, ‘조선의 300년 이래 이같은 인물이 있음을 나는 들어보 지 못했다. 내가 불행히도 일본에 떨어져 있지만 이 사람을 만났으니 이 또한 큰 다행이 아닌가’라고 했다.”8)라고 말하였다.

후지와라는 뛰어난 인품은 물론이고 이미 유학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선 지식을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강항은 후지와라의 서재 편 액의 내력을 적은 「惺齋記」를 지어주었다. 이 글에서 강항은 주자학의 여러 문구들을 원용하였다. 이는 후지와라로 하여금 주자학에 전념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9) 이러한 인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강항도 성의를 다해 갖가지 질문에 답 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인 가운데 유학의 의례, 더 나아가서는 조선의 의례를 따라 하는 이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점에 대해 후지와라는 다 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일본의 장관(將官)은 모두 다 도적들인데, 오직 廣通만이 자못 사람 의 마음을 지녔습니다. 일본이 본시 상례(喪禮)가 없었는데 광통만이 홀로 삼년상을 실행하였고, 중국의 제도 및 조선의 예절을 독실히 좋 아하며, 의복⋅음식의 세세한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중국이나 조선 의 것을 본받고자 하니, 비록 일본에 살지만 일본 사람이 아닙니다 (日本將官盡是盜賊。而惟廣通頗有人心。日本素無喪禮。而廣通獨行三 8) 朴均燮, 「姜沆이 日本 朱子學에 끼친 影響」, 日本學報 37, 韓國日本學會, 1996, p.258. 福田殖, 「강항과 藤原星窩」, 퇴계학논총 4, 1998, 53쪽. 9) 李東熙, 「睡隱 姜沆의 愛國精神과 日本에의 朱子學 전파」, 儒敎思想硏究 12, 韓國儒敎學會, 1999, 200 쪽. - 54 - 年喪。篤好唐制及朝鮮禮。於衣服飮食末節。必欲效唐與朝鮮。雖居日本。非日本人也).

일본에는 원래 상례(喪禮)가 없었는데 오직 아카마츠만이 3년상을 행 하였으며, 당의 제도나 조선의 예를 아주 좋아하여 의복과 음식 등 세세 한 데까지 당과 조선을 본받으려고 하고 있었다.

일본에 살고 있긴 하지 만 일본인이 아닐 정도라고 말하였는데, 이는 다음 기사를 살펴보면 과 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찍이 우리나라 오례의(五禮儀)⋅군학석채의목(郡學釋菜儀目)을 얻어서 그의 사읍(私邑)인 但馬를 독려하여 공자의 묘(廟)를 세우고 또 우리나라 제복(祭服)⋅제관(祭冠)을 만들어 날을 걸러 그 부하를 거느리고 제의(祭儀)를 익혔습니다(嘗得我國五禮儀郡學釋菜儀目 於其但馬私邑 督立孔子廟 又制我國祭服祭冠 間日率其下 習祭儀). 아카마츠는 우리나라의 국조오례의와 석전제절목을 얻어서 보고, 그 예시대로 공자묘(孔子廟)를 자신의 고향 다츠노에 세우고 제기와 제 복을 만들어, 날을 정해 석전제를 거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주자 학을 공부하고 확산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조치였던 것이다. 2) 주자학 경전 간행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주자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길을 강항에 게 물었다. 후지와라는 우선 강항에게 자신들의 학문적 실정을 진솔하게 털어 놓았다. 
 
일본의 유자들은 한유(漢儒)의 학만 알 뿐이고 송유(宋儒)의 이치를 알지 못하여, 도리어 한유가 송유를 비난하는 가소로운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고 말하였다. 이 말은 일본 안에 주자학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래서 주자학을 배우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에 부응하여 강항도 주자학의 이치와 공부법 및 저서를 강의하거나 소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유학 연구의 심화를 위한 먼저 경전 간행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그들이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일이었다. 일찍이 우리나라 선비로서 포로가 되어 있는 자와 신 형제를 상종하 여 육경(六經)의 대문(大文)을 적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가만히 은 전(銀錢)을 주어 객지의 생활비에 보조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노자나 하라고 하였습니다. (又嘗從我國士人之在俘虜者及臣兄弟。求書六經大文。潛以銀錢助臣 等羈旅之費。以資歸路).

후지와라는 강항과 조선인 선비 포로들에게 주자학을 이해할 수 있는 6경의 경서(經書)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비록 포로이지만 그냥 부탁 할 수 없어 일종의 대가로 은전(銀錢)을 주었다. 

간양록에는 왜승 순수좌를 따라 글씨 품을 팔아서 은전을 얻었다고 기 록되어 있어 잘못 읽으면 돈벌이 글씨로 해석할 수 있다. - 56 - 경서 간행과 관련된 간양록 기록은 이 기사가 유일하다.

이 부분은 후 일 왜국을 도와주었다는 부역 혐의가 있을 것 같아 일부러 기록에 자세 하게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삼강 오륜을 잘 지켜 죽음으로 나라를 지켜야 하였기 때문에, 살아 돌아 오는 것이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많은 피로인들이 쇄환을 주저하였고, 귀국한 사람마저도 사지 에서 고생한 것을 위로받기는커녕 죄인처럼 살아야만 하였다. 죽어야만 사는 나라, 그것이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그래서 강항이 일본 유학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우리나라 기록을 통해서는 알기 어렵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런 내용이 藤原惺窩集 등 일본에 남아 있는 자료 속에 들어있고, 우리의 후대 기록에도 나와 있어 그 실상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점에 대해 알아보겠다.

이들이 쓴 경서는 주자(朱子)의 주석에 따라 일본식 훈점(訓点)을 표시 한 사서오경(四書五經) 왜훈본(倭訓本)이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주자가 해석한 사서오경을 일본인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점을 찍고 주석을 단 것이다. 아카마츠가 재정을 후원하고 후 지와라가 편찬을 총괄하면서 강항이 큰 역할을 한 이 책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성리학 텍스트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원본은 현존하지 않음). 이 점에 대해 후지와라의 제자 하야시는 자신이 쓴 ‘후지와라 행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나라(일본)의 유학박사는 옛날부터 한나라, 당나라의 주소(註疏) 를 읽고 경전에 점을 찍고 일본어식 훈(訓)을 달았을 뿐이다.

그러면 서 정주(程朱)의 서적에 이르면 아직 십분의 일도 모르며 성리학을 아 는 사람도 드물다. 이에 선생(후지와라 세이카)이 아카마쓰 씨에게 권 유하고, 강항 등에게 사서오경을 정서하게 했다. 선생은 스스로 정주 (程朱)의 뜻을 따랐는데, 이것이 훈점본이 되었으니 그 공이 매우 크 다. 일본내 주자학의 기본 자료가 강항의 손을 빌어 탄생되는 순간이다. 그 책을 보고 비로소 일본인들은 주자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카마츠 또한 자신의 공부를 위해 수진본 사서오경, 소학, 근사록 등 모두 16종에 달하는 서적의 필사 및 그에 대한 서문이나 발문을 강항에게 의 뢰하였다. 이들 서적은 紅葉山文庫, 內閣文庫를 거쳐 현재는 國立公文書館(東京都千代田区北の丸公園)에 수장되어 있다. 이리하여 후지와라는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이 점에 대해 강 항은 자신이 쓴 ‘오경’이란 책의 발문(「오경발」)에서 일본 사람들은 주자 학이 있는 줄을 몰랐는데, 후지와라가 처음 그 실을 밝혔으니, 후지와라 가 아니면 일본에 주자학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아카마츠의 후원이 없었다면 후지와라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강 항은 잊지 않았다.10) 후지와라는 강항과 헤어진 뒤에도 홀로 유학을 연구하여 후진을 양성 하게 되었는데, 일본 주자학은 그의 문인들이 이어져 나와 큰 발전을 이 루었다.

유학에 의한 정치와 그에 따르는 제도 제정을 막부에 주장한 오규 소라 이[荻生徂徠, 1666~1728]는 “왕인(王仁)씨가 있어 후민(後民)이 처음으 로 문자를 알았고 (중략) 후지와라씨가 있어 후대인들이 처음으로 하늘 과 성인을 말하게 되었다”고 하여, 후지와라에 의해 일본 주자학이 시작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후지와라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 하야시 라잔(林羅山, 1583~1657)은 스승의 추천으로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강(侍講)이 된 이후 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에 이르기까지 막부의 시강으로 일했다.

하야시의 사숙(私塾)은 에도 유학의 거점 구실을 했다. 이처럼 강항은 후지와라의 스승이 되어 일본 근세 유학이 꽃피우는 데 에 초석을 놓아준 역할을 하였다. 이 사실은 강항 사후 200여년 지나서 야 비로소 조선 선비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10) 박맹수, 「수은 강항이 일본 주자학 발전에 끼친 영향-후지와라 세이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도서문화 35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2010, 52쪽. 

조엄(趙曮, 1719~1777)이 1763년에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서 적은  해사일기에, “임진란 때 우리나라 사람 수은 강항이 4년 동안 잡혀 있 었는데, 그때 舜首座란 승려와 교유하면서 비로소 문교를 열었다.

(중략) 일본의 학술은 긴긴 밤이라고 해야 옳으며 일본의 문장은 소경이라 해도 되겠으나, 그중을 취해서 말하자면 舜首座의 파가 가장 정학(正學)이라 하겠다.”고 하여, 강항과 교유한 후지와라에 의해 일본 근세 유학이 열 리었다고 적었다.

또한 조엄을 수행하여 역시 일본을 다녀온 성대중(成大中, 1732~1809) 은 청성잡기에서 “수은 강항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 갔다가 승려 舜首座를 만나 학문을 가르쳤다. 일본 유학의 뿌리가 이로부터 시작되었고, 끝내 그의 도움을 받아 환국 하여 간양록을 지어 왜국의 사정을 매우 정밀하고 자세하게 기록했는 데 아마 승려 舜에게 들은 것인 듯하다.

승려 순은 결국 환속하여 ‘염부(斂夫)’라고 개명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 쳤는데, 일본에서는 그를 위해 사당을 지어 제향하고 수은까지 하였다고 한다.”고 하여, 조엄과 비슷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로 인해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차지하는 강항의 위상이 국내에 알려지 게 되었다.

4. 맺음말 :
강항, 동아시의 지성인이 되다.

강항은 1597년 9월 23일 납치되어 1600년 5월 19일 돌아올 때까지 2년 8개월 동안 일본에 억류되었다. 그 가운데 교토에 있었던 기간은 1년 10개월 남짓에 불과하였지만, 이 짧은 기간에 그가 남긴 행적은 일본의 유학을 발흥시켜 일본에 ‘에도시 대 서민문화’라는 새로운 학문의 시대를 여는 데에 기여하였다. 도요토미 이후 권력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 방향은 무치를 지양하고 문치(文治)를 표방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오랜 전통이 있는 불교를 그대로 존속시키면서 새로이 주자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하였다. 주자학이 지닌 사상이 새로운 질서의 일본 통치에 유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데올로기의 재편을 단행한 것이다.

그래서 도쿠가와는 후지와라를 자 주 불러 정치에 관한 중국 고전을 강의하도록 하면서 그를 극진히 대우 하려고 하였다(조선 왕실에서 행해졌던 經筵筵과 같은 것). 그러나 후지와 라 자신은 나오지 않고 은거하고 말았다.

하지만 제자 하야시를 막부에 추천하였고, 하야시는 막부에 들어가 주자 학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오즈시 시민회관 앞에 있는 강항 기념비 이를 기념하여 오늘날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 중심가 시민회관(현재는 폐쇄) 앞에는 1990년에 건립된 ‘홍유강항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서 있다. 강항의 고향인 영광군과 오즈시는 2001년부터 교류하고 있다.
龍野 성 주 赤松廣通 기념비에도 강항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국제 학술세미나 발제문>
❏‘나의 수은 강항선생 연구의 발자취’발표 1 ---무라까미 쓰네오회장 睡隱 姜沆先生 일본연구회장 睡隱 姜沆先生포로 행적기 저자

❏睡隱 姜沆先生과 靈光郡 發展方案 발표 2-----------------강원구박사 한중문화교류회 중앙회장 광주여행문화원장 진주강씨광주전남종회장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수은 강항의 역할과 위상" 발표 3---김덕진박사 광주교대 사회교육학장 광주교육대 교수 / 박사 호남사학회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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