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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교의 비조 수은 강항과 일본의 근대화

무라카미 츠네오(수은강항선생 일본연구회)회장, '홍유 수은 강항선생 현창비' 건립 배경 설명
등록날짜 [ 2018년12월02일 19시35분 ]

 방금 소개받은 무라카미 츠네오입니다. 이번에 저와 함께 온 저 분은 다나에 츠토무씨입니다. 일본 에히메현 오즈시에서 왔습니다.

 지난해 상사화가 한창이던 내산서원에서 심포지움을 끝내고 오즈시로 돌아온 지 1주일 뒤에 한국에서 26명의 단체가 오즈시를 방문하였습니다. 제가 오즈성에 있는 강항선생 현창비를 안내하였습니다. 그 단체는 영광군의 농업관련 종사자들로 일본의 농업기술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일곱 번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역사를 배우기 위해서지요. 방문 목적은 다양하겠지만 서로를 배우고 교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국제교류 및 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강항선생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과정은 매우 힘들고 고달팠지만, 교토에서 만난 후지와라 세이카로 부터 ”배우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듣고  "가르쳐드리죠"라고 답한 것은 유학자 강항선생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오늘 한국 방문이 여덟 번째입니다. 모든 것이 낯익은 풍경입니다만 올해는 각별한 감격이 있습니다. 그 것은 금년이 일본에 유교를 전한 수은 강항선생이 돌아가신 지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강항선생을 알게 된 것은 34년 전인 1984년 6월입니다. 오즈 시청에서 교육위원회 문화계를 맡고 있을 때 오사카에 사는 재일교포 신기수씨를 대표로 하는 그룹에서 강항선생 기념비를 오즈성에 세우고 싶으니 부지를 제공해 주었으면 한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편지에는 강항이라는 사람이 교토에서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유교를 전한 그의 업적이 간단하게 쓰여 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오즈시에서 발행하는 잡지 ”'오즈시지'를 읽어보니 한자 이름은 '쿄우코'라고 일본식 후리가나가로 되어 있었으며, 오즈성 토도 다카도라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을 침략했을 때 포로로 잡혔던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오즈시내에서 제일 비싼 땅인 오즈성터의 일부분을 제공하려면 나름대로 현저한 공적이 있는 인물이어야만 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기념비 건립에 적합한 인물인지를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저는 난처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서울 박물관에서 복사를 했다며 서류를 가지고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4세기 전에 강항선생이 쓴 '간양록' 이었습니다.

 어려운 한문은 사전을 참고하면서 읽는 도중 내 등골이 오싹함을 느낄 정도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인물이야말로 일본에 유교를 전파하고 일본 교육· 문화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로자임을 알게 된 것이죠.

저는 '유학자 강항과 오즈'라는 논문을 써서 기념비를 오즈성에 세우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강조를 하였으며 부지제공을 승인해야 한다고 기안했습니다. 다행히 시장, 교육장 그리고 의회도 이것에 찬성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기념비 건립의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건립비 모금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1987년 7월 뜻밖에 한국 경주의 동국대 교수인 오영진, 장충식 교수의 방문이 있었습니다. 한일 문화교류에 대해 연구하러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강항선생과 관련된 자료를 건네주고 유적을 안내하자 일본어과 오교수로부터 한국방문을 권유받았습니다. 그때 저는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고 다음달 8월 대학교수의 안내로 서울에서 전주, 광주, 영광, 경주로 5일간의 여행을 떠났습니다.

 광주 박물관에서 이을호 관장을 만났고, 영광에서는 강씨 후손 분들을 만나 내산서원을 찾았습니다. 뒷산 있는 강항선생의 묘소를 참배하고, 일본 교육 문화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에 감개무량하였습니다. 서원에 비치된 방명록의 명단을 넘기자 일본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아직 일본에는 강항선생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한편, 현창비 건립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1990년 3월 11일, 벚꽃이 만개한 오즈성에서 한국인 참석자 32명을 포함 약 160명이 참석해 제막식을 하였습니다. 마스다 요이치 오즈시 시장은 축사를 통해 “강항선생은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두 나라의 인연을 맺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즈시가 이렇게 한일 양국의 친선을 도모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영광스런 일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공무원의 숙명으로 그 때에 발령이 나 다른 부서로 전근이 되어 다른 업무를 하였습니다만, 강항선생 연구자로서 기념식장의 맨 끝자리라도 앉을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강항선생이 여기서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했다는 기록이 떠올라 만감이 교차됐습니다.

 이 기념비 건립을 계기로 강항선생의 이름이 일본의 매스컴에 소개되는 일이 잦아졌으며, 한국에서도 큰 화제 거리가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즈성 기념비를 찾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한국에서도 강씨 가문, 영광군, 광주시 등의 고향사람들과 학자, 연구진 등 많은 사람의 방문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윤홍식씨가 계십니다. 바로 이분이십니다.

 강항선생이 쓴 일본에서의 포로생활(日本幽囚)의 기록을 편집해 출판한 제자 윤순거씨의 13대 후손이 되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윤씨는 조상의 뜻을 이어 강항선생의 공적을 현창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해 오즈시장에게 한국을 방문하도록 권했습니다. 시대를 뛰어넘고 해를 거듭하여도 은사를 현창 하려는 師弟간의 깊은 정의 모습에 감동을 받게 하였습니다. 


 그 후에 도착한 편지가 이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이렇게 큰 글씨로 된 초대장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한글은 읽을 수 없습니다만, 이 한자라면 압니다. "明春靈光春享擧行, 責任案內安心來韓 -- 내년의 봄 영광에서 춘향제가 거행됩니다. 책임지고 안내할 테니 안심하고 한국에 오세요. 라고 읽었습니다.

 사실 그 전까지는 오즈시장이 한국행을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침략자, 토도 타카토라의 출신지 사람의 방문을 받아 줄까? 하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편지를 보고 처음으로 한국행을 결심했습니다. 동행은 시의회 대표의 오모리 부의장, 교육위원회 대표의 쿠보타 교육장, 그리고 먼저 한국을 방문했던 경험이 있던 시민 과장인 저도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91년 봄 4월 15일, 저희는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거기에 '환영 오즈시장님'이라고 쓴 종이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마중을 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진주 강씨 종회 회장 강기천씨로 부터 그날 밤 서울에서 환영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차로 광주시에 도착해서 코리아나호텔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에는 호텔 경영자이자 강자희선생의 후손인 강대직씨가 저녁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뜻한 환영인사가 있었습니다. 모두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하면서도, 즐거운 밤을 보냈습니다.

 그 다음날 공교롭게도 비가 왔지만, 승용차로 영광군을 향해 군청을 방문했습니다. 정말 긴장의 순간이었어요. 하지만 다음 순간 우리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커다란 탁자 한가운데에 한국과 일본의 국기가 굳게 묶여 장식되어있는 것을 보았어요. 정 군수님으로 부터 환영의 인사말씀을 듣고, 간담회를 마친 후 내선서원으로 서원으로 향했습니다.

 거기에는 유림복장차림으로 참배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매스컴의 기자들도 기다리고 있어 취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식이 시작되자 우리들은 익숙해지지 않는 예법에 당황하면서도 확실한 것은 지난 400년 동안 일본인으로써 처음 참가한 식을 끝냈습니다.

 마스다 시장은 답사를 하기 위해 일어나서 “일찍이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오즈성 토도다카토라가 이 땅을 침략한 과오를 사죄하고 강항선생이 일본의 교육 화의 발전에 공헌한 공적을 기리고, 향후 교류를 하자고 호소했습니다. 이 말은 윤홍식씨의 통역으로 참가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인사가 끝났을 때 는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여행 중에 일본어로 안내하던 한국의 젊은 여성 가이드는 마스다 시장의 인사를 듣고 일본인을 오해했어요. 부끄럽습니다. 하며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마스다 시장의 방문은 당일 테레비젼에 방송되고, 그 후엔 각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봇물 터지듯 한국 방문이 시작돼 행정단체, 시내학교장 등 교육관계자, 청년회의소와 함께 온 어린이 스포츠클럽, 오즈고등학교 수학여행 단체, 그리고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는 이마지시, 미에현 쯔시의 상공회의소 등등 방문이 이어졌습니다. 

 저에게도 변화가 있었습니다. 아직까지 일본에 강항선생의 공적을 소개하는 책자가 없으니 신기수씨로 부터 제의를 받아 공동으로 집필을 하고 1991년에 “유생 강항과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아카이시출판사에서 출판했습니다. 중앙 언론에도 소개가 되어 갑자기 바빠지고, 공무원의 일과 양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다음해인 1992년 3월, 3년 남은 정년을 기다리지 않고 시청공무원을 의원 퇴직했습니다.
 
 갑자기 직업도 없어지고 수입도 없어져 마누라한테 몹시 혼났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습니다. 역사의 작가로써 감동과 흥분의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1999년, '강항·유교를 전한 포로인의 발자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저는 이번을 포함해 한국을 8번 방문했지만, 2년 전에는 예상치 못한 명예를 얻었습니다.


앞서 발행했던 책이 번역되어 한국에서 출간된 데 이어 '서울언론인 클럽 상'에서 외국인 특별상'으로 선정됐습니다. 저가 이 영예로 인하여 강항선생의 공적이 한국 내에서도 널리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시상식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오즈 시에서는 중학교 부독본을 제작해 일본 유학의 영향을 미쳤다는 강항선생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지방의 작은 시에서의 일입니다만, 언젠가는 일본의 교과서에 그리고 역사책에 빛나게 등장하는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저는 시청 직원으로써 평범한 삶의 끝자락에서 강항선생을 만나고 작은 연구를 계속하면서 오즈시와 영광, 나아가 일본과 한국의 우호친선에도 기여할 수 있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더욱 기쁜 일이 있었습니다. 2001년 3월 영광에서 개최된 심포지움 때 내빈으로 참석한 국회의원이 유창한 일본어로 저에게 말을 건 적이 있습니다. 그분이 이낙연 의원님이었습니다. 저는 기쁘게도 일본어가 능숙한 분이면 읽어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일본어로 된 책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한 권 더 넣고, 이건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드려 달라고 부탁한 결과, 이런 대답이 왔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굉장히 기뻐하셨다고 합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이 의원은 그 후 전라남도 지사가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오즈의 강항선생 현창비를 두 번이나 방문하셨고 제가 안내를 했습니다.  고향의 대한 자부심으로 존경받고 계시리라 짐작됩니다. 그때 오즈성에서의 사진입니다.

 그 지사님이 작년 5월의 정변에 의해 수상에 취임하게 된 것입니다. 국제관계가 힘든 시절이지만 언젠가 일본에 다시방문 했을 때 이 총리로부터 어떤 말이 나올까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혹시 3번째 오즈를 방문하는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되면 강항선생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그날을 꿈꾸고 있는 중입니다.

 다시 한 번 일본의 교육, 문화를 위한 대 은인이신 수은 강항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고, 그 고장 영광군이 평화롭고 풍요롭게 발전하기를 기원하며 여러분의 복을 기원하며 저의 인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鴻儒 睡隱 姜沆先生 顯彰碑 建立 背景

村上恒夫會長(睡隱姜沆先生日本硏究會)

 御紹介いただきました村上恒夫です。一緒に参りましたのは田苗勉さんです。日本の愛媛県大洲市から参りました。

 昨年、彼岸花が真っ盛りの内山書院でのシンポジュームから帰ってわずか1週間後、韓国から26人の団体が大洲を訪問され、私が大洲城の姜沆先生顕彰碑を案内しました。その団体は霊光郡の農業関係の方々で、その目的は日本の農業技術を学ぶためと聞きました。


 私はこれまでに7回韓国を訪問しております。歴史を学ぶためです。目的は様々ですが、お互いに学びあって交流する――。まことに喜しい現代の国際親善の姿であります。

 かつて姜沆先生が日本に渡ったその過程は、まことに悲しいものでありましたが、京都で藤原惺窩から「教えてください」と求められたとき「教えましょう」と答えた、儒学者としての姜沆先生の心が理解できるところです。

 さて、今日8回目の韓国訪問をすることができました。見慣れたこの風景でありますが、今年は格別の感激があります。それというのも、本年は日本に儒教を伝えた睡隠姜沆先生が亡くなられてからちょうど四〇〇年の記念の年であるからです。

 私が姜沆先生を知ったのは、34年前の1984年6月のことであります。大洲市役所に勤め、教育委員会の文化係りを担当しているとき、大阪に住む在日韓国人の辛基秀さんを代表とするグループから、姜沆先生の記念碑を大洲城に建てたいので土地を提供して欲しいとの手紙が届きました。手紙には姜沆という人物について、京都で藤原惺窩に儒教を伝えたとその業績が簡単に書いてありますが、細かな内容は分かりません。

 『大洲市誌』を読むと、名前の文字に「きょうこう」と日本語読みの振り仮名がついて、大洲城主藤堂高虎が豊臣秀吉の命令で朝鮮を侵略したとき捕虜にした人物として、わずか九行の記事が載っていました。

  市内の一等地である大洲城跡の一角を提供するには、それなりの顕著な功績のある人物でなければなりません。知る限りの資料では記念碑を建てるにふさわしいかどうか説明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私は困りました。

 そこへ、韓国のソウル博物館でコピーをしたとして、この書類を持って来た人がありました。4世紀年前に出版された姜沆先生が書いた『看羊録』であります。むつかしい漢文の文字を辞書を参考にして読むうち、私は背中に冷たい水を浴びせられたような衝撃を受けました。この人物こそ日本に儒教を伝え、教育・文化の発展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功労者であることを知ったのです。

 私は『儒者姜沆と大洲』と題する論文を書いて、記念碑を大洲城に建てるのは意義のあることと強調して、土地の提供を承認するよう起案しました。幸いに教育長・市長、そして議会もこれに賛同しました。こうして、記念碑建立の機運は一気に高まり、資金の募集活動が始まったのです。

 その後1987年7月、思いがけなく韓国から、慶州の東国大学教授の呉英珍・張忠植両教授の訪問がありました。韓日の文化交流について研究に来られたとのことでした。私が姜沆先生について書いた資料を渡し、遺跡を案内すると、日本語科の呉教授から、韓国訪問を促されました。私は初めてパスポートを取得して、翌8月、大学教授の案内で、ソウルから全州・光州・霊光・慶州と5日間の旅に出ました。光州博物館で李乙浩館長に会い、霊光では姜家の子孫になる方と会い、内山書院を訪ねました。裏山の姜沆先生の墓を参拝して、日本の教育文化の淵源の地はここであったかと感慨深いものを覚えました。しかし、書院に備えられた見学者名簿をめくると、日本人らしき名前を見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残念ながら、まだ日本には姜沆先生の名は知られていなかったのです。

 一方、顕彰碑建立事業は順調に進み、1990年の3月11日、満開の桜が咲く大洲城に、韓国からの出席者32名を含む、およそ160名が参加して完成を祝いました。桝田与一大洲市長は祝辞を寄せ、

 「姜沆先生は時代を越えて、今も両国のきずなを結ぶ役目を果たしておられるものと思います。――大洲市がこうして日・韓両国親善のはしわたしの役をになうことのなり得るならばまことに光栄なことであると思います」


と述べました。

 私は公務員の宿命で、そのときには転勤になり別の職場に変わっていましたが、姜沆先生研究者として式典の末席に連なることができ、かつて姜沆先生がこの場所から西の空を眺めて慟哭した記録を思い、万感胸に迫るものを覚えました。

 この記念碑建立を機会として、姜沆先生の名が日本のマスコミに取り上げられることも多くなりました。また、韓国でも大きな話題となったと聞かされました。そして、大洲城の記念碑を訪ねる人がありました。韓国からも一族の方、霊光郡、光州市など故郷の人々、学者や研究グループなど多くの来訪がありましたが、その中に尹洪植さんがありました。この方であります。

 姜沆先生が書いた日本幽囚の記録を編集して出版した、弟子の尹舜擧さんの13代子孫になる方と聞きました。

 尹さんは、先祖の意志を継いで、姜沆先生の功績を顕彰しようと日本を訪れ、大洲市長を尋ねて韓国を訪問するよう勧められました。時代を越え、年代を重ねて恩師を顕彰しようとする師弟愛の姿に感動させられます。

 その後に届いた手紙がこれであります。私はこれまで、このような大きな立派な字の招待状を受け取ったことがありません。残念ながらハングル文字は読めませんが、この漢字であれば分かります。

 「明春霊光春享挙行、責任案内安心来韓――来年の春、霊光において春の祭りが挙行されます。責任をもって案内しますから安心して韓国へ来て下さい」


と読めます。

 実はそれまで、大洲市長は韓国行きをためらっておりました。かつての侵略者、藤堂高虎の出身地からの訪問が受け入れられるか、という不安があったからであります。しかしこの手紙を見て、初めて韓国行きを決心しました。同行は市議会代表の大森副議長、教育委員会代表の久保田教育長、そして先に韓国を訪問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市民課長の私も加わることになりました。

 翌年、1991年春4月15日、私達は金浦空港に降りました。そこに「歓迎大洲市長様」と書いた紙を持つ人の出迎えに驚きました。晋州姜氏宗会会長姜起千氏で、その夜はソウルで歓迎を受けました。

 そして翌日、車で光州市に到着してコリアナホテルに入りました。そこにはホテルの経営者であり、また姜沆先生の子孫と聞く姜大直氏が夕食の席を設けて待ってい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暖かい歓迎の挨拶がありました。何もかも予想外のことに戸惑いながらも、楽しい夜を過ごしました。

 翌日、あいにくの雨となりましたが、車で霊光郡に向かい、郡役所を訪問しました。まさに緊張の一瞬でした。


 しかし次の瞬間、私達の心はなごみました。大きなテーブルの中央に、韓国と日本の国旗が固く結んで飾ってあるのを見たのです。

 丁郡主から歓迎の言葉を受け、懇談のあと内山書院に向かいました。そこには儒服で参列する人があり、また、マスコミの記者が待ち構えていて取材が始まりました。そして式が始まり、私達は慣れない作法に戸惑いながらも、まさに四〇〇年を経て、初めて日本人が参加する式典を終えました。
 桝田市長は挨拶に立ち、かつて豊臣秀吉の命令で大洲城主藤堂高虎がこの地を侵略した過ちを謝罪し、姜沆先生が日本の教育文化の発展に貢献した功績をたたえ、今後の交流を呼びかけました。この言葉は尹洪植さんの通訳で参加者に伝えられました。挨拶が終わったとき、参加者から大きな拍手がありました。

 私達の旅行中、日本語で案内をしていた韓国の若い女性ガイドは、桝田市長の挨拶を聞いて
「日本人を誤解していました。恥ずかしいです」
と言って涙を流したことを覚えております。

 この桝田市長の訪問は当日のテレビジョン、その後の新聞で大きく報道されたと聞きました。

 その後、堰を切ったように韓国訪問が始まり、行政の団体、市内の学校長など教育関係者、青年会議所に引率された子供のスポーツクラブ、大洲高等学校の修学旅行の団体、また、朝鮮の役に関係のある今治市、三重県津市の商工会などが、次々と訪問していることを知りました。

 私の身にも変化がありました。まだ日本に姜沆先生の功績を紹介する図書がないとき、辛基秀さんに促されて共同で執筆して、1991年に『儒者姜沆と日本』と題して明石書店から出版しました。中央のマスコミにも紹介されたことからにわかに忙しくなり、とても公務員の仕事と両立することが不可能と知り、翌1992年3月、3年後の停年を待たずに市役所を依願退職しました。

  たちまち無職無収入となり、女房には大変怒られました。しかし後悔はしておりません。歴史作家として感動と興奮の毎日を過ごしております。
 そして1999年、2冊目として『姜沆・儒教を伝えた虜囚の足跡』と題して出版致しました。

 先にも申し上げました通り、私は今回を含めて韓国を8回訪問しましたが、2年前には予想もしていない名誉を受けました。先の著書が翻訳されて韓国で出版され、さらに「ソウル言論人クラブ賞」の「外国人特別賞」に選ばれたのです。私はこの栄誉を受けることにより、姜沆先生の功績が韓国内にも広く認められることになると思い、喜んで授賞式に出席致しました。


 大洲市では中学校の副読本を作り、「日本儒学に影響を与えた」として姜沆先生を大きく取り上げました。地方の小さな市の取り組みですが、やがて日本の教科書、そして歴史書に輝かしく登場されることを夢見ているところであります。

 私は市役所の職員として平凡な人生に終わるはずのところ、姜沆先生に出会い、ささやかな研究を続けるうち、大洲と霊光、さらには日本と韓国の友好・親善にも寄与することができ、感謝をしているところであります。

 さらに喜しい出来事がありました。2001年3月霊光で開催されたシンポジュームのとき、来賓として出席された国会議員から流調な日本語で話しかけら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れが李洛議員でした。

 私は喜しくなり、日本語の堪能な方なら読んでいただけると、日本語の本を送りました。そしてさらに1冊を加え、これは金大中もと大統領に差し上げて下さいとお願いしたところ、このような返事がありました。「もと大統領が大変喜ばれたそうです」と書いてあります。まことに光栄なことであります。

 李議員はその後全羅南道知事になりましたが、その間、大洲の姜沆先生顕彰碑を2回尋ねられ、私が案内をいたしました。郷土の誇りとして、姜沆先生を尊敬されておられるものと拝察しました。

 そのときの大洲城での写真であります。
 その知事が、昨年五月の政変により首相に就任されたのです。国際関係で大変な時代ですが、いつか日本に来られたとき、李首相からどのようなお言葉があるのか楽しみです。そして、もしかすると、3度目の大洲への訪問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そうなれば姜沆先生もどんなにか喜ばれることでありましょう。その日を夢見ているところであります。

 改めて、日本の教育・文化の大恩人、睡隠姜沆先生医業をたたえ、そのふるさと霊光郡が平和で豊かに発展することを願い、皆様のご多幸をお祈りして私の挨拶を終わります。カムサハムニ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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