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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이순신의 올바른 이해 1〕이순신 ‘자살설’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이순신 자살설’ 충무공 두 번 죽이고, 값진 죽음에 대한 모독!!
등록날짜 [ 2018년12월24일 12시18분 ]

충무공 이순신(1545∽1598)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연재한다.  
허위 · 과장 · 왜곡된 이순신 바로잡기이다.  1회는 ‘이순신 자살설’이다.
                             
           
- 연재를 시작하면서 -


1598년은 임진왜란(1592-1598)이 끝난 지 7주갑(420년)이다. 1598년 11월19일(양력 12월16일)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순신은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전사했다.

노량해전부터 살펴보자. 1598년 8월18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죽었다. 일본 막부는 11월 중순까지 왜군의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러자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과 함께 순천 왜교성에 있는 고니시의 퇴로를 막았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뇌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자 11월16일에 진린은 통신선 1척이 남해로 빠져나가는 것을 묵인했다. 이를 안 이순신은 진린에게 강력 항의하면서 남해로 가서 왜군을 선제공격하자고 제의했다. 아니나 다를까. 남해의 소 요시토시(고니시의 사위), 사천의 시마즈 등은  왜선 500여척을 이끌고 순천으로 오고 있었다.

11월18일에 200여척의 조·명 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이동했다. 11월19일 자정에 이순신은 “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고 하늘에 빌었다.

 

전투는 19일 새벽 2시부터 어둠속에서 초근접전으로 시작되었다. 이윽고 조·명 연합수군이 화공전을 펴자 전세는 아군으로 기울었다. 타격을 입은 왜군은 퇴로를 찾아 관음포 쪽으로 이동했다. 날이 밝자 관음포에 갇힌 것을 인식한 왜군은 포구를 탈출하기 위해 결사항전을 했다.
  

이런 격전 중에 직접 북채를 쥐고 전투를 독려한 이순신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오전 10시경이었다.

전투는 19일 정오경에 조·명 연합수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연합수군은 왜선 200여척을 불살랐고 100여척을 나포했다. 시마즈 등은 남은 배 50여척을 이끌고 남해를 빠져 나갔고, 고니시도 전투를 틈타서 남해 바깥 바다로 탈출했다. 이 해전에서  가리포첨사 이영남 · 낙안군수 방덕룡 등 10여명의 장수와 명나라 부총병 등자룡이 전사했다.

그런데 숙종 때 대제학 이민서(1633∽1688)는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어 1596년 8월에 옥사한 팔도의병장 김덕령(1567∽1596)의 생애를 기록한 ‘김장군 전’을 쓰면서 이순신의 자살설을 제기했다. 1)

“김덕령 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가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했으니, 곽재우는 군사를 해산하고 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투가 한창일 때 갑주를 벗고 스스로 총탄에 맞아 죽었다.” 

이민서는 김덕령의 억울한 옥사를  강조하기 위하여 이순신도 자살한 것으로 보았다. 영의정 이여(1645∽1718)도 ‘이순신의 죽음은 미리 계획된 것이었다.’고 적었다.

하기야 노량해전이 끝난 11월19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천거한 영의정 류성룡을 파직시켰다. 북인들의 탄핵을 빌미로 한 토사구팽이었다. 이랬으니 이순신도 살았다면 탄핵을 받았을 것이고 이순신을 백의종군 시킨 선조가 또 다시 이순신을 국문할 가능성도 있었으리라.  
 

지금도 자살설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김탁환은 장편소설 ‘불멸의 이순신 (8권 p 306)’에서 이순신은 갑옷과 투구를 벗어던지고 붉은 융복 차림으로 군사를 독려했다고 썼고, 2004년에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붉은 융복으로 북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순신 연구를 하는 전문가들은 이는 역사왜곡이고 가짜뉴스라고 일축한다. 전투가 치열한 와중에 북을 치고 독려하면서 어느 겨를에 그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모두 벗어던진단 말인가.

소설이나 드라마는 픽션이지만 파급력이 강하다. 대중들은 그대로 믿는다. 따라서  ‘이순신 자살설’은 이순신을 두 번 죽이는 일이고, 값진 죽음에 모독이다. 2)



1)  이민서는 1685년에 ‘명량대첩비문’을 지었고, 1677년에  광주목사로 있을 때 임진왜란 의병장 박광옥의 사우를 중수하고, 김덕령을 제향했다.

한편 김덕령은 옥중에서 춘산곡(春山曲)을  읊었다.

춘산의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붓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의 내(연기) 없는 불 일어나니 끌 물 없어 하노라

2) 이민웅 『이순신 평전』, 황원갑 『부활하는 이순신』, 김종대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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