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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22회

김세곤(칼럼니스트) 연산군, 유생 주동자들을 처벌하다.
등록날짜 [ 2018년12월24일 14시44분 ]

1495년 1월25일에 승지 권경우가 의금부에서 유생을 추국한 안(案)을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연산군은 “조유형은 상소문을 주장하여 지었고, 정희량과 이자화는 혹 기초(起草)하고 혹 정서(正書)하였으니, 어찌 먼저 발언한 자를 모르랴. 만일 다 말하지 않는다면 형신(刑訊)하라”고 전교하였다.

1월26일에 대간·홍문관이 유생의 추국과 형 집행이 불가함을 간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이 날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조유형 등의 공사(供辭)에 이르기를 ‘신 등은 깊이 대행 대왕께서 양육하신 은혜를 입었으므로, 비록 예문(禮文)에 없다 하더라도 거애(擧哀)하는 날, 곡림(哭臨)하는 제도를 좇고자 돈화문 밖에 모였다가 설재(設齊)한다는 것을 듣고 함께 의논하여 상소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매 소를 거푸 올렸으나, 모두 윤허를 받지 못했습니다. 소중(疏中)에서 말씀드린 중들이 설재(設齋)의 명을 듣고 길에서 서로 경하하여, 우리 도가 부흥한다고 하였다는 말은 대행 대왕께서 승하하신 지 오래지 않아서 중들이 이같이 발설하는 것을 유생들이 많은 사람이 모인 데에서 들었다고 하기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상소에 아울러 적었을 뿐이며, 당초에 하문(下問)하시리라고 헤아리지 못하였으므로, 먼저 발언한 자를 기억할 수 없습니다.


임금이 아직 어려서 양전(兩殿 인수대비와 정현왕후를 말함)이 뜻대로 부처를 섬긴다는 말은 중들이 유생들이 있는 데에서 말하여, 들은 사람이 전하기에, 또한 상소에 적은 것뿐입니다.


노사신이 불경(佛經)을 해독하여 광릉(세조를 일컬음)을 그르칠 뻔하였 고, 이제 그 방법으로 전하를 우롱한다는 등의 말은 노사신이 불경을 해독하여 정도(正道)로써 세조대왕을 섬기지 못하였고, 이제 전하께서 즉위한 처음에 설재의 명이 있으되 또한 간하지 않으므로 말했을 뿐입니다.
세조대왕이 불교를 숭상하고 믿으셨으니, 부처를 섬기는 도리가 지극하였는데도 그 사이에 또한 역신(逆臣)이 난리를 일으켜 화(禍)가 생민에게 미친 일이 있었다는 등의 말은 세조께서 부처를 섬기신 도리가 매우 부지런하셨다고 할 만한데도 이시애의 무리가 난을 일으켜 화가 생민에게 미쳤으니, 참으로 불법(佛法)이 나라에 무익함을 아는 까닭에 또한 말했을 뿐이며 지금 이런 역신의 사건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목(李穆)이 먼저 노사신이 전하를 우롱하였다는 말을 발설하였고, 정희량이 먼저 세조께서 불교를 숭상하고 믿었으며 역신이 난(亂)을 선동했다는 말을 발설하였으니, 정희량은 중형에 처하여 장(杖) 1백 도(度)에 유(流) 3천 리의 형에 처하고, 이목·조유형·유희저·이자화·이윤탁·심정·이성동·유임·성운·윤원·박광영·임희재·유중익·김천령· 이광 · 이윤식· 한효원·김수경·성몽정·안만복·이광좌·안석복·김협 등은 수종(隨從)하였으므로 1등(等)을 감하여 장(杖) 1백, 도(徒) 3년에 처하게 하소서."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26일 4번째 기사)


사진 22-1  돈화문 (창덕궁의 정문이다.)

사진 22-2  진선문 (궁궐로 들어가는 문)

 

의금부의 보고를 받고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정희량·이목·이자화는 외방(外方)에 부처(付處)하고, 그 나머지 조유형 등 21인은 정거(停擧 : 한 동안 과거에 응하지 못하도록 유생에게 내리던 벌)하라."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 26일 5번째 기사)  


이에 1월27일에 의정부는 정희량을 해주(海州)로, 이목을 공주(公州)로, 이자화를 금산(金山)으로 귀양 보내고, 생원 조유형 등 21인의 과거 응시를 정지시켰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27일 3번째 기사) 1)

하지만 1월27일에 대간과 홍문관이 유생을 죄주는 것이 타당치 못함을 논계하였고, 1월28에도 직제학 표연말 등 대간과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 등 홍문관원들이 "유생은 국가를 위한 것뿐이니,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다.  

1월30일에는 병조판서 성준 · 호조판서 홍귀달 · 예조판서 성현 ·  병조참판 권건까지 나서서 유생을 풀어주기를 간청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능상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며 강경했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 30일 1번째 기사)

이어서 이조참판 안침이 유생의 불경죄를 용납하여 언로를 열어 주기를 서계하였으나 연산군은 듣지 않았고, (연산군일기 1495년 1월 30일 2번째 기사), 부제학 성세명 등 대간들이 상소하여 유생에게 죄주는 것이 불가함을 극론하였지만, 연산군은 전교하기를, "선왕(先王)께서 유생을 죄주지 않았으므로, 이렇게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습을 가져 왔다. 모든 일마다 수의(收議)한 뒤에야 처리한다면, 임금의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 1월30일 3번째 기사)

2월28일에 제천현감 권경유가 불재(佛齋)를 파하고 유생을 사면하여 주기를 바라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연산군은 이를 괘씸하게 여겼다. 2)
(연산군일기 1495년 2월28일 2번째 기사) 

이후에도 대간들은 틈나는 대로 유생들을 용서해주기를 간청했고, 5월22일에 성희안·박억년·김율·홍형이 경연에서 죄를 입은 유생들의 사면을 아뢰었다. 연산군은 처음에는 듣지 않다가, 박억년이 아뢰기를, "요즘 살펴보면, 전하께서 누구나 상소할 적에 과격한 말이 있으면 적발해서 국문하는데, 이것은 임금의 큰 허물입니다." 하자, "유생이 죄를 받은 지 오래되었으니 놓아주라." 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5월22일 1번째 기사)

연산군은 1월27일에 유생들을 죄 준 후 4개월 만에 "정거(停擧)한 유생은 과거 응시를 허용하고, 유배 보낸 유생은 그대로 정거하라."고 전교하였다.(연산군일기 1495년 5월22일 2번째 기사)

사진 22-3  성균관 명륜당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

1) 정거(停擧)된 유생 중에 임희재(1472-1504)가 들어 있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임희재는 훈구파 임사홍의 아들임에도 김종직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1495년에 정거가 풀린 뒤, 1498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2) 권경유(?∽1498)는  김종직의 제자로서 김일손과 친했다. 권경유도 사관으로서  사초(史草)에 "김종직이 일찍이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충의가 분발하여 보는 사람이 눈물을 흘렸다. 그 문장은 여사(餘事)다."라고 적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7일 7번째 기사)


나중에 권경유는 김일손과 함께 능지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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