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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연산군 시대의 송흠 행적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조선의 청백리 일곱 번이나 한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등록날짜 [ 2019년01월28일 09시02분 ]

조선의 청백리를 일곱 번이나 한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 1459∽1547)에 대한 책『청백리 송흠』을 2011년 12월에 출간한 이후 줄곧 의문을 가진 것은 연산군(재위 1494-1506) 시절의 송흠 행적이다. 1)

사진 1  관수정 (장성군 삼계면 소재)

먼저  소론의 영수 명재 윤증(1629∽1714)이 1683년에 지은  송흠의 신도비명을 보자. 2)
 
“공은 1459년에 태어나 1480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2년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 연산군의 혼조(昏朝 어두운 조정)를 당해서는 고향에 물러나 거처하며 후진을 가르치고 경적(經籍)을 강론하면서 스스로 즐겼다.   1502년 (연산군 8)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제를 마치자 남원교수(南原敎授)에 제수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뒤에는 홍문관 저작(著作), 박사(博士), 수찬(修撰), 사간원 정언ㆍ헌납, 병조 정랑, 전라 도사,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이를 보면 송흠은 연산군 시절에는 조정에서 일하지 않았고, 연산군 말년에 남원교수를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진 2  송흠 묘소 (묘비명은 윤증이 지은 것이다)

과연 그랬을까?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서 송흠을 검색했다. 그랬더니「연산군일기」에 59건이 검색되었는데  이중에서 동명이인 의관(醫官) 송흠의 기록을 제외하고 송흠의 이력을 살펴보니, 1495년 5월14일자 ‘연산군일기’에 홍문관 저작 (정8품), 1495년 9월13일에는 홍문관 박사(정7품)를 한 기록이 나온다.

“신종호를 예조 참판으로, 송흠(宋欽)을 홍문관 박사로, 권민수를 저작(著作)으로, 이자(李滋)를 정자(正字)로 임명하였다.”
(연산군일기 1495년(연산 1년) 9월13일  3번째 기사)  

또한 1496년 4월2일에는 홍문관 부수찬(종6품), 1497년 1월4일 홍문관 수찬(정 6품), 1497년 6월14일에 사간원 정언(정6품)을 하였다.

정언 송흠은 1497년 7월2일에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돌아가 봉양하기를 애걸하니 연산군은 가서 뵙고 돌아오라고 특명을 내렸다. 이어서 1497년 8월22일에 송흠이 부모봉양을 위해 사직하니, 연산군은 윤허했다.

1500년 1월12일에 대사헌 안침이 송흠은 어버이가 늙은 관계로 하여 관직을 사직하였는데 오랫동안 서임하지 않았다며 임명을 건의했다. 1500년 8월21일에 송흠은 사간원 헌납(정5품)에 임명되어 대간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504년 5월30일자 「연산군일기」에는 홍문관 부수찬 송흠의 이름이 나온다. 그는 예전에 홍문관에서 상소한 일에 연루되어 부제학 이승건, 전한 홍한, 응교 이수공, 부응교 장순손, 교리 김전과 남궁찬, 이과, 부수찬 권민수와 송흠, 저작 이자, 정자 성중엄 · 홍언충과 함께 형장 심문을 당했다. 이어서 6월10일에는 송흠·홍언충·이과는 장 1백에 처해졌다. 3)

1506년 8월26일에 연산군은 “이과·김전·권민수·송흠·홍언충·정광필·이자화·김양진·박광영·박소영·유보·김내문·이사균·강홍·최숙생·이행 등은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압송해다가 형신(刑訊)하고, 또 그 자손도 익명서(匿名書)를 투입했는지 의심스러우니 아울러 형신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그런데 1506년 9월2일에 중종반정이 일어났고, 중종반정에 일어난 지 18일 되는 9월20일에 송흠은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

요컨대 송흠이 연산군 조정에서 일했음이 확인되었다. 다음 회부터 연산군 시대의 송흠의 행적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중중 조 명신 송흠」의 기록이 있다.

“송흠은,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知止堂)이요, 본관은 신평(新平)이다. 기묘년에 태어나서 경자년에 사마시에 뽑혔고, 성종 임자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판중추에 이르렀다. 기사에 들고 청백리로 뽑혔다. 시호는 효헌공(孝憲公)이고 나이 90세에 죽었다.

청백하고 검소하고 벼슬에 욕심이 없음이 조원기(趙元紀)와 같았고, 여러 번 1품 품계에 올랐다.

공이 매양 지방에 수령으로 부임할 때에 신영(新迎)하는 말(馬)이 겨우 세 필 밖에 안 되었다. 공이 타는 말이 한 필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각각 한 필씩 탔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삼마태수(三馬太守)’라고 불렀다. 여산 군수(礪山郡守)가 되었을 때, 고을이 큰 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호산춘(壺山春)’이라 했다. 〈행장〉”

2) 송흠의 7대손 송명현은 스승 윤증에게 신도비명을 부탁했다.

3) 1504년 10월25일에는 공렴(公廉)한 간관(諫官), 금남 최부가   갑자사화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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