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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연산군 시대의 송흠 행적 (5)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이와 같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
등록날짜 [ 2019년03월26일 18시23분 ]

송흠은 1496년(연산군 2년) 4월에 송흠은 홍문관 부수찬, 1497년 1월4일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이어서 1497년 6월14일에는 사간원 정언(정6품)이 되었다.


줄곧 홍문관에서 근무하다가 사간원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런데 6월27일 밤 이경(二更 밤 9시에서 11시 사이)에 창덕궁 선정전 기둥에 벼락이 쳤다.


다음날 연산군은 벼락 친 일로 희정당에 납시어 재상 및 의정부·육조·한성부·대간·홍문관을 인견하여 의견을 들었다. 윤필상, 노사신, 좌의정 어세겸, 우의정 한치형, 좌찬성 이극돈, 대사헌, 대사간 등 참석자들은 각자 의견을 말하였다. 이 자리에서 사간원 정언 송흠도 말했다.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국가에 장차 도를 잃어 패망하게 되는 일이 있으려면 하늘에서 먼저 천재와 시변을 내리어 꾸짖고 경고하는 것인데, 그래도 변통할 줄을 모르면 손상과 패망이 따라오게 된다.’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후로 경연에 납시지 않고 간하는 말을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박이 철 아닌데 내리고 별빛이 도수를 잃었으니 하늘의 꾸짖어 경고함이 현저한 것이 아닙니까. 지금도 신 등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손상과 패망이 오고야 말 것입니다."


1497년 7월2일에 송흠은 어버이가 늙어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했다.
연산군은 허락하였다. 8월22일에 송흠은 모친의 병환이 심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민생안정과 파직 당한 정언 조순의 복직에 대하여도 아뢰었다. 연산군은 사직을 윤허하였다. (연산군일기 1497년 8월22일 4번째 기사)


이로부터 2년 6개월이 지난 1500년 1월12일에 대사헌 안침이 송흠은 어버이가 늙은 관계로 하여 관직을 사직하였는데 오랫동안 서임하지 않았다며 임명을 건의했으나 연산군은 살피지 않았다.


연산군은 8월21일에야 송흠을 사간원 헌납(정5품)으로 임명하였다.
1500년 9월21일에 연산군이 경연에 납시자, 장령 신숙근과 헌납 송흠이 윤탕로·이종호·임사홍의 일과 장성(長城) 쌓는 일을 논계하였으나, 연산군은 들어주지 않았다. 1) 한편 1504년에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친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약을 마신데 대한 연산군의 복수극이었다. 3월20일에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엄씨와 정씨를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3월30일에는 이세좌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윤4월13일에는 윤필상에게 사약을 내렸다.


윤4월21일에는 정창손 · 심회 · 한명회를 부관 참시했다.
5월11일에는 한명회의 해골을 효수하고 5월13일에는 이세좌의 아들들을 효수했다. 피바람이 불었다. 이어서 5월30일에 연산군은 궁중의 일을 함부로 짐작하여 간한 자를 아뢰라고 전교했다.
 

"말은 짐작 없이 함부로 할 수 없어, 말하여 될 일도 있고 말해서 안 될 일도 있는 것이니, 가깝고 친밀한 곳에 있으면서 궁중의 일을 보고 그 그른 줄을 알더라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어찌 숨길 것이냐. 그때 후원에서 활쏘기를 구경하는데, 마치 집돼지가 달려가기 때문에 우연히 쏜 것이다. 이것을 보았더라도 마음으로나 알고 말이지, 어찌 입 밖에 내야 하는가. 그때의 홍문관 상소를 급히 상고하여 아뢰라. 홍식(洪湜)은 아직 형벌하지 말고, 홍문관원 상고하기를 기다려 죄주도록 하라."


유순(柳洵) 등이 홍문관에서 상소했던 사람의 명단을 연산군에게 아뢰었다.
이들은 홍문관 부제학 이승건, 전한 홍한, 응교 이수공, 부응교 장순손, 교리 김전과 남궁찬, 이과, 부수찬 권민수와 송흠, 저작 이자, 정자 성중엄과 홍언충이었다.


이러자 연산군은 "외방에 있는 자는 잡아오고, 서울에 있는 자는 빈청(賓廳)으로 잡아다 국문하되, 만일 실지대로 진술하지 않으면 형장 심문하라."고 전교하였다. 2) 6월1일에 연산군은 "홍식과 홍세필 부자는 참형(斬刑)에 처하고, 이승건·홍한 등은 부관능지(剖棺凌遲)하라. 그 나머지는 장(杖) 1백으로 결단하여 원방(遠方)으로 부처(付處 귀양살이)하라.”고 전교했다.


이어서 죄인의 행형(行刑 형벌 집행) · 결장(決杖 장형 杖刑을 때림) 때에는 승지가 가서 임석(臨席)하라고 명했다. 연산군의 이런 어명은 이승건 등이 홍문관에 있었을 적에 화살에 맞은 돼지가 후원(後苑)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보고 이를 간하였으며, 홍세필이 또한 이를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일기 1504년 6월1일 7번째기사)


이리하여 6월10일에 연산군은 승지 박열·권균에게 결장(決杖)을 감시하도록 명하여 송흠·홍언충·이과에게 장 1백 대, 심순문· 조세보에게 장 80대를 때렸다. (연산군일기 1504년 6월10일 4번째 기사)


이로부터 2년이 지난 1506년 8월26일에 연산군은 “이과·김전·권민수·송흠·홍언충·정광필·이자화·김양진·박광영·박소영·유보·김내문·이사균·강홍·최숙생·이행 등은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사람을 보내어 압송해 다가 형신(刑訊)하고, 또 그 자손도 익명서(匿名書)를 투입했는지 의심스러우니 아울러 형신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그런데 1506년 9월2일에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9월20일에 송흠은 사헌부 지평(정5품)에 제수되었다. 1) 1500년 9월21일 이후 송흠의 관직은 <연산군일기>에 없다.


그런데 『지지당 유고』의 ‘송흠 연보’에는 1501년 병조정랑, 전라도사, 1502년 부친상을 당하여 1504년에 상복을 벗고 남원교수에 제수, 1506년 중종반정 후 홍문관 저작에 임명이라고 적혀 있다. (『지지당 유고』 p 9-10) 따라서 『지지당 유고』는 <연산군 일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다.


2) 이 일은 1496년 4월에서 1497년 1월4일 사이에 일어났다. (송흠은 1496년 4월에 홍문관 부수찬, 1497년 1월4일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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