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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기행>전남대 문화재협동과정 석박사, 영광군 문화탐방

영광 4대 성지라기 보다 5대 성지라는 주장...수은 강항선생의 왜국의 유교전파로
등록날짜 [ 2019년04월14일 11시29분 ]
지난 주 전남대학교 문화재협동과정 석, 박사 문화재콘텐츠개발 수업에서 고흥지역 설화현장을 방문하자는 의견과 후발 의견으로 수은 강항선생의 얼이 깃들어 있는 영광지역을 탐사해 보자는 의견으로 분분하다가 거수 투표에 의해 영광지역이 최종 선정되었으나 그만큼 심적 부담은 가중되었다.

드디어 11일 날이 밝아 전남대학교 문화재협동과정 석, 박사과정(인솔 김용의 교수) 12명이 내산서원과 영광군지역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찾아 탐사(探査)를 시작했다.

이들 일행은 9시에 조선시대 성군(聖君) 세종대왕과 동서지간인 완역재(玩易齋) 강석덕(대민공)1)
이하 4대인물(강귀손, 강학손, 강희맹, 강희안)이 배향된 이흥서원을 찾아 강도원 별유사2)로부터 유서(由緖) 깊은 이흥서원에 대한 안내를 들었다.

또,지근거리에 있는 내산서원에 들러 강재원 영광내산서원보존회장으로부터 수은강항선생의 유물전시관을 둘러보며 선비정신의 표상(表象)인 강항이 조선선비로 왜국에 포로가 되어 극적으로 유교를 전파한 기막힌 역사를 접했다.

이어 천년고찰 불갑사를 찾아 전문 안내인의 소개로 불갑사만이 갖고 있으며 타 사찰과의 색다른 특이점(特異點) 등 범인(凡人)으로 미처 알지 못하고 불갑사만이 품고 있는 숨겨진 속살까지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웅장하면서도 위압감을 주는 사천왕상상은 원래 고창 연기사에 모셔져 있었지만 진흥왕 1년(540)부터 35년(574)까지 연기조사 만든 것으로, 조선 고종 7년(1870)에 설두대사가 나무배 4척을 동원하여 현재의 사찰인 불갑사로 옮겨왔다는 설명이 새롭게 다가왔다. 

일행들은 수은강항의 천재성이 덧보이는 맹자(孟子)정비를 보자마자 원래 맹자정비가 있었던 곳조차 더 둘러볼 시간도 없이 차에 올라 3km 떨어진 곳 논잠포(구명 서포)에 다다른다.

선생이 끌려간 논잠포는 그 옛날 조기잡이 배로 넘실거렸음에도 영광군 문화관광 차원의 안내판마저 없이 ‘수은강항선생 섭란사적비’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어 일행들은 눈으로 확인하고도 오랜 간척사업으로 믿기지 않은 역사를 뒤로 한 체 다시 한 번 마음으로만 그 당시를 그리며 잠시 회상(回想)에 젖기도 했다.

항상 문화든 음식이든 고프다!!
영광군에서 자랑할 만한 00한정식당에서 당연한 정식 세 상을 두 상으로 극적으로 줄여 놓고 태연하게 자리하고서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차린 음식으로 맛의 고장임을 확인하고 문화와 역사를 채우고 주린 배도 채워 넣는다.

늦은 오찬시간 덕분으로 다행히도 다들 잘 먹었노라고 형식적으로나마 흡족해 하는 듯 하고 이후 시간에 쫒겨 오후 일정은 흡사 준마(駿馬)가 전쟁터에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듯 바삐 내달렸다.

그렇지만 놓칠 수 없는 이 지역 인물의 세계화가 마침내 5대 종교로 승화된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朴重彬) 거사(居士)3)를 놓칠 수가 없었다. 만고일월(萬古一月)과 대각터, 대각을 품은 옥녀(玉女)봉, ‘무지개를 쫒는 소년’이라는 동화(童話)책도 생생하고, 이 지역 위대한 인물로 대(代)를 이은 엄연한 팩트 등등 ...

이처럼 갖은 역사를 품은 지나치기가 너무도 아쉬운 구수 산을 뒤로만 두고 승합차는 전국 팔경(八景)에 버금가는 백수해안도로를 접어든다.

‘썰물이어도 좋아라!!’고 말하는 탄성(歎聲)과 함께 저기 멀리 손에 잡힐 듯 마라난타혜존비가 ‘내가 이 땅에 불심(佛心)을 심었노라’고 최초를 내세우며 반기며 손짓해 왔다.

끔찍한 정유재란의 참화(慘禍)!! 1597년 정유재란 당시로 되돌아가는 곳을 금 새 스치고 지나간다. 이곳은 동래, 진주정씨 가문 열부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정유재란 때 사대부(士大夫) 부인(夫人)들이 왜군(倭軍)으로부터 수모를 면하기 위해 막다른 바다를 바라보고 절망감(絶望感)으로 서해바다에 투신 순절 했던 곳이다.

그 부인(夫人)들의 순결만큼이나 반어법(反語法)적 표현을 굳이 빌자면 주변의 경관(景觀)과 서해낙조(落照)는 매우 빼어나고 아름답다. 하염없이 슬픔을 가눌 수 없음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자꾸만 펼쳐지는 해안선은 미세먼지가 쌓이고 쌓여 농무(濃霧)로 내려 앉아 나름 장관(壯觀)을 이루고 보이지 않는 일곱 개의 섬, 칠산 섬은 칠산 바다의 영화 ‘마파도’도 감추듯 숨죽여 수줍게 가리고 만다.

도참(圖讖)설이 존재하는 영광군 백수의 지명
대한민국 팔도(八道)가 영광지역에 다 펼쳐 놓은 듯 영광읍에서 백수읍(백(白)자에 봉우리 수(岫)자를 쓰는 영광 백수의 지명은 해발 351m 구수산에서 유래됐다.

구수산 봉우리 수는 일백(百)에서 하나가 모자란 아흔 아홉 개로 부족한 부분이 아쉬워 일백 백자 대신 흰 백자를 사용한 이 같은 지명이 유래 됐다고 전함)으로 들어 오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지명 하나가 먼저 손짓하며 반긴다.

지명(地名)이 범상치 않은 논산리이다, 이어서 중앙교를 거쳐 대전리와 그 너머 4~5km에 드디어 수도(首都) 한성(漢城)리가 손짓하며 우리 일행을 반기며 다가 왔다.

그러는 사이 또 다시 지근거리에 왠지 숙연해 지는 곳이 있다. 우리네 삶이 뭣이던가?! 나 아닌 그 시대의 그의 입장에서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느껴 보려고 잠시라도 노력을 해봤는가?? 어쩌면 그게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하는 참이고 진실 됨이 아니겠는가??

그런 상념(想念)에 잠길 무렵 바로 그곳이 성큼 다가왔다!! 영광군 염산면 설도항. 당시 염산교회 교인 77명 기독교인들이 돌멩이에 묶여 무참하게 수장된 한국전쟁의 비극의 장소이다.

지금은 명암(明暗)이 갈려 어두운 역사터에 설도 젓갈 타운과 수산물 회센터, 각종 회집 등으로 넘쳐나고 매주 토요일이면 온갖 공연(公演)으로 넘치고 풍요로움이 가득한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또, 이미 시간에 쫒겨 영광읍에서 못 보고 왔지만 1937년 10월경에 설립된 신유박해와 병인년 박해로 6명의 순교자가 잠들어 있는 영광성당도 존재하고 있다.
 
유교(儒敎)를 왜(倭)에 전파한 지성(至聖)수은 강항
그런 연유(緣由)로 영광을 4대 종교(宗敎) 성지(聖地)라고 말하나 어쩌면 수은 강항의 왜국에 유교(儒敎)의 전파(傳播)로 인해 일본 유교의 비조(鼻祖)가 된 까닭으로 유학(儒學)과 유복(儒服)인 심의(深衣)를 왜국에 전파한 지성(至聖)인으로서 어쩌면 5대 성지(聖地)로 더 깊게 연구해 보고 싶다.

이제 왼쪽으로 가면 광주로 직행해 수 십 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데도 일행 중 한사람의 우직함이 작용해 가는 게 어쩜 미련(?)스럽기 까지 하다. 결국 영광군의 랜드마크 칠산 타워와 칠산 대교로 차가 움직여간다.

아스팔트임에도 때론 차가 덜컹거리며 가속도가 붙으며 차내 불만을 대신한다. 거의 수면부족과 피곤함으로 참여한 일행들은 오수(午睡)에 졸고 3시가 넘어서야 드디어 광주가 보인다.

마침내 인솔한 김용의 교수는 종(終)을 말하며 오늘 역사탐방의 소중함을 거듭 강조하면서 의미 있는 하루임을 되새김해 크고 작은 소란과 불만을 잠재웠다.


<편집자 주>
1) 태종 초에 음사(蔭仕)로 계성전직(啓聖殿直)이 되었으며, 공조좌랑으로 재직 중이던 1416(태종 16)천추사(千秋使)가 가지고 간 무역품 중에서 공조가 납품한 은이 가짜로 판명됨에 따라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세종 초에 지양근군사(知楊根郡事)로 발탁되어 선정을 베풀면서 인수부소윤(仁壽府少尹)승진되어 집의를 역임하였고, 일시 면직되었다가 1441(세종 23) 우부승지로 복직되었다.그 뒤 좌부승지와 좌승지를 역임하고, 1444년에 호조참판으로 승진, 이듬해에 대사헌, 1446년에는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가 되어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의 국상에 참여하였다. 1447년 개성부유수로 출사했다가 1449년 중추원사로 입조하였고, 1450(문종 1) 동지중추원사, 이어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55(세조 1)에는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으로 책록되면서 가자(加資)되었다.일생 동안 학문에 힘쓰고 청렴강개하였으며, 효우(孝友)가 지극하여 명망이 높았다. 시호는 대민(戴敏).저서로는 완역재집(玩易齋集)이 남아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강석덕 [姜碩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강회백 [姜淮伯]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

2)조선 시대 서울이나 지방에서 호적이나 기타 공공 사무를 맡아보던 사역(使役)의 하나.

3)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처화(處化), 호는 소태산(少太山). 원불교에서는 대종사(大宗師)라고 부른다. 189155일 전라남도 영광군 백수면 길용리영촌(永村)에서 아버지 박성삼(朴成三)과 어머니 유정천(劉定天)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부터 영민하고 범상하지 않았으며 신의가 있고 탐구적인 소년이었다. 박중빈은 7세 때에 청명한 하늘을 보고 우주·자연 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인간의 생사와 존재문제까지 확장시켜 나갔다.11세 때 시향제(時享祭)에 참여하였다가 산신의 권능에 대해 듣고,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대상으로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마당바위에서 4년 동안 산상기도를 올렸다.15세 때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의 양하운(梁夏雲)과 혼인하고, 이듬해 정월에 신년 인사차 처가에 갔다가 고대소설 조웅전 趙雄傳등에 나오는 도사 이야기를 듣고, 도사를 만나기 위하여 20세까지 정성을 다하였다.

20세에 구도행각의 후원자였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구도의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마음 깊이 자리잡은 숱한 의문들은 장차 이 일을 어찌할꼬하는 한 가지 생각으로 뭉쳤다. 25세 때부터는 이 생각마저 잊고 모든 것을 떠나 삼매의 경지로 가는 일체 돈망(頓忘)의 대정(大定)들었다가, 26세 되던 1916428일 새벽에 대각(大覺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원불교에서는 이날을 개교일(開敎日)’로 정하고 있다. 그는 대각의 안목으로 당시의 사회현상과 인류의 장래를 관조한 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내걸고, 물질문명에 끌려가는 인류의 정신구원을 위한 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교단창립과 사회개혁의 첫 사업으로 그를 따르는 아홉 제자와 함께 1917년 저축조합을 만들어

허례폐지·미신타파·금주금연·근검저축 운동을 펼쳤다. 거기서 모아진 자금으로 1918년에 간척사업에 착수하였다.<중략>그는 교단 창업의 기본계획을 361대로 잡고 이를 다시 12년씩 3회로 나누어, 1회는 경제기반확립, 2회는 교서정비, 3회는 인재양성에 역점을 두었다.일제 말기에 불법연구회가 민족단체로 지목받아 극심한 탄압 속에서 교단 존폐위기에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자신의 죽음으로 그 위기를 넘게 하는 계기를 삼도록 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박중빈 [朴重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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