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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수은 강항과 일본유교전파에 따른 역사적 고찰과 민간외교4

강항휘초 16종 21책 전수되어 오고 있는데 일본의 동경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 소장!!
등록날짜 [ 2019년05월13일 10시33분 ]

◇ 강항의 국내 제자들

趙光祖(靜庵, 1482~1519)가 道學의 뿌리를 확고하게 내린 이후,
경기도 개성에서는 徐敬德(花潭, 1489~1546)이,
파주에서는 成渾(牛溪, 1535~1598)이,
황해도 해주에서는 李珥(栗谷, 1536~1584)가,
영남 동쪽에서는 李彦迪(晦齋, 1491~1553)이,
영남 북쪽에서는 李滉(退溪, 1501~1570)이, 영남 남쪽에서는 曺植(南冥, 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여 도학을 전수
하였다.

호남에서도
북쪽에서는 李恒(一齋, 1499~1576)이,
남쪽에서는 金麟厚(河西, 1510~1560)와 奇大升(高峰, 1527~1572) 등
이 독특한 학풍을 내세워 영향력을 발휘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이항·김인후·기대승 사후에도 17세기 초, 중반에 도학을 강론하여 제자들을 양성한 一群의 유학자들이 호남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예컨대 담양 대산의 金大器(晩德, 1557~1631), 영광 유봉의 姜沆(睡隱, 1567~1618), 임실 덕촌의 趙平(雲壑, 1569~1647), 보성 우산의 安邦俊(隱峯, 1573~1654)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호남의 유학이 기축옥사와 임진·정유왜란을 거치면서 점차 학문적 기반이 약화되고, 더구나 17세기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학인들이 경기와 호서지역으로 유학을 떠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강학의 촛불을 끄지 않았다.

강항은 영광군 남쪽 불갑산 아래 유봉리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가까운 雲堤 마을로 이사했는데, 관직생활과 포로생활을 뺀 나머지 생애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강학하였다.

그는 팔대(八代) 문헌가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이미 뛰어난 문장 실력과 해박한 역사 지식을 인정받았고, 3년여의 포로생활 중에 보여준 탁월한 氣節은 일본인도 존경할 정도였다.

강항의 수제자 尹舜擧는 스승의 학행을 挽詩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아름답고 밝은 문장은 지금의 屈原이요, 추상같은 높은 절개는 옛날의 蘇武로다.”
그는 포로생활에서 탈출하여 귀국한 이후에도 죄인으로 자처하고 벼슬을 멀리한 채 스스로 불갑산에 갇혔다. 강항은 찾아주는 詩友들과 담론하는 한편 그의 문장과 기절을 흠모하여 찾아온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52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강항은 17세기 초반에 호남 유학을 이끈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간 강항에 대한 연구는 주로 시문학과 『看羊錄』, 일본에 유학전수 등 몇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으나, 아직까지 교사로서의 강학활동은 깊이 있게 탐색되지 못하였다.

필자는 강항에 대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연구가 진행되려면,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들, 교유한 친구들,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 관련 유적과 유물들까지, 그 학문적 연관성을 폭넓게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발표는 이러한 관심 하에 강항의 제자들에 관한 기초적인 정보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중략>

과거 합격의 숫자로 보면, 소과에 응시하여 생원·진사에 오른 제자들이 20여 명이고, 대과에 급제한 제자들도 7, 8명 되며, 관직에 진출하여 고위직에 오른 제자도 적지 않다. 문집을 내지는 못했지만 관료로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박안제·박안효 형제와 신응망, 임련과 임담 형제는 향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할 것이다.

  문집의 유무로 보면, 현재까지 약 9명의 제자들이 남긴 9종의 유고가 간행되었다. 고부민의  『灘陰稿』, 나해륜의 『松島遺蹟』, 나해봉의 『南磵集』, 신천익의 『素隱遺稿』, 양만용의 『梧齋集』, 오희도의 『明谷遺稿』, 윤순거의 『童土集』, 이율의 『五休堂遺稿』, 정제원의 『醉愚堂集』은 앞으로 강항과 그 제자들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http://www.edaynews.com/detail.php?number=28500&thread=01r04
<안동교 박사의 睡隱 姜沆의 강학활동과 제자양성 참조>



7. 스승 강항과 후지하라 세이카
  후지하라세이카는 본래 이름 있는 승려계급의 중(僧)이었다. 그가 강항의 영향을 받아 당당히 승복을 벗어 던지고 조선의 선비복인 유복(儒服)으로 갈아입은 것은 놀라운 변신이자 일본의 당시 사상계가 큰 변화를 맞는 계기가 된다.

조선의 선비인 최익현은 ‘내목은 자를 수는 있어도 상투는 자를 수 없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혁명적인 당대의 최고의 사건인 것이다.

후지와라세이카가 강항의 뛰어난 유교철학의 영향을 받아 당당히 승복을 벗어 던지고 조선의 선비복인 유복(儒服)으로 갈아입은 것은 열도에서 놀라운 변신이자 일본의 당시 사상계가 큰 변화로 이러한 사건은 강항(姜沆)의 인격과 학식에 감명을 받고 그의 저서 역대명의전(歷代名醫傳)의 서문(序文)과 문장달덕록강령(文章達德錄綱領)의 서문도 강항(姜沆)에게서 받는 등 여러 가지 사례에서 면밀히 살펴 볼 수가 있다.

특히 오경(五經)의 발문(跋文), 유진본 사서오경(柚珍本四書五經)의 발문도 강항(姜沆)이 썼던 것이다.

일본의 동경대학(東京大學) 교수인 아베요시오(阿部吉推)의 저서「일본주자학과 조선」(日本朱子學과 朝鮮: 1966 발행)에서

◇ 후지하라세이카의 변신에 대해
첫째, 적송광통과 강항의 지원에 의해 신주(新注)에 의한 사서오경(四書五經)의 훈점본(訓點本)을 간행할 수 있었다는 점과

둘째로는 강항의 지도를 받아 적송광통의 집에서 공자제(孔子祭)의 의식(儀式)을 배웠다는 점,

셋째는 강항의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처음으로 심의도복(深依道服)을 입고 도구가와 이에야스 앞에 나타나 도구가와 측근의 학승(學僧)들과 유불논쟁(儒佛論爭)을 행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와 같이 후지하라세이카는 당시의 일본지식풍이 불교사상으로 흐르고 있었던 시대에 분연히 일어나 선승(禪僧)의 신분에서 유자(儒者)로 변신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신유학 창도자로, 또는 비조(鼻祖)로 자리 잡게 되었다.

후지하라 세이카가 일본유학의 창도자가 된 것은 직접적인 영향으로는 적송광통의 재정적인 후원과 지원에 있었고, 정신적 학문적으로는 강항(姜沆)에 의해 힘입은 바라 할 것이다.

그런데 더 큰 영향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도자기기술과 함께 인쇄술의 보급을 들 수 있으며 나아가 그들은 많은 서적을 가지고 갔다는 사실에서도 이 전쟁의 영향으로부터 일본의 모든 분야가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라 보게 된 것이다.

흔히들 지적되고 있는바와 같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해 왜적들은 많은 포로를 잡아 갔었다. 그중에 도자기 기술을 가진 사람들은 그 곳에서 도자기를 만들게 하여 그것을 구라파로 수출, 일본경제의 황금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인쇄술의 보급은 각종 서적을 대량 보급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어 일본 학계와 사상계에 새로운 학문이 중흥하기에 이르렀다.

사가(史家)들은 이를 일러, 도자기 전쟁, 인쇄술 전쟁, 노예전쟁이라고 일컫기까지 하지만 강항에 의한 유교 즉 주자학의 전파로 인해 일본에 문화혁명을 일으키게 한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

◇ 강항(姜沆) 왜에 남긴 학문의 세계
강항(姜沆)이 직접 간접으로 참여 했거나 대화를 통해 감긴 영향을 낱낱이 열거할 수 없지만, 여러 곳의 문헌을 통해 지금까지 뚜렷하게 전해진 내용을 간추려 보면서 강항이 일본의 사상계에 끼친 영향을 짐작해 보도록 하겠다.

○주역전의(周易傳義)의 훈점(訓點)
당시 일본학계에서는 주역전의를 읽는데 길잡이가 된 훈점(訓点)본이 없었다. 그런데 후지하라세이카는 강항(姜沆)을 만난 이후 이론 최초의 신주훈점본(新註訓点本)을 공개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것이 강항(姜沆)의 직접적인 지도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우연하게도 강항(姜沆)의 오경발문(五經跋文)이 쓰여진 때와 그 시기가 같은 시절이기 때문에 이를 강항(姜沆)의 지도로 보는 것이다.

○수진본 사서오경발(柚珍本四書五經跋)
사서오경은 바로 유학(儒學)의 핵심사상이 담긴 경서이다. 이것을 쉽게 읽도록 새롭게 간행한 이 책의 발문을 강항이 써주었다. 물론 이 책의 간행은 후지하라세이카의 학문적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직접 간접으로 강항(姜沆)의 사서오경의 발문으로 인해 영향을 받았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일본 학계는 유학의 사상이 널리 보급되었고 공자, 맹자에 이어 주자학이 정립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강항이 발문한 사서오경이 지금 중국의 원문인 사서오경과 비교했을 때 한 획도 틀리지 않음을 일본학계에서 대 놓고 증명하기도 했다.

○곡예전경식어(曲禮全經識語)
곡예에 대해 식어(識語)를 써 주었다는 것은 이 책에 대해 해제(解題)와 함께 주(注)를 담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찬한 것이다. 이외에도 소학식어(小學識語), 통감식어(通鑑識語), 정몽식어(正蒙識語) 등 각종 서적에 강항은 식어(識語)를 써 주었다.

그밖에 각종 서적의 간행에 서문과 발문(跋文)을 써준 강항(姜沆)은 그 글에서 후지하라세이카의 인물, 학문의 경지, 지조 등에 대해 평하고 중국의 사상내용을 적었는데 지금 읽어보아도 명문이요 역작(力作)이었다는 사실을 일본학자들은 지적하고 있다.

◇ 강항(姜沆)의 필담(筆談)
당시 강항(姜沆)은 포로의 몸이요, 일본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후지하라 세이카와는 필담(筆談)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필담내용이 지금도 일본에 보관되어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중국 유학사상(당시는 송학(宋學)이라 하였다.)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송유(宋儒)에 대한 이야기와 공자 맹자의 성학(聖學)에 대해 서로 말하였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후지하라세이카는 이 필담에서 倭國(왜국) 무인(武人)들의 비속하고 폭력적인 행패에 조심해야 한다는 注意(주의)도 促求(촉구)하고 있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 交流(교류)가 얼마나 따뜻하고 서로 신뢰하였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까지 일본에 전해지고 있는 강항(姜沆)의 필사본(筆寫本)은 강항휘초로 16종 21책이 전수되어 오고 있는데 일본의 동경 국립공문서관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 있다. 이중 애석하게도 예기(禮記) 1책의 목차가 분실되고 없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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