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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이순신의 올바른 이해 4〕명량해전의 진실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이순신 장군 왜군과 백병전 치르지 않았고, 거제현령 안위가 백병전으로 맞 서
등록날짜 [ 2019년05월27일 10시39분 ]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탄 대장선이 왜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9월16일자 『난중일기』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왜군과 백병전을 치르지 않았고, 거제현령 안위가 백병전을 치렀다.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9월16일 맑다 이른 아침에 특별정찰부대가 와서 보고하기를 “수효를 셀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으로부터 곧바로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을 향해 달려옵니다.” 하였다.

곧 모든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갔더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둘러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형세임을 알고 모두 도망칠 꾀만 내고 있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벌써 2마장(4-6KM) 밖에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빨리 저어 앞으로 나아가며 지자(地字), 현자(玄字) 등 각종 총통을 마구 쏘았다. 탄환이 폭풍우같이 날아갔다. 군관들도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자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쳐들어왔다 물러갔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 배가 여러 겹으로 둘러싸여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어, 배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기를 “적선이 비록 많다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하지 못할 것이니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해서 적을 쏘아 맞혀라”하였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이미 1마장 정도 물러났고,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하였다. (중략) 호각을 불어 중군에게 기를 세워 군령을 내리도록 하고 또 초요기를 세웠더니, 중군장인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안위의 배가 그보다 먼저 왔다.

그리하여 두 배가 적진을 향해 앞서 나가는데, 적장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3척에 지시하자 일시에 안위의 배에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하였다. 안위의 격군 7∼8명이 물에 뛰어들어 헤엄을 치니 거의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안위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죽을힘을 다해서 몽둥이를 들거나 긴 창을 잡거나 또는 돌멩이를 가지고 마구 후려쳤다. 배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자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쫒아가서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세 척이 거의 뒤집혔을 때 녹도만호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뒤쫓아 와서 서로 힘을 합쳐서 왜적 한 놈도 살아남지 못하게 하였다. (중략) 이렇듯 안위의 배는 왜선 3척에 둘러싸여 백병전을 했다.

이윽고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 함대는 안위의 배를 구하였고 왜선 3척을 격침시켰다. 적선 31척을 쳐부수자 적선들은 후퇴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했다. 우리 수군이 싸움하던 바다에 정박하고 싶었지만 물살이 험하고 바람도 역풍으로 불어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참으로 천행(天幸)이었다. 한편 영화 ‘명량’에는 경상우수사 배설이 명량해전 직전에 거북선을 불태운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 근거한 듯 보인다. “8월18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라고는 단지 10척 뿐이었다.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서 군사의 위세를 돋우도록 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명량해전을 전후하여 이순신 휘하에 종군한 사실이 없다. 따라서 이분의 글은 신뢰성이 떨어진다.

또한 9월8일자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은 김억추를 불신했다. 9월8일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우수사 김억추는 겨우 만호에만 적합하고 장수를 맡길 수 없는데, 좌의정 김응남이 서로 친밀한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임명하여 보냈다.

더욱이나 거북선을 8월18일 이후 한 달 안에 만드는 일이 가능했을지도 의문이다. 이순신은 왜군들이 추격해오자 진영을 수차례 옮겨서 장수들은 겁에 질려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북선이 건조될 수 있었을까? 또한 거북선을 만들려면 필요한 기술자와 자재와 장비가 필요한데 이 조달이 가능했을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명량해전 때 거북선은 건조되지 않았다.

1) 사진 1 명량해협 , 진도 쪽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

1) 그런데 온양온천역 광장에 세워진 ‘이충무공 사적비’에는 거북선 2척이 명량해전에 참전했다고 적혀 있다.
(비문은 1951년에 정인보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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