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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이순신의 올바른 이해 4) 명량해전의 진실 4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 강강술래와 왜군 즉시 철수설
등록날짜 [ 2019년06월17일 10시5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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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다. 이 해전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작은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린 싸움으로 비유된다. 명량해전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었다.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을 막았고, 조선수군의 재기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렇다면 조선수군의 승리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1) 전선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 (2) 이순신의 전략 전술 (3)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으로 요약된다.

 

첫 번째 승리 요인은 전선 수는 적으나 강한 함대이다. 13척이라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선함대는 막강한 화포를 갖춘 판옥선이었다. 또한 배에 장교·부사관 등 군관들이 여러 명이 탑승하여 전투능력이 최강이었다.

 

두 번째는 이순신의 뛰어난 전략 전술이다. 이순신은 명량해협이 좁아서 일본 수군 소형선만 참전할 수밖에 없음을 간파하였다. 또한 조류의 흐름을 알고 싸워서 왜선 31척을 격침시켰다.

 

셋째는 전라도 연안 백성들의 지원과 참전이다. 이순신을 따라 피난 온 전라도 연안 백성들과 해남·진도 주민들은 조선 수군에게 의복과 식량을 지원하였고 자원입대하였다. 전라도 백성들은 명량해전 당일 피난선 100여척을 전선으로 가장하고 대기하였고, 이순신이 위험하자 함께 싸우기도 하였다.

   

이런 해전이었기에 부녀자들이 군복을 입고 강강술래를 하였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있다.

 

강강술래는 해남·진도·완도 등 전남 서남해안지방에서 추석날 밤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노는 민속놀이이다.

 

2009년에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유래는 명량해전 때 이순신 장군은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차림으로 옥매산(玉埋山) 허리를 빙빙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옥매산은 해남군 문내면과 황산면의 경계에 있고, 앞 바다가 명량해전의 무대이다. 옥매산에서 내려다보면 울돌목, 벽파진, 어란진 등이 모두 보인다.

 

다른 해전과는 달리 ‘914일에 이순신의 피난 명령(난중일기)’을 받은 전라도 연안 백성들은 피난 가면서 해남과 진도의 산봉우리에서 해전을 지켜보았다. ‘이충무공 행록에 나온다.

 

이들은 처음에는 300척 이상 되는 왜선에 놀라서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조금 있다가 조선 함대가 잘 버티자 힘껏 응원을 하였고, 왜선이 격침되자 더욱 흥분하여 소리쳤으며 왜군이 물러나자 얼싸안고 환호하였다.

 

그렇다면 강강술래는 사실일 수 있다. 여인들이 피난가면서 거추장스러운 치마보다는 남복을 입었고, 환호하면서 서로 손을 잡고 술래를 돌았으리라.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부녀자들에게 남복을 입혀 빙빙 돌게 하여 군사가 많은 것처럼 위장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진 우수영 관광지 강강술래 안내판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명량해전 이후 왜군의 즉시 철수설이다.

최근까지 명량에서 패한 일본 수군은 서진을 포기하고 그들의 수군 근거지인 안골포로 즉시 물러났다는 것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1)

 

하지만 일본 수군은 곧바로 물러나지 않았다. 일본 수군은 상당기간 전라우수영을 점령하고 라 영광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일본 수군은 해남 ·무안 ·신안 ·함평 · 영광 일대 바닷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922일에 일본수군은 무안에서 군자첨정 정기수를 사로잡았다. 23일에는 일본 수군대장 도도 다카토라의 부하 신칠량은 영광출신 선비 형조 좌랑 강항을 영광 앞바다 논잠포에서 붙잡는다.

강항은 일본 시코쿠 에이메현 오즈성에 피로被虜되었다가 교토에서 적송광통(赤松広通, 아까마쓰 히로미치)에 의해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등원성와)를 만나 그에게 조선의 유교, 성리학[性理學]을 가르쳤다. 그 후 16005월에 귀국하여 문집 간양록을 남겼다.

 

또한 927일에는 함평 출신 선비 정희득이 영광 칠산 앞 바다에서 하치스카 이에마사의 수군 부장인 모리 다다무라에게 붙잡혔다. 그는 일본 시코쿠의 도쿠시마 현에 끌려갔는데 15996월말에 귀국하여 포로체험일기 월봉해상록을 남겼다.

 

한편 이순신은 103일에 법성포에 도착하여 5일간 머문 뒤 109일에 해남 우수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해남 우수영은 왜군들에 의해 초토화 되었고 왜군들이 아직도 머무르고 있었다. (109일 난중일기) 그리고 왜군은 1011일에 해남을 떠났다.

 

 

1) 이민웅, 이순신 평전, 2012, p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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