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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도학과 절의의 선비, 죽천 박광전 (4)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시민여상 (視民如傷)
등록날짜 [ 2019년08월13일 08시46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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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년에  46세의 박광전은 비로소 출사한다. 전라감사 유희춘은 박광전을 전주 경기전 참봉으로 특별 채용한 것이다. 1)

사진 1  경기전의 태조 이성계 어진

1573년에는 헌릉(태종의 능)참봉에 임명되었는데 1575년에 부친 봉양을 위해 사직하였고 부친은 1577년에 별세하였다. 

1581년(선조14년)에 박광전은 왕자사부에 제수되었다. 그는 사저에 있는 임해군(1574∽1609)과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을 가르쳤다. 임해군은 7세, 광해군은 6세였다.  

박광전은 왕자들에게 글을 정밀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도록 가르쳤다. 어느 날 선조가 왕자의 독서를 살펴보다가 “글 읽는 것만 탐닉하면 글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하게 되니, 마땅히 박사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며 죽천의 교육방법을 칭찬하였다. 
       
1583년 겨울에 죽천은 함열현감에 제수되었다. 함열현은 전북 익산시 일대이다. 그는 관저와 동헌 벽 위에 “시민여상(視民如傷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들을 대하였다. 

사진 2  시민 여상


시민여상(視民如傷)이란 중국 춘추시대에 진(陳)이 오(吳)나와 초(楚)나라 사이에서 줄다리기 외교를 한데서 나온 말로 『춘추좌전(春秋左傳)』
‘애공(哀公) 원년(BC 494)’에 나온다. 

오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했을 때 오나라 왕 부차는 사람을 보내 진나라 회공(陳懷公)을 불렀다. 이에 진회공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의논했다. 이때 대부 봉활(逢滑)이라는 신하가 오나라의 요청을 거절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자 진회공은 오나라의 후환을 걱정하자 봉활은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는 이러한 일쯤은 많이 있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회복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작은 나라도 회복하는데 하물며 큰 나라가 어찌 회복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이 듣건대, ‘나라가 흥할 때는 백성을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 대하니 이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그러나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이나 쓰레기 대하듯이 하므로 이것이 화가 되는 것입니다(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己禍也)’

초나라는 비록 덕은 없으나 백성을 베어 죽이지는 않습니다. 오나라는  백성을 전란 중에 끌고 다녀 백골이 풀 더미와 같이 널려 있으니 덕행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하늘이 초나라를 깨우칠 가르침을 내린 듯합니다. 오나라가 재앙을 입을 날이 멀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진회공은 봉활의 의견에 따랐다.

한편 BC 494년은 오나라 왕 부차가 선왕 합려의 죽음에 복수하기 위하여 2년간 와신(臥薪 :섶에서 눕다)하여 월나라 구천을 굴복시킨 해였다.

구천은 부차에게 돈과 여자를 바치는 등 애걸하여 살아남았다.

그리고 구천은 21년간 상담(嘗膽 : 쓸개를 맛보다)하여 BC 473년에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를 죽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는 이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윽고 1587년에  박광전은  회덕현감에 제수되었다. 회덕현은  대전광역시 동구 · 대덕구 일대이다. 그가 회덕현에 도착하니 왕실의 종친이 촌민과 노비 문제로 송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송사는 11명의 관원이 바뀌도록 해결되지 않고 미결로 남아 있었다.

죽천은 소송 자료와 관련 문적을 살펴보고 정상(情狀)을 살피어 촌민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그러자 왕실 종친은 죽천을 사헌부에 고발했다. 사헌부에서 조사해 보니 죽천이 제대로 일을 처리한 것이 밝혀졌다.  

또 한 번은 어떤 여자가 과부집의 종이 되었는데 족질 간에 서로 다투다가 차지하지 못한 자가 충청감사의 위세를 빙자하여 그 종을 무고하여 죽이려 하였다.

박광전이 그 원통한 정상을 보고하자 감사가 격노하여 순찰을 내려와서 죽천을 문책하였다. 그러나 박광전은 시비를 구분하여 조목조목 변론하자 감사가 부끄러워하며 승복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는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재상어사(災傷御使 재해로 손상된 농산물상황을 감정하는 어사)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어 1589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죽천 선생처럼 너무 강직하면 부러진다. 하지만 죽천 같아야 공정한 사회가 된다. 우리가 죽천에게 배우는 것은 무엇인가?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공직자이다.    

1)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경기전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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