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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호찌민 기행 (2)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중국의 똥이냐, 프랑스의 똥 냄새냐?
등록날짜 [ 2020년06월13일 10시58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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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똥이냐, 프랑스의 똥 냄새냐?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지만, 베트남 독립의 길은 멀었다. 1945년 7월에 미·영·소 3개국 정상은 포츠담 회담에서 북위 16도 이북은 중국군이, 16도 이남은 영국군이 주둔토록 하고 향후 치안이 안정되면 베트남 주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돌려준다고 결의했다. 프랑스 지배를 100년 받아온 베트남을 다시 프랑스가 통치하다니, 이게 강대국들의 논리인가? 패권인가?

1945년 8월 하순부터 북베트남에 중국군이, 남베트남에 영국군이 들어왔다. 그런데 중국군은 약탈을 일삼았고, 영국군은 감옥에 갇힌 프랑스 군인을 풀어주었다.

호찌민은 북베트남이라도 독립하기로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주둔하고 있는 중국이 큰 걸림돌이었다. 호찌민은 중국을 몰아내기 위하여 프랑스와 협상하였다. 호찌민은 프랑스에게 경제적 이익을 양보하는 대신에  프랑스 군대가 중국군을 몰아내고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해 주는 전략을 택했다.

프랑스는 중국을 몰아내는 것은 동의했지만 독립은 ‘NO’였다. 호찌민과 프랑스의 협상은 6개월이나 진행되었다. 그러나 양측은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러자 일부 강경파들은 프랑스와 당장 싸우자고 주장했다. 호찌민은 지금은 세력이 약하다면서 냉정을 호소했다.

“중국이 주둔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요? 중국은 우리나라를 1천 년 간 지배했소. 하지만 프랑스는 잠깐 있다가 떠날 것이요. 평생 중국인의 똥을 먹는 것보다 프랑스인의 똥 냄새를 잠시 맡는 게 낫소.”

1946년 3월 6일에 호찌민은 프랑스와 합의했다. 호찌민은 ‘독립’이라는 문구를 포기하는 대신 ‘베트남의 자치원칙을 프랑스가 인정할 것’이라는 조항을 넣은 것에 만족해야 했고, 북베트남에서 프랑스군의 주둔을 허용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

다음 날 아침에 합의 소식이 신문에 실리자, 일부 시민들은 분노했다. 심지어 호찌민을 반역자라고 불렀다. 사태가 심각하자, 당 지도부는 성난 군중 설득에 나섰다. 국방장관 지압이 합의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나서 호찌민이 연설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강대국 중 어느 나라도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와의 합의는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입지를 강화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합의서대로 1만 5천 명의 프랑스군이 5년간 주둔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입니다. 5년 안에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데 왜 100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합니까? 우리는 냉정을 유지하고 단결을 강화해야 합니다.”

연설 끝에 호찌민은 단호한 어조로 베트남 국민에게 약속했다. “나 호찌민은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여러분과 함께 싸워 왔습니다. 나는 조국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 인도차이나 전쟁


1946년 11월20일에 프랑스 순양함이 하이퐁 항에 포격을 가했다. 12월17일에 프랑스는 하노이를 공격했다. 12월20일에 호치민은 ‘전 국민에 항전을 호소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하고 프랑스와 전쟁에 나섰다.

1947년 10월 7일에 프랑스는 베트남 본부 비엣 박을 공격하여 호찌민 체포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피신한 호찌민은 산악에서 게릴라전을 계속했다.

이런 와중에 1950년 한국전쟁(6.25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프랑스를 전폭 지원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고전했다. 호찌민은 1953년에 단행된 토지개혁으로 농민의 신뢰를 얻었고, 베트남 중부와 북부지방 대부분을 장악했다. 민심이 전쟁을 좌우했다. 마침내 1954년 5월 6일에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 요새를 공격하여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 베트남 분단

디엔비엔푸의 프랑스군 요새가 함락된 이튿날인 5월8일부터 스위스 제네바에서 프랑스·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정부 대표들 간에 협상이 열렸다. 북베트남 대표로 참석한 팜 반 동은 완전 독립을 주장했지만,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프랑스는 비록 전쟁에서 졌으나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았고, 미국과 영국도 베트남이 공산국가가 되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았다.

제네바 협상의 핵심 쟁점은 베트남의 분할과 총선이었다. 프랑스는 북위18도 선 분할과 총선 무기 연기를 주장했고, 미국과 영국은 17도 선을, 호찌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은 13도선 분할과 6개월 내 총선 실시를 요구했다.

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그러자 프랑스는 7월20일을 협상 데드라인으로 선언했다.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1953년 7월에 끝난 한국전쟁으로 상당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베트남 문제가 적당히 봉합되길 원했다. 호찌민 역시 파국은 원하지 않았다.



1954년 7월21일에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었다.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 분할과 2년 내 총선 실시에 합의했다. 협정의 이행은 인도·폴란드·캐나다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단이 감독하도록 했으며, 통일 베트남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은 1956년 7월 이전에 위원단의 감독 아래 실시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북베트남은 호찌민이, 남베트남은 응오 딘 지엠이 정권을 잡았다.


사진 1  하노이 바딘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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