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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 호찌민 기행 (3)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호찌민 ‘미국은 지고 있다’
등록날짜 [ 2020년06월22일 07시46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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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12월부터 호찌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 있는 프랑스 총독 궁에서 집무하였다. 그런데 그가 거주한 곳은 총독관저 전기공이 살았던 3칸 자리 집이었다.

호찌민이 살던 집 (1954-1958)

각료들은 주석궁에 살 것을 권유했지만 호찌민은 단호히 거부했다. 전기공이 살던 집은 침실 · 식당 · 집무실이다. 집무실 벽에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진이 걸려 있다.

호찌민 집무실

조금 더 가니 2층 목조 건물이 있다.


이 집이 호찌민이 1959년부터 1969년 9월 별세할 때까지 살았던 ‘냐산’이다. 2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집무실과 침실이 있다.

집무실에는 책상과 의자, 책장이 있고,  책상에는 타자기 한 대와 전기스탠드뿐이다. 언젠가 호찌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치는 부패보다 더 나쁘다.”

그래서인지 현지 가이드는 호찌민이 정약용의『목민심서』를 평생   침대 머리맡에 두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이는 가짜뉴스이다. 
 

2019년 4월 24일, 다산연구소 게시판에 베트남 교민 잡지사 ‘굿모닝베트남’이 ‘목민심서와 호치민 주석’에 대해 질문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베트남 호치민에 본사를 두고 있는 교민잡지사 굿모닝베트남입니다. 목민심서를 호치민 주석이 탐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박헌영이 목민심서를 호치민 주석에게 선물하였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위의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서 문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에 대해 다산연구소는 답변을 했다.

“관리자 : 안녕하세요~ 다산연구소입니다. 호치민 주석의 목민심서 탐독 이야기는 근거가 전무 합니다. 국제 레닌학교 시절, 박헌영과 호치민 주석의 목민심서 일화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 이상 다산연구소 입장입니다. 고맙습니다.”

이후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은 2019년 11월25일에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목민심서와 호치민’에서 자신의 불찰을 시인했다. 즉 2004년 7월9일 자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에서 ‘호치민이 책이 닳도록 『목민심서』를 읽고, 다산 선생을 너무도 존경하여서 다산의 제삿날까지 알아내서 해마다 제사를 극진하게 모시기도 했다.’고 쓴 것은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이어서 2019년 12월 7일의 연합뉴스는  “(팩트체크) 베트남 국부의 '목민심서 사랑' 사실일까?” 기사에서 호찌민의 목민심서 사랑은 1990년대 이래 국내 베스트셀러 저서와 유명인사의 발언에 숱하게 소개됐지만, 최근 이런 이야기를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는 주장이 국내 대표적 정약용 연구자로부터 제기됐다면서,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과 김태희 실학박물관 관장의 글을 인용했다.

또한 연합뉴스가 12월 6일 하노이에 호찌민박물관에 호찌민의 목민심서 열독 및 소장 여부를 이메일로 질의한 결과 "우리는 그것에 대해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We have heard about it, but we do not have any proof. )는 답을 받았다고 적었다.

냐산

한편 남베트남 정부는 제네바 협정에 근거하여 1956년 7월에 치러질 총선에서 호찌민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이를 거부했다. 미국도 남베트남을 지지했다.

1956년 7월에 호찌민은 북베트남 국민에게 통일을 위해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1960년 12월에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소위 베트콩)이 결성되고 1961년 2월에 인민해방군이 창설되었다.

베트남 내전이 시작되자, 베트콩은 호찌민과 연합하여 민족해방전쟁을 본격화하고 지엠 정권을 밀어붙였다.

하지만 베트남 공산화를 저지하려는 미국의 노력 또한 필사적이었다. 1961년에 출범한 케네디 행정부는 비전투 군사요원들을 파견했고, 미군 고문단의 수는 1960년 900명에서 1962년 말에 1만 1천 명으로 늘었다. 

1964년 8월 초에 통킹 만 사건이 터졌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였다. 북베트남도 라오스를 경유하는 호찌민 루트를 통해 정규군을 남파하여 전쟁은 확산되었다.

1965년 3월에 미군 해병을 필두로 대규모 지상군이 다낭에 상륙했다. 한국, 호주, 뉴질랜드, 필리핀, 태국도 참전했다. 반면 북한은 호찌민을 지원했다. 미군은 1964년 2만 3,300명에서 1966년 38만 5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미국은 호찌민을 쉽게 이기지 못했고, 베트콩의 은폐 · 잠복 · 기습공격에 마냥 시달렸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인민해방군은 테트(음력설)에 남베트남의 41개 도시를 기습 공격했고, 사이공 소재 미국 대사관, 대통령궁 등이 피격되었다.


전투는 미국이 이겼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만 7,000명이 전사했고 미군 전사자는 2,500여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국은 정치적으로 완패했다. 미국 여론이 바뀌어 반전(反戰)이 확산되었고, 1968년 3월 31일에 존슨 대통령은 재선 출마를 포기했다.

1969년에 닉슨 행정부가 출범하였다. 6월에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 2만 5,000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 폭격기를 동원하여 대규모 공습을 하였고. 심지어 고엽제를 살포하였다. 하지만 미군의 싸움은 딜레마였다. 게릴라전으로 미군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마침내 7월 20일에 호찌민은 ‘미국은 지고 있다’고 말했다.

1969년 9월 2일 호찌민이 별세했다. 9월 8일 장례식은 단 35분 만에 끝났다. 호찌민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도 남겼다.

“내 시신은 화장해서 재는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 하나는 중부, 하나는 남부 베트남에 뿌려다오.”

그런데 베트남 정부는 호찌민의 유언을 지키지 않고, 레닌처럼 영묘에 안치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이날 혁명세력은 감격에 겨워 ‘호 아저씨’ 노래를 불렀다. 사이공 시는 1976년에 호찌민시로 개명(改名)됐다. 호찌민에 대한 헌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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