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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향토인물사, 삼계면 사람들 (2)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임란 때 삼계면 모두 9명...송약선, 이희룡 · 이희익과 이효안·이효민, 노석령, 김찬원 ·김보원, 최희윤
등록날짜 [ 2020년07월18일 13시07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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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1592년 4월13일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왕조 200년에 맞은 최대 국난이었다.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했다는 급보를 접한 선조는 4월30일에 한양을 떠났다. 5월3일에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이러자 호남의병이 일어났다. 호남 의병은 향토방위의 영남 의병과는 달리 근왕(勤王) 의병이었다. 한양을 다시 찾고 임금을 위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창의였다.

# 나주의 김천일, 먼저 창의하다.

 5월 초에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8천 명을 이끌고 공주까지 올라갔다가 선조가 파천했다는 소식에 전주로 귀환하자 전 수원부사 김천일(1537∼1593)은 격분했다.


김천일은 전 동래부사 고경명을 만나 이광의 처사를 비판하면서 즉시 창의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고경명은 신중론을 취했다. 이러자 김천일은 독자적으로 거병에 나섰다.

5월16일에 김천일은 송제민, 양산룡·양산숙 형제, 임환, 서정후, 이광익·이광주 등과 함께 창의하였고, 6월3일에 김천일은 나주 의병 3백 명을 이끌고 북상하였다. 6월23일에 수원에 이르자 의병은 2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의 활동은 1592년 6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호남 의병장 김천일이 군사를 거느리고 북상하였다.  삼도(三道)의 군사가 무너진 뒤로부터 경기도가 완전히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는데, 적에게 붙좇아 도성에 들어간 자도 많았다. 김천일이 의병 수천 명을 규합하니, 선조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에 임명하는 동시에 창의사(倡義使)라는 칭호를 내렸다.


김천일의 군사가 수원에 이르러 독산성(禿山城)에 웅거하여 적에게 붙좇은 간민(奸民)을 찾아내어 목을 베니, 돌아와 따르는 경기도 내의 사민(士民)이 많았다.”

사진 1  나주 정렬사

사진 2  김천일 초상화



# 고경명, 담양에서 창의하다.

5월23일에 옥과 출신 성균관 학유 유팽로는 남원의 양대박 (유팽로의 이종사촌)과 함께 고경명을 만나 창의를 권유했다.

5월29일에 광주, 담양, 옥과, 남원, 순창 등 21개 고을 선비들이 담양 추성관에서 모였다. 이날 고경명(1533∼1592)은 맹주에 추대되었다. 6월1일에 그는 각 지역에 창의격문을 보냈다.

 “나, 고경명은 문장이나 아는 졸렬한 선비로서 병법에는 문외한이지만, 맹주로 추대되니 여러 동지들에게 수치가 될까 두렵다.(중략) 그러나 오직 마땅히 피를 뿌리고 진군한다면 조금이나마 임금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에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우리 전라도 사람들이여! 아버지는 그 아들을 깨우치고 형은 그 아우를 격려하여 의병대열에 모두 함께 나서자! 속히 결정하여 옳은 길을 따르라. 주저하다가 스스로 그르치지 말라.”

이리하여 6월11일에 고경명은 의병 6천 명을 이끌고 북상하여 6월 14일에 전주에 도착했다.

사진 3  광주 포충사

사진 4 고경명 초상화



# 영광에서는 이굉중 등 18인이 창의

이때 영광에서는 참봉 이굉중이 나섰다. 고봉 기대승(1527∼1572) 문하에서 수업한 이굉중은 아우 이용중, 강항, 송약선, 이희룡, 김찬원, 최희윤, 이안현, 임수춘, 오귀영, 이헌, 김재택, 강낙, 강태 등 18인과 함께 창의하여 격문을 고경명 의병소에 보냈다.

격문의 대강은 이렇다.

“저 헤아리기 어려운 섬 오랑캐 무리들이 중국을 침범하고자 하니 무릇 한 하늘 아래에서 함께 토벌해야 할 적일 뿐만 아니라 무릇 온갖 땅의 귀신들도 이를 벌주기로 논의한 바 있으니 여러 고을의 군자들은 한 목소리로 창의하여 근왕(勤王)하러 나서라”


(김동수 편역, 호남절의록, 경인문화사, 2010, p 156)
아울러 이굉중 등 18인은 병기와 의곡을 모아서 전주의 고경명 진중에 보냈다.  
 

한편 이굉중과 함께 창의한 18명 중 ‘삼계면 사람’은 송약선 · 이희룡 · 김찬원 · 최희윤 4명이다.   

지지당 송흠의 4대손인 24세의 송약선(1568∼1597)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분강개하고 7언시 두 수를 지었다. 이 시는 <신평송씨 대동보 권1>에 수록되어 있다.

제1수

통곡하노라! 왜적이 서울에 침략해 오니
백 년 종사(宗社)가 하루아침에 기울어지네.
남도에서 같은 마음의 선비를 만나
칼짚고 대장기 휘두르며 의병을 일으키노라. 
 

제2수

충신의 의는 무겁고 내 몸은 가벼운데
국가의 난리에 어찌 살 길을 바라겠는가.
문득 가족들에게 인사하고 칼 짚고 일어서니
맹세코 후일에 나라가 평온해질 날을 보겠노라.  
 

(김세곤 지음, 청백리 송흠, 온새미로, 2011, p 197)

이희룡은 병마절도사 이윤종의 손자로서 동생 희익, 아들 효안 · 효민과 함께 임진왜란 때 활동하였다. 김찬원은 광산김씨로 현감 김약의 아들이다.

최희윤은 승지 최낙궁의 아들로 나주에 사는 큰 형 희열, 동생 희급, 희민, 희량 5형제가 함께 활약하였다. 최희급과 최희민은 가동 수십 명을 데리고 김천일 의병에 참여하였다. 

한편 『호남절의록』에 수록된 임진왜란 때 활약한 삼계면 사람은 모두 9명으로, 송약선, 이희룡 · 이희익과 이효안·이효민, 노석령, 김찬원 ·김보원, 최희윤이다.

이중 노석령은 고경명의 딸이 며느리로, 그는 의병과 군량을 모아 고경명에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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