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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김형진 교수,동피랑에서 그리는 예술학교

등록날짜 [ 2009년08월24일 18시26분 ]

동피랑에서 그리는 예술학교

푸른통영21이 가꾼 동피랑 벽화골목은 다른 지자체에 모범사례로 꼽힌다. 그 탓에 동피랑 안내를 맡을 때가 적지 않은데, 그곳에 갈 때마다 카메라를 든 젊은 여행객들을 만난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들이 누르는 셔터에는 아기자기한 벽화와 강구안을 가운데 두고 시원스레 펼쳐진 통영시 전경들이 배경으로 깔린다. “거 머 볼끼 있다고!” 토영사람들은 오르지 않는 그 ‘까꾸막’에서 “통영서 가본 곳 중 여기가 제일 맘에 든다”며 감탄해 마지 않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에겐 너무 낯익고 흔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들의 값어치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괜히 중요한 무언가를 뺏기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라도 담아갈 수 없는 보물들이 동피랑엔 더 있다. 김수용 감독의 <갯마을>을 비롯, 손으로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수한 영화음악을 만든 정윤주 전 한국작곡가협회 회장의 향취도 그 중 하나다. 1960-70년대 우리나라의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탐을 냈던 그는 동피랑에서 보통학교를 다녔고, 통영중학교 음악교사를 맡기도 했다. 우리에겐 윤이상의 동창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지금도 그를 빼놓고는 영화음악을 들먹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진가는 알면 알수록 눈이 부시다.

동피랑 북쪽 아래 주전골엔 <꽃신>으로 대표되는 소설가 김용익의 고향집이 있다.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교 등에서 소설창작을 강의하기도 한 그는 한국인의 서정을 영어로 노래해 유럽과 미국에서 ‘마술의 펜’으로 칭송 받았는바, 그의 작품 <해녀>는 미국 중・고등학교 영문학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늦가을 채소장수와, 외롭고 미신을 좇는 얼굴을 보며 중얼거리는 점쟁이 사이에 앉은 신장수, 시장에 햅쌀을 찾아다니던 그날’ - <꽃신> 중의 내음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 것인가.

동피랑에서 강구안 쪽으로 내려서면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가 보통학교를 다니던 ‘쌍새미’ 길과 마주한다. 어린 김춘수가 책보따리를 메고 학교를 오가다 들여다 봤을 쌍새미에 앉노라면‘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솟구친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서피랑이 한 눈에 찬다. 길 하나 담 하나 돌 하나가 몽땅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인 그곳은 박경리 선생의 생가가 있기도 하지만, 시인 백석이 ‘토영 처니’에 반해 몸살을 앓았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많은 이름난 문인들이 이 두 작가의 향기를 맡으러 서피랑을 거닐다 가곤 한다.

코앞에 보이는 남망산엔 <깃발>의 시인 청마 유치환의 시비가 있고, 강구안 서쪽 항남 1번가는 초청 김상옥의 거리이기도 하다. 멀리 보이는 미륵산 아래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화가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전혁림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하나씩 예술의 향기를 들추자면 동피랑에서 보이는 모든 곳에, 그러니까 통영의 어디에든 통영이 낳은 시인과 화가, 음악가들의 흔적이 묻어 있다. ‘예향의 도시 통영’은 그저 흔한 현수막에나 걸리는 구호가 아니라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빼어나고도 기이한 역사적 사실 그 자체인 것이다.

최근에 나는 공립 예술고등학교 유치추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옷을 하나 더 입었다. 옷이 좀 크고 무겁게 느껴지지만, 오랜시간 예술이라는 젖줄로 살찌운 통영에 예술고등학교를 지어 통영뿐 아니라 전국의 인재들을 기름지게 키워 보고 싶은 욕망에서다.

‘예술 작품의 절반은 작가가 낳고 자란 고향의 것’이라는 말이 있다. 유치환 선생이 열애를 하던 곳에서 시를 짓고, 윤이상 선생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서 오선지를 채우고, 전혁림 화백이 지금도 숨을 쉬는 곳에서 물감을 적신다는 것은 오직 통영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 담백하고도 명쾌한 이유 말고도 예술학교가 통영에 미칠 영향은 교육, 경제, 관광 등을 불문하고 부지기수이지만 난 이 하나만으로도 예술학교가 통영에 들어서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통영은 지금 예술학교 유치를 두고 다른 지자체와 힘을 겨루고 있다. 통영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시민들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토영사람 눈엔 “볼 끼 없어서” 오르지 않는 동피랑에서 전국의 관광객들이 알짜 여행을 누리듯, “핵죠 생기면 뭐할낀데” 수수방관하는 동안 오히려 서울 등 타지의 문화예술인이 더욱 통영의 예술학교 유치를 위해 팔을 걷어부치고 돕는 형상이 적잖아 있다. 시인이고 작가고 화가고 간에 우리에겐 너무 흔해서 귀한 줄 모르는 이 예향 통영의 긍지를, 그 값어치를 다시금 돌아볼 시간이다. 동피랑은 온전히 우리 것이지만, 이렇게 좋은 것들을 담을 수 있는 예술학교를 뺏기고 나면 두고두고 배 아플 도리밖에 없다.

                                        2009년 8월 24일

                              공립 예술 고등학교 유치추진위원장 김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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