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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고종 즉위 40주년 (3)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1901년 12월 25일 황태자, 정청(庭請)하여 세 번째 아뢰다.
등록날짜 [ 2021년06월14일 18시04분 ]

"소자는 위로 떳떳한 법에 의거하고 아래로는 여론을 따라 네 번씩이나 간절한 상소를 올리기도 하고 정청하기도 하면서 그만두지 않는데, 폐하를 시끄럽게 구는 것이 황송한 일이라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해서 정말 이처럼 번거롭게 굴겠습니까?


신자(臣子)의 간절한 마음은 마음속에서 나온 것이어서 윤허 받지 않고서는 그만둘 수 없습니다.
폐하의 마음을 감동시켜 생각을 돌려세우게 되었으리라고 여겼는데 폐하께서 내린 비답(批答)을 보니 단지 고포(告布)와 칭경(稱慶)의 의식만 억지로 따른다고 하였을 뿐 성대한 의식과 훌륭한 전례에 대해서는 윤허를  내리지 않으시니 소자는 멍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며 모든 관리들은 황망하여 손쓸 줄을 모르겠습니다.

우리 부황 폐하께서는 지극한 덕과 크나큰 업적이 모든 임금들보다 으뜸가고 3대 때의 임금들보다 뛰어났으며 더없는 인자함과 크나큰 혜택이 온 나라에 푹 배이고 만백성들에게 미쳤습니다.

고종항제 출처: Public domain
당당한 황제의 칭호를 동한(東韓)에서 처음 내었고 아름다운 명성이 오대주(五大洲)에 가득 찼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후에 올린 글들에서 이미 다 진술하였으니 다시 장황하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으며 지난날의 소략한 존호(尊號)만으로는 그 만분의 일도 드러낼 수 없으니 소자가 오늘 가상(加上)하자는 청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습니까? (중략)

평범한 백성이 부모를 섬기면서도 모두 경사를 만나면 연회를 차려 기쁨을 표시하고 해마다 술잔을 올리는 법인데 더구나 소자가 황태자로 있으면서 이전에 없던 이런 경사를 만나 조정의 모든 신하들과 온 나라의 모든 백성들과 함께 기뻐하면서도 만년 장수를 축수하는 한 잔의 술을 올리지 못한다면 아들과 신하된 마음에 과연 어떻겠습니까?

과도하게 자신을 억누르면서 연회를 풍성하게 차리는 것이 오늘날 할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성인의 겸손한 덕이고, 신자의 지극한 심정을 이해하고 정성을 표현할 길을 열어주는 것은 성인이 아랫사람들의 뜻을 알아주는 어진 마음입니다. 겸손한 덕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뜻을 알아주는 어진 마음을 소홀히 하는 것은 중도(中道)를 행하는 성인의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중략)

 아! 오늘의 청(請)은 소자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온 나라 신민(臣民)들의 일치된 말이고 소자가 내키는 대로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과 역대 임금들이 이미 시행한 전례이며 사사로운 인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곧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도리상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인자하고 뛰어난 황제 폐하가 어찌 이것을 통찰하지 못하겠습니까?

아무리 거절하려고 해도 끝내 거절할 수 없는 것이니 바라건대 깊이 생각하고 단번에 마음을 돌려 여러 사람들의 청을 특별히 허락하고 예원(禮院)으로 하여금 예법대로 거행하게 한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러자 고종이 비답하였다. “만약 실속이 있으면 명분이 없어도 물론 손해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명분이 어떻게 되겠는가? 네가 날마다 추위를 무릅쓰고 간절히 청하는 효성도 생각지 않을 수 없으니 존호(尊號)를 올리는 일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따른다.


그러나 연회에 대하여 말하면 지금 백성들이 처한 처지에서 헤아리면 짐의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내년 가을에 해도 결코 늦지 않으니 부모의 뜻을 받드는 도리에서 보아 마땅히 이해하라.”(고종실록 1901년 12월 25일 1번째 기사)


 

전라도 구례에 사는 선비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01년에 서울에 진청(賑廳)을 설립하여 5부(部)에서 기아 인구 19,683명을 선별하였다. 이때 얼어 죽은 사람과 굶어 죽은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었으며, 그 고통을 못이겨 온 가족이 독약을 먹고 사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혜민원(惠民院)에서는 날마다 죽을 두 번씩 끓여 결식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1901년 겨울에 백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연회를 하는 것이 민망했던지 고종은 몇 번의 사양 끝에 1902년 가을에 연회를 열라고 명했다. 다음 날인 12월 26일에 고종은 중화전(中和殿)에 나아가 황태자가 직접 올리는 축하문과 백관(百官)이 올리는 표문(表文)을 받고 이어 하례(賀禮)를 받았다.

이 날 의정부에서는 황제에게 가상하는 존호의 망을 ‘건행곤정영의홍휴(乾行坤定英毅弘休)’로 명성황후에게 추상하는 존호의 망을 성덕(誠德)으로 올리니, 아뢴 대로 하라는 칙지를 내렸다. (고종실록 1901년 12월 26일 2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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