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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잃어버린 10년 (11)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독립협회 강제 해산
등록날짜 [ 2021년10월24일 09시27분 ]

1898년 12월 15일 오후 4시에 중추원이 개원되었다. 의장은 이종건, 부의장은 윤치호였다. 12월 16일 오전 11시에 속개된 중추원은 ‘헌의 6조’와 ‘조칙 5조’의 조속 실시를 촉구했다.

 

이윽고 독립협회 출신 의관 최정덕은 정부 대신에 임명할 11명을 선발하여 황제가 서용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의결되어 중추원 의관들의 투표에 의하여 11명이 천거되었다. 개혁파로는 민영환· 이중하·박정양·한규설·윤치호·김종한·박영효·서재필 8명이고, 수구파로는 민영준·최익현·윤용구 3명이었다.

 

그런데 중추원이 박영효와 서재필의 천거한 것은 너무 무모한 일이었다. 박영효는 대역죄인의 죄명을 쓰고 일본에 망명 중이었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미 의결된 것이라 원안이 확정되었다.

 

중추원의 11명 공천 결의안은 곧 정부에 제출되었다. 이 와중에 내부 주사 이석렬 등 33인이 연명 상소하여 박영효의 소환과 서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독립협회 내 소장 급진파들인 이건호,현공렴, 이승만, 최정덕 등이 중심이 되어 박영효의 귀국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의 소환 운동은 고종과 수구파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고, 만민공동회에 호의적이었던 일반인의 반발을 샀다.  

 

12월 17일에 수구파 민영기 등이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진언함에 따라, 고종은 영국·독일·러시아·미국의 공사들을 불러 의견을 타진하였다. 외국의 공사들은 순검을 사용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도록 권고하였다. 고종은 순검의 힘이 약하니 군대로써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킴이 어떠한가를 물었으나, 외국 공사들은 찬성하지 않았다.

 

12월 18일에 일본 공사 가토 마스오가 고종을 단독 면담했다. 고종은 가토에게 “군대로 민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었다. 가토는 “일본에서도 메이지 유신 초기에 군대로 민회를 제압한 일이 있다고 답하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킬 것을 권고하였다.

 

일본 공사 가토는 무려 3시간 면담하면서 민회가 처음에는 충군 애국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난민의 부류에 빠져있다고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규탄하였다. 고종은 가토의 진언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다.

 

12월 18일에도 만민공동회는 수구파 관료들의 추방과 개혁정부 수립을 요구하면서 집회를 계속하였다. 이 날 고종은 의정부 찬정 윤웅렬을 경무사에 겸임시켰다. 윤웅렬은 독립협회 회장 윤치호의 부친이었다.    

 

12월 20일에도 만민공동회가 계속되었다. 이날 이승만은 보부상의 주모자는 민영기이니 그의 체포에 은 1천 원의 현상금을 걸자고 제안하여 채택되었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21일에 고등재판소 문 앞에서 보부상 배후 조종자인 전 탁지부대신 민영기와 군부대신 민병석 등 4인을 체포하여 공개 재판에 부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데 이날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박영효 임명을 상소한 이석렬 등을 잡아 진상을 밝히도록 명했다. 강경 대처를 예고한 것이었다. 마침내 고종은 12월 23일에 군대와 보부상을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키면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지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에 나섰다.

 


시위대(侍衛隊) 제2대대 대대장 김명제는 부하 병정들에게 각 3원씩 나누어 주고 술을 마시게 한 다음 만민공동회를 해산토록 명령했다. 술 취한 시위대 병정들은 일제히 만민을 총검으로 위협하면서 행사장으로 들어왔다.


만민들이 흩어지자, 시위대 병정들은 만민들을 총검으로 위협하며 추격하였고, 그 뒤에는 보부상들이 뒤따라오면서 “민회를 밟아라”, “회원 연설자를 잡아라”등 고함을 치며 만민들을 추격했다. 만민들은 시위대 군인들의 총검과 보부상들의 몽둥이에 쫓기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해산하였다.

 

12월 24일에 서울 시내는 완전 계엄 상태였다. 시위대는 종로를 봉쇄 했으며, 서울 시내 요소요소에는 총검을 든 군인들이 배치되어 시민이 모이면 즉각 총검으로 위협하고 귀가시켰다. 

 

12월 25일에 고종은 민회(民會)에 칙유(勅諭)하였다. 그 내용은 민회가  법을 어기고, 대신을 능욕하고, 황제의 잘못을 외국공관에 투서하고, 역적 박영효를 임용하라는 등 11가지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어서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집회를 금지시키고 구경꾼까지도 단속하라고 내부(內部)와 군부(軍部)에 명했다. 이로써 만민공동회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독립협회의 근대적 개혁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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