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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칼럼> 조선의 청백리 - 9회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호조 서리 김수팽
등록날짜 [ 2023년02월03일 09시11분 ]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 「이전(吏典)」 ‘아전을 다스림(束吏)’에서 아전의 착취를 이렇게 혹평했다.  
 
“백성은 토지로 논밭을 삼지만, 아전은 백성을 논밭으로 삼는다.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을 농사짓는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징수하는 것을 수확으로 삼는다. 
 이것이 습성이 되어서 당연한 짓으로 여기게 되었으니, 아전을 단속하지 않고서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자는 없다.”
 
1809년과 1810년 두 해에 걸쳐 전라도 지역에 극심한 흉년이 계속되었다. 유랑민들이 길을 메웠고 버려진 아이들이 길거리에 넘쳤다. 전염병마저 창궐하여 시신(屍身)들이 언덕을 메웠다.    
 
이러함에도 탐관오리들은 사태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수탈만 일삼았다. 정약용은 분개하였다. 그리하여 탐학만 일삼는 아전을 고발하는 <용산리(龍山吏)> · <파지리(波池吏)> · <해남리(海南吏)>, 소위 3리(三吏) 시를 지었다. 
 
정약용은 흉년에 먹을 것도 없는 마을에 들이닥쳐 세금 안 낸다고 소마저 가져 가는 아전. 죽치고 앉아 밥 얻어먹고 가는 아전. 이런 승냥이의 횡포에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청렴한 아전으로 이름을 남긴 이도 있다. 영조 때 호조서리(戶曹胥吏) 김수팽이 그렇다. 그는 기개가 뛰어나고 대장부다운 절조가 있었다.
 
하루는 김수팽이 선혜청 서리인 동생 집에 들렀다. 그런데 마당에 항아리들이 줄지었고 검푸른 염료가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이게 무엇인가?”
 
김수팽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동생에게 물었다.
 
“아내가 염색업(染色業)을 하고 있습니다.”
 
아우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김수팽은 분노하여 항아리를 모두 엎어 깨뜨려 버렸다. 엎어진 동이에는 푸른 염료가 콸콸 흘러 도랑에 가득 찼다.
 
이윽고 수팽은 동생을 크게 꾸짖었다.
 
“명색이 나라에서 녹을 받으면서도 부업을 한단 말인가? 이것을 업으로 하면 저 가난한 사람들은 무엇을 생업으로 한단 말인가!”
 
한편 김수팽은 눈치 전혀 안 보고 원칙대로 일했다. 한번은 김수팽이 호조에서 숙직하고 있었는데 내전 내관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왕명이니 십만냥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수팽은 판서의 결재가 있어야 한다고 거절했다.

내관이 즉시 내놓으라고 여러 번 호통쳤으나 수팽은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내관이 빨리 가서 판서의 결재를 받아오라고 하자, 김수팽은 황소걸음으로 판서 집으로 가서 결재를 받은 후 비로소 돈을 내주었는데 이미 날이 밝았다.
 
궁궐에 들어간 내관은 왕명을 업신여긴 것을 영조에게 고하고 그를 처벌하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영조는 빙그레 웃고는 직무에 충실한 김수팽을 오히려 가상히 여겼다.
 
또 한번은 김수팽이 결재를 받으러 판서 집에 갔다. 판서는 마침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김수팽이 결재해 달라고 청했지만, 판서는 머리만 끄덕일 뿐 바둑을 계속 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판서가 바둑을 두고 있자, 수팽은 섬돌에 뛰어 올라가 손으로 바둑판을 쓸어버리고 뜨락으로 내려와 아뢨다.
 
“정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나랏일은 늦출 수가 없습니다. 결재를 청하오니 다른 서리를 시켜서 결재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사직하고 나가 버렸다. 
 
이러자 당황한 판서는 김수팽을 다시 불러 결재하고는 아무런 벌도 내리지 않았다.
 
화가 우봉 조희룡(1789∽1866)은 그의 저서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김수팽을 이렇게 찬(贊)했다.
 
“그 사람(김수팽)을 머리에 떠올리니, 마치 맑은 바람이 숙연히 사람에게서 스며오는 것 같다. 들으니 그가 어렸을 때 집안이 가난했는데, 그 어미가 몸소 불을 때며 밥을 짓다가 부뚜막 밑에 묻혀 있는 금덩어리가 담긴 항아리 하나를 발견했다. 그 어미는 즉시 전과 같이 묻어버리고는 그 집을 팔고 다른 집으로 이사가 버렸다. 
 
한 참 뒤에야 그 어미는 비로소 남편에게 말했다.
 
‘갑자기 부자가 되면 상서롭지 못하답니다. 그래서 금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에 계속 그대로 눌러있었다면 금 항아리가 눈에 항상 아른거렸겠지요.’ 
 이런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수팽 같은 아들을 낳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진 강진군 사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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