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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18일 오전 1시 반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토 히로부미등은 크게 만족하였다.
이들은 덕수궁 수옥헌(지금의 중명전)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였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는 이 사진이 걸려있다. 2층 1관 ‘대한민국의 태동’의 ‘일본의 국권침탈’ 안내판에 전시된 ‘을사늑약 체결기념 사진’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맨 앞 줄 가운데에 이토 히로부미가 앉아있고, 이토 왼쪽이 하세가와 조선 주차군 사령관, 오른쪽이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이 앉아있다. 박제순 오른 편에 앉아 있는 네 명의 인물은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을사오적들로 추정된다. 을사오적은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다.
이토는 을사늑약 체결이후 12일간 경성에 머물면서 마무리 작업을 하였다. 먼저 이토는 고종에게 을사늑약에 반대한 참정대신 한규설을 파면하고 을사오적을 전원 유임시킬 것을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그리하여 11월17일에 참정대신 한규설은 고종황제의 지척에서 행동이 온당치 못하였다는 이유로 파면되었고, 외부대신 박제순이 11월28일에 참정대신이 되었다. 이완용은 외부대신 서리가 되어 외국공관 철수 업무를 하였다. 아울러 을사오적들에게 거금을 주어 이들은 갑자기 벼락부자가 되었다.
한편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일본 본토는 축제분위기였다. 일제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 영전에 “당신이 이루지 못한 뜻을 마침내 우리가 이루었다”고 참배하였고, 메이지 천황은 12월21일에 이토를 초대총감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1906년 2월1일에 경성에 통감부가 설치되어 3월에 이토가 부임하였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은 분노하고 허탈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분하여 을사오적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원망하면서 분풀이를 하려고 하였다. 심지어 을사오적을 처단하려고도 하였다.
11월18일에 수십 명의 군중이 경성 남대문밖 중림동에 있는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토와 하야시는 일본 군대를 파견하여 을사오적의 집을 철통같이 에워싸서 보호하였다.
군부대신 이근택과 내부대신 이지용도 모멸을 당하였다. 이근택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퇴궐하여 집안 식구들에게 을사늑약이 체결된 일에 대하여 말하고는, “내가 오늘 을사조약에 찬성하였으니 이제 권위와 봉록이 종신토록 혁혁 赫赫할 것이요”라고 자랑하였다. 순간 한 계집종이 부엌에 있다가 식칼을 들고 마당에 나와 말하기를 “이 집 주인 놈이 저렇게 흉악한 역적인 줄 모르고 몇 년간 이 집 밥을 먹었으니 이 치욕을 어떻게 치르리요.”라고 호통을 치고 집을 나가버렸다. 그 계집종은 한규설의 딸이 시집오면서 데리고 온 여종이었다. 한규설과 이근택은 사돈인데도 한 사람은 애국의 길은 다른 한 사람은 매국의 길을 걸었다.
내부대신 이지용이 집에 돌아와서 하는 말도 가관이었다.
“나는 오늘날 최명길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국가의 일을 우리들이 하지 않으면 할 자가 누가 하겠는가?”
너무나 뻔뻔하다. 이지용은 흥성대원군 이하응의 형인 이최응의 손자이고 고종의 조카이다.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먹고도 병자호란 시 주화파인 최명길 운운하였으니, 지하에 있는 최명길이 통곡할 일이었다.
이지용은 진주기생 산홍에게도 멸시를 당했다. 1906년에 이지용은 진주 기생집 술자리에서 산홍을 보고 한 눈에 반하였다. 그는 산홍에게 천만금을 내놓을 테니 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자 산홍은 “세상에서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니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자리를 뛰쳐나왔다. 이지용은 크게 화가 나서 산홍을 몽둥이질 했다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산홍 이야기와 함께 어떤 이가 지은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투어 매국노 좇아
사내종과 계집종처럼 굽신거리느라 날마다 바쁘구나.
그대들 금과 옥이 지붕보다 더 높더라도
한낱 산홍의 일편단심은 사기 어려우리라.
진주성 촉석루 옆 의기사 논개 영정 왼편 기둥위에는 진주기생 산홍의 ‘의기사 감음’ 시가 걸려 있다.
천추에 길이 남을 진주의 의로움
당집 둘과 높은 다락이로다.
일 없는 세상에 사는 것이 부끄러워
피리불고 북치며 얼빠지게 놀 뿐이네.
한편 조선 백성들은 이토와 을사오적에게 분풀이를 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에 이토 히로부미는 수원 관광을 갔다가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조선인 청년 원태우(元泰祐)가 던진 돌에 머리를 맞아 다쳤고, 1909년 10월26일에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여 죽었다.
이근택은 1906년 2월에 장성 출신 기산도와 이범석 ․ 이근철의 암살의거에 10군데나 찔리는 중상을 입기도 하였다. 1909년 12월22일에는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명동성당을 나온 이완용을 재미교포 출신 이재명이 칼을 휘둘러 이완용은 폐가 상하는 등 혼수상태에 빠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