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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을사늑약 전야 (1)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을사늑약, 일본이 러일전쟁서 승리한 전리품
등록날짜 [ 2021년01월10일 11시0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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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 단재 신채호 -


1905년 11월 17일에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대한 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다. 사실상 망국이었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이었다.     

# 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해군은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의 극동 함대를 기습공격 했다. 2월 9일에는 제물포항의 전함 두 척을 공격했다. 2월10일에 일본은 러시아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다. 1894년 청일전쟁 때처럼 기습공격 후 선전포고한 것이다. 

1895년 4월 러시아가 주도한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요동 반도를 반환당한 일본은 10년간 와신상담했다. 군비를 확장하고 영국 · 미국 등에 러시아를 견제할 외교전을 벌였다.  

1902년에 일본은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동아시아 남하정책을 공동 저지하기로 합의했다. 러일전쟁 초기에 일본은 미국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858∽1919 재임:1901-1909)의 하버드 대학교 동창생 가네코 겐타로를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루스벨트를 친일파로 만들었다. 루즈벨트는 가네코가 선물한 '무사도' 영문판 책을 읽고 일본에 푹 빠졌다   

1903년 9월 30일에 미국 워싱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주한미국공사 알렌이 친러배일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견책 당했다. 이후 알렌은 1905년 3월 29일에 공사를 그만둘 때 까지 ‘불간섭원칙’을 유지해야 했다. 헤이 미국 국무장관은 러일전쟁 발발 직후 주한미국공사 알렌에게 향후 한일 간에 체결될 어떤 협약의 내용도 본국에 송부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는 고종이 한일의정서 체결에 대해 미국에 중재 요청할 것을 우려한 조치였다. 

# 러일전쟁의 조짐이 짙어지자 고종은 1904년 1월 21일에 ‘중립국화’를 선언하고 각국 외국공관에 통보했다. 하지만 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힘 없는 중립국 선언은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사회에서는 공허한  메아리였다.

일본은 1904년 2월 23일에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8월에는 고문(顧問) 임명을 통해 내정간섭을 본격화했다. 일본군은 1905년 1월에 여순을, 3월에는 봉천을 점령했다. 이러자 러시아의 유일한 희망은 발틱 함대였다.


1904년 10월에 발트해를 출발한 발틱함대는 영국의 방해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지 못하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았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 위하여 7개월 만에 대한해협에 도착했다.

전투준비를 끝낸 일본연합 함대는 1905년 5월 27일에 쓰시마 섬 근처에서 발틱 함대를 궤멸시켰다. 이순신을 가장 존경하는 일본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치로의 압승이었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승자인 일본이나 패자인 러시아도 전쟁을 계속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러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중재에 나섰다. 한편  루스벨트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아시아 순방 외교 사절단을 파견했다.


육군장관 태프트를 비롯하여 상원의원 7명, 하원의원 23명 그리고 대통령 딸 앨리스와 다수의 군인 및 민간 관계자들은 7월 5일에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다. 순방지는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그리고 대한제국이었다.

7월 25일에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한 태프트는 7월 27일에 도쿄에서 가쓰라 수상과 밀약을 맺었다.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요지는 미국은 필리핀의 지배를 보장받고 일본은 한국의 지배권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 밀약은 1924년에야 공개되었으니 고종이 알 리 없었다.

8월12일에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한국의 지배권을 보장받았다. 10월 4일 자 일본 『고쿠민(國民)신문』은 “영일 동맹은 사실상 영 – 미- 일 동맹”이라고 보도했다.

“영국이 우리 동맹이 됐을 때 미국은 그 동맹의 일부가 됐다. 국가적 상황으로 인해 공개적으로 연합을 주장하지 못할 뿐 일본은 공식적인 조약이 없더라도 미국이 우리와 동맹임을 상기해야 한다.”  신문 기사가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눈치챈 논조이다.

그런데 고종은 ‘맏형의 나라’ 미국이 동생의 나라 대한제국을 살려 줄  것으로 굳게 믿었다. 고종은 1882년에 체결한 조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의거 미국이 중재의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거중조정’ 조항에 희망을 걸었다. 참, 낭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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