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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을사늑약 전야 (2)

김세곤 (역사칼럼니스트)‘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이 결정적!!
등록날짜 [ 2021년01월11일 20시46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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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5일 후인 1905년 8월 4일에 목사 윤병구와 이승만(1875~1965)은 미국 시가모어 별장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두 사람은 하와이 교민 8천 명을 대표하여 한국의 주권과 독립보전에 대한 희망을 담은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 자리에서 루즈벨트는 공식적 창구를 거치기 전에는 검토할 수가 없다고 대답했다. 일본이 한국 외교의 공식적 창구를 지배하고 있음을 알고도 교묘하게 답변한 것이다.

순진한 이승만 일행은 미국 워싱턴의 한국공사관을 찾아갔다. 하지만 대리공사 김윤정은 본국 정부의 훈령이 없이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하소연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였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나중(1906년 4월)에 이승만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난 소식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알려졌다. 이러자 이승만은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그는 1896년에 배재학당 학생으로 서재필에 심취하여 독립협회 활동을 하다가 1898년에 투옥되었는데,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다행히도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에 1904년에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되었고, 그해 겨울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편 1905년 5월 일본은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궤멸시켰다. 전 세계는 경악했다. 하지만 일본은 늘어나는 병력손실과 대외채무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기에는 버거웠다. 


 러시아도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짜르 체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를 알아차린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조정에 나섰다. 그는 러시아와 일본 대표를 미국 뉴햄프셔주에 있는 군항 도시 포츠머스로 불러 회담하도록 주선했다. 일본 측 수석대표는 고무라 주타로 외상이었고, 러시아 측 수석대표는 비테 재무장관이었다.

회담은 8월 9일부터 15회 진행되었는데, 일본은 관철해야 할 절대적 필요조건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권을 러시아가 승낙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거의 승낙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받아야 할 전쟁 배상금 문제가 난항에 빠졌다. 일본이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자 러시아 비테는 "러시아는 지금까지 다른 나라에 전쟁 배상금을 준 적이 없으며, 이번에도 마찬가지"라고 버티며 “일본군이 모스크바까지 밀고 들어 왔으면 몰라도 지금의 전선은 만주”라면서  “이곳에는 승자가 없다.”고 맞섰다.

협상이 난항에 빠지자 루스벨트가 조정에 나섰다. 루스벨트는 일본에게 "전쟁배상금 요구는 무리이며, 만일 전쟁이 재발한다면 일본은 지금보다 엄청난 전비(戰費)를 써야 할 것”이라는 충고를 했고, 러시아에게는 "전쟁이 계속된다면 시베리아 전체가 일본군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고 압력을 가했다.

결국 일본은 전쟁배상금 없이 사할린 섬을 분할하라는 제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비테는 일본의 제안을 고심에 찬 표정으로 수용하면서 사할린 섬의 분계선은 북위 50도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비테는 회담장 밖으로 나오면서 "평화다! 일본이 양보했다." 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다. 러시아는 전쟁에선 일본에 패했지만 외교에선 이겼다. <뉴욕타임스>는 "포츠머스는 러시아의 외교적 승리이다. 외교사에서 전례가 없다. "고 평가했다.

그러면 9월 5일에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보호 감리조치를 승인한다.2. 러시아는 청국의 동의를 조건으로 러시아의 관동 조차지와 장춘-여순 간 철도를 일본에 양도한다.
3.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섬 남쪽을 일본에 양도한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한국의 식민지화는 시간문제였다. 덧붙일 것은 루스벨트 대통령은 러·일 중재 덕분에 1906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 참고문헌 >

o 브래들리 지음 · 송정애 옮김, 임페리얼 크루즈,  프리뷰, 2010

o 강준만 지음, 한국 근대사 산책 4, 인물과 사상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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