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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 6회 이극돈과 김일손의 악연

김세곤 (칼럼니스트)세조(연산군의 증조부)의 궁금비사(宮禁秘事)사초에 적다
등록날짜 [ 2018년09월05일 20시06분 ]

7월11일에 김일손의 사초(史草) 6 조목을 읽은 연산군은 분노했다. 세조(연산군의 증조부)의 궁금비사(宮禁秘事)등을 사초에 적다니. 이것이 능상(凌上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깔보아 업신여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1)

연산군은 김일손을 빨리 문초하고자 조바심이 났다. 7월12일에 연산군은 "별감(別監) 세 사람에게 상등(上等)급의 말을 주어서 세 곳으로 나누어 보냈다. 별감은 기다리다가, 잡아오는 김일손이 보이거든 차례차례로 달려와 아뢰도록 하라."고 전교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1번째 기사)

이 때 김일손은 경상도 함양 청계정사에서 의금부 경력 홍사호와 도사  신극성에게 체포되어 한양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김일손은 1496년 윤3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상도 청도에 있었는데 상복을 벗자 풍병을 앓아 함양에서 요양 중이었다.    

김일손은 잡혀오면서 사초 때문임을 직감했다. 그는 홍사호에게 처음 체포될 적에 “이는 필시 『성종실록』에 대한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홍사호등이 “어째서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고 묻자, 김일손은 “나의 사초(史草)에, 이극돈이 세조 조에 불경(佛經)을 잘 외운 것으로 벼슬을 얻어 전라도 관찰사가 된 것과,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의 상(喪)을 당하여 장흥(長興)의 관기(官妓) 등을 가까이한 일을 기록하였는데, 듣건대, 이극돈이 이 조항을 삭제하려다가 오히려 감히 못했다고 한다. 『실록』이 빨리 편찬되지 못하는 것도 필시 내가 임금에 관계되는 일을 많이 기록해서라고 핑계대고 비어(飛語)를 날조하여 연산군에게 아뢰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연산군일기 7월12일 4번째 기사)

그랬다. 이극돈은 자신의 비행이 성종실록에 수록되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12일 3번째 기사 김일손의 집에서 찾아낸 이목의 편지)

그런데 김일손과 이극돈의 악연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었다. 첫 번째 악연은 김일손이 나이 23세에  과거 시험을  볼 때 있었다. 1498년(성종 17년) 병오년에 과거시험이 있었는데 출제와 채점을 담당하는 시관(試官)이 예조 소속의 윤필상· 이극돈 · 유지 등이었다.

“신(이극돈)은  김일손이 문장에는 능하나 심술이 범람하다는 말을 듣고, 대작(代作)이 있을까 두려워 중장(中場)·종장(終場)의 제술을 모두 월대(月臺) 위에 두고 제술하게 했습니다. 고시하는 날이 되어 한 권의 잘 지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 격식에 많이 맞지 않았습니다. 좌중이 능작(能作)이라 하여 1등을 주고자 하였으나 신은 홀로 말하기를, ‘과장의 제술은 정식(程式 격식)이 있는데, 이 시권(詩卷)이 아무리 능작이라 할지라도 정식에 맞지 아니하니 1등에 두어서는 안 된다.’ 하였더니, 좌중에서 다 그렇게 여기어 마침내 2등에 두었습니다. 이것이 김일손의 맨 처음 원망을 맺은 곳이었습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이극돈의 사초의 일에 대한 상소) 2)

두 번째 악연은 이극돈이  이조판서일 때 이조낭청을 뽑을 적에 생겼다. 이조낭청은 이조좌랑과 정랑자리를 말하는 데 인사권을 장악한 막강한 자리다. 전임 낭청들이 김일손을 모두 추천하여 이조낭청을 삼자고 했는데, 이극돈은 장차 홍문관으로 들어갈 것이라고 핑계대고 망(望 3배수 후보자)에 넣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김일손이 이조낭청으로 추천되었는데도 이극돈은 불가하다 했었고, 병조당상이 강력히 김일손을 추천한 후에야 김일손은 비로소 병조좌랑을 얻었으니, 이것이 김일손이 제2의 원망을 맺은 곳이었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 19일)  

 세 번째 악연은 김일손이 헌납(獻納)이 되었을 때였다. 김일손은 강직하여  권세 있는 사람을 꺼리지 않고 할 말을 다했는데 한번은  “이극돈과 성준이 서로 질투하고 모함하는 등 사이가 좋지 않아 장차 당나라의 우승유(牛僧儒)와 이덕유(李德裕)처럼 당(黨)을 만들 것이다. 3)” 라고 상소했다. 이에 이극돈은 크게 노하였다. (연산군일기 1498년 7월29일 유자광에 대한 평가 내용과 무오사화의 전말)

그리고 네 번째 악연이 바로 김일손의 사초이다. 이극돈은 김일손을 원망하면서 사초의 기록을 지우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김일손이 서울로 압송당하면서 의금부 관원 홍사호에게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극돈의 아들 이세전이 이웃 고을의 수령이 되어 왔는데, 맏형에게는 문안을 하면서도 나에게는 오지 않으면서  「이 사람이 병을 얻었다는데 아직 죽지 않았소.」 하였다 하니, 이극돈이 나를 원망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연산군일기 7월12일 4번째기사) 4)


사진 1 동궐도에 나타난 희정당 주변

사진 2  희정당 앞 (이곳에는 관청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소나무 동산이 되었다.)



1) 연산군은 이세좌를 사사(賜死)하던 날 이렇게 말했다. "위를 업신여기는 풍조를 고쳐 없애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陵上之風革去未殄)" (연산군일기 1504년 3월 30일)

능상은 연산군 시대의 전유물이었다. 연산군은 1498년 무오사화 때  능상을 이유로 선비들을 죽였고,  1504년 갑자사화 때도 마찬가지였다.  

2) 한편 윤근수(1537∼1616)의 『월정만필』에는 ‘김일손의 과거 응시’ 글이  실려 있다. 

탁영(김일손의 호)이 별시에 응시하였을 때 탁영의 두 형 준손(駿孫)과 기손(驥孫)도 탁영의 손을 빌린 덕택에 탁영과 함께 모두 초시에 합격하였다. 전시를 치르는 날,   탁영은 두 형의 책문을 대신 지어주고, 자기 것은 짓지 않았다. 형에게 장원을 양보하고 자기는 훗날 과거에 장원하려고 한 것이었다. 두 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준손은 갑과 제1인이었다. 훗날 과거를 치를 때 전시의 시관(試官 곧 이극돈)이 속으로 탁영의 문장인줄 알고서 그 사람됨을 꺼려 2인으로 밀어 두었기에 민첩(閔怗)이 제1인이 되었다. 김일손이 듣고서 성을 내며, “민첩이 어떤 사람이냐?”하였다.



3) 우승유와 이덕유의 당쟁 (우이당쟁)은 823년부터 40년간 계속된 당나라 관료 집단의 당쟁이다. 우승유 당과 이덕유 당은 파면과 불임용을 거듭하고, 극심하게 대립하며 권력을 주고받았다. 우이는 당나라 목종(穆宗, 재위 820~824)때 붕당이 형성되어 이후 무려 40여 년간 지속되었다. 우이당쟁은 단순히 권력 쟁취를 위한 관료 집단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당쟁의 피해는 백성이 오로지 입었다. 

4) 김일손은 ‘이극돈이 자기를 원망한다.’는 사실을 맏형 김준손의 사위  이공권에게서 들었다. 이공권은 홍문관 교리 손주에게서 그 말을 듣고서 김일손에게 전했다. (연산군일기 1498.7.12. 6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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