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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수은 강항과 일본유교전파에 따른 역사적 고찰과 민간외교1

우리나라 국민, 재일교포가 더 나아가서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스승 강항 가슴깊이 심어주는 계기 마련
등록날짜 [ 2019년05월04일 14시11분 ]

<들어가면서>
2019년 6월 19일 일본 교토 용곡(료코쿠)대학교 세미나실에서 수은 강항선생국제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 9월 1일에 방영한 MBC TV 드라마 「간양록」 과 KBS에서 2002년 3월 6일(토)방영했던(KBS 역사스페셜)[유인촌 진행 - 역사스페셜]-149회-‘임란 포로체험기 간양록, 선비 강항은 일본에 무엇을 남겼나’로 수은 강항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포로로 피로(被虜)되어 참혹한 상황에서도 의연(毅然)하게 왜국에 유교를 전파한 업적에 비해 궁색(窮色)하나마 그렇게 조금씩 알려져 왔다.

본 지에서 수은강항선생의 특집을 다루게 된 배경은 위의 두 가지 사실에서 결정했다.

2017년 5월 31일은 수은 강항선생(탄신일 음력 1567년 5월 17일)의 탄신 450주년을 맞이하였고 올해 2019년은 탄신 453주년을 맞이해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 수은강항선생일본연구회(회장 무라까미 쓰네오)에서는 선생의 위령제(慰靈祭)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접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영광내산서원보존회 중심으로 2000년대 초반에 비교적 활발히 강항문화재까지 연계해 활발하게 일본 에이메현 오즈시와 교류 등으로 진행되다가 갑자기 양국의 시군 교류까지 중단되고 말았다.


일례(一例)로 2001년 3월 6일 2박 3일에 걸쳐 영광 향토사 관계자와 강항선생연구자 등 16명이 성리학 전파 유적지 답사기행을 다녀왔으며, 2002년 9월 1일 영광 JC(회장 김상범)와 오즈JC가일본의 에이메현 오즈시에서 회무교류를 가졌으며 문화관광부선정 3월의 인물 <수은 강항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들이 이 지역 영광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 왔다.

또, 수은 강항의 간양록(출판 서해문집 발매 2005.02.28.)을 현암 이을호 선생이 집필했으며 현암의 다산 정약용연구를 비롯한 실학사상의 연구업적은 지금도 학계에서는 독보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로 강항선생의 역사적 고찰(考察)로 그는 강항을 수면위로 올리게 된 결정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본 지에서 특집을 게재 준비중에 일본에서 낭보(朗報)가 날아왔다.
일본 에이메현에 20년째 거주하고 있는 한국어 교사 강용희(진주강씨 은열공 후손)선생이 ‘Peace Love in 에이메’회원 자격으로 2018년 6월에 무라카미 쓰네오 수은강항선생 일본회장을 찾아 가 수은 강항을 처음알고 그동안 20여 년 동안 일본에서 알게 모르게 숨죽이고 살아온 나날을 이제는 훌훌 털고 앞서 밝힌바와 같이 대유(大儒)이며 지성(至聖)인 강항선생의 위령제를 다음달 6월 8일(강항 탄신일 음력 1567년 5월 6일)에 준비 중이라 전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몰랐다가 진실된 역사를 알고 1597년 최악의 포로 신분인 수은 강항으로부터 유교를 배운 그들에게 이제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일본 내에서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럽게 살아가게 된 계기가 마련되었노라며 매우 감격하고 있는 한 재일교포의 현실까지도 알게 된 것이다.

이처럼 가까이는 우리 국민이 좀 더 나아가서는 재일교포가 더 나아가서는 일본인들에게 스승 강항을 가슴깊이 심어주는 계기의 마련이 곧 수은강항선생국제학술세미나의 출발로 마땅히 본 지가 동참을 하게 되었으며 이와 같이 특집으로 다루게 되었음을 비교적 상세히 밝히는 바이다.


1. 수은 강항의 생애

수은 강항은 세조 때 명신 사숙재 강희맹(1424∼1483)의 5대손으로 1567년(명종 22년)에 영광군 불갑면 유봉마을에서 강극검의 5남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강항 집안은 고조부인 강학손(1455∼1523, 강희맹의 차남)이 영광군으로 귀양 와 정착하였다.   

◇ 맏형 저어당(齟齬堂) 해(瀣)에게 수학 
 강항(姜沆)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였다.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서 글을 읽으면 곧 바로 외워 주변으로부터 神童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네 살 때 맏형인 저어당(齟齬堂) 해(瀣)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뛰어나게 잘해 소문이 널리 났다. 해(瀣)는 우리나라의 대학자였던 율곡 이이의 문하로 학문이 깊은 분이었다.

해(瀣)의 호는 저어당(齟齬堂)으로 율곡 이이(우계 성혼(成渾)과도 교류함)의 門下(문하)에서 폭넓은 교류를 통해 학문을 쌓다가 신묘년(선조 24년, 1591년) 신묘사화(辛卯士禍)에 연좌되어 변고(變故)를 당하였다.(선조실록 1591년 8월 13일)

후에 강항(姜沆)이 벼슬을 할 때 우계(牛溪) 成渾(성혼)을 선조 28년 1594년 갑오 28세 때 절친했다는 이유 때문에 東人(동인)의 탄핵을 받아 校書館(교서관)에 분관되고 우계 成渾(성혼)선생의 문호가 쓸쓸하니 멀리 찾아 가 기도 하여 직, 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 맏형 저어당(齟齬堂) 해(瀣)와 스승 율곡 이이(李珥)
  맏형 저어당(齟齬堂) 해(瀣)와 成渾(성혼) 우계(牛溪)는 스승 율곡 이이(李珥)를 함께 수학했다.

成渾(성혼) 우계(牛溪)는 1535년에 낳아서 1598년에 세상을 뜨기까지 학문에 전념했고 벼슬을 사양해 오다가 1580년에 장령(掌令)의 벼슬에 나갔다. 1598년 좌참찬(左參贊)의 벼슬에 올라 일본과의 화해를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주(坡州) 향리로 내려갔다.

일찍 율곡  이이(李珥)와 가깝게 지냈으나 학문은 퇴계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 (理氣冱發說)을 지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設)을 주장하는 율곡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놓고 논쟁을 벌려 율곡 이이(李珥)의 학설을 반박 유학계에 커다란 話題(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또한 글씨가 뛰어났다.

이처럼 학문이 뛰어났던 율곡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배운 저어당(齟齬堂) 해(瀣)를 스승으로 모신 강항의 어린 시절 학문은 재주가 비범한 데에 다가 가르침이 또한 깊었기 때문에 일찍이 문리(文理)에 밝게 트였다.

강항은 이미 다섯 살에 벌써 글을 지을 줄 알았다.
당시 전라감사 신응시(辛應時)가 이 소문을 듣고 각(脚)자로 명제를 주니, 곧 각도만리심교각(脚到萬里心敎脚;다리가 만 리(萬里)를 가지만 그것은 마음이 다리를 시킨 것)이라 지어 신응시 전라감사를 놀라게 하였다.


◇ 맹자정의 일화
강항이 일곱 살 때에 중국고서를 판매하는 책장수가 불갑면 안맹마을을 지나가면서 어린 소년이 맹자(孟子)책을 읽어보기 위해 다가오자 맹랑하게 느낀 책장수가 그 소년을 골려줄 심산으로 이 책을 읽어보게 하고 맹자 1질에 대한 내기를 걸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나절 동안 그 책장수와 강항은 맹자책을 앞에 놓고 씨름을 벌인 일화로 유명하다. 

결국 강항(姜沆)이 안맹마을에서 한나절 사이에 이것을 모두 암송(暗誦)하고 ‘이 책은 이미 내 머릿속에 다 들어 있으니 사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유봉마을로 가버렸다. 그 책장수는 놀랍고 기특하여 그 책을 소년에게 선물로주려 하였으나 받지 않음으로 마을 어귀의 당산 나무에 매 달아 놓고 갔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후에 이 자리에 맹자정이라는 정자를 지어 강항(姜沆)의 천재성을 기려왔다. 지금도 그 자리(안맹마을) 부근에 孟子(맹자)정 비가 서있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6월에 강항은 이굉중 · 이용중 · 송약선 등과 함께 창의하여 양곡과 군기를 고경명 의병에 보냈다.

10월에는 영광군수 남궁현이 친상으로 사직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이응종 등 영광 선비 55명은 자발적으로 영광군 향토방위에 나섰는데 강항도 집안 친척 강태, 강락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영광군 영광읍 임진수성사에는 이들 55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1593년 12월27일 세자 광해군(광해군은 분조 역할을 함)은 전주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문신 11명, 무신 1천6백 명을 뽑았다. 이 때 강항은 병과(丙科) 5번째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강항은 우계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으로 박사 · 전적을 거쳐, 1596년 가을에 공조좌랑, 겨울에는 형조좌랑이 되었고, 1597년 2월에는 영광에서 휴가 중이었다.

5월말에 강항은 호조참판 이광정의 보좌역으로 남원성 군량미 운반을 담당했으나 남원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강항은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 의병 수 백 명을 모집했지만 왜군이 전라도를 침탈하자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9월 14일에 왜적들이 영광군을 온통 불태우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자, 강항은 둘째 형 준(濬), 셋째 형 환(渙) 등과 함께 배를 타고 피신했다.

20일에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싸우기로 하였는데, 뱃사공이 21일 밤에 신안 어의도로 뱃머리를 돌려 부친이 탄 배와 헤어지고 말았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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