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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수은 강항과 일본유교전파에 따른 역사적 고찰과 민간외교2

「간양록」사무치는 원한으로 격렬하게 일본(왜) 매도했으므로 일본인 읽고 질겁 할 정도
등록날짜 [ 2019년05월06일 13시05분 ]

1597년 9워 23일 아침에 강항 일행은 부친(강씨 사평공문중 팔 용과 칠 극(八 龍) 중 한 명 극검克儉)을 찾아 영광군 염산면 논잠포로 향했다.

그런데 왜의 수군이 나타나 강항 일가는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후 왜국의 후지와라 세이카는 강항을 비롯한 10명의 조선인 유학자에게 사서오경을 베끼게 하고, 자신이 직접 왜훈을 붙였다. 이 책이 바로 사서오경에 대한 주자의 집주에 일본식 훈을 단『사서오경 왜훈(四書五經倭訓)』이다.  

 

2. 당시 왜국의 춘추전국시대 상황
도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막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사망한 후 권력은 혼돈상태에 놓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부하로 기회를 엿보다가 오다 노부나가가 사망하면서 권력을 장악한다.

이 무렵 정유재란이 도요토미히데요시에 의해 발발하고 강항(姜沆)은 두 형을 비롯한 가족을 포로로 잡은 왜 수군은 부산 근처의 안골포(安骨浦)를 거쳐 대마도로, 그곳에서 일본 침략군의 출발 기지인 큐슈(九州) 서북단의 나고야(名古屋) 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큐슈 동북쪽에 가로누운 시코쿠의 나가하마(長浜) 항에 닿았는데 그때가 음력 10월 15일이었다.

나가하마에서 오쓰大津에 닿기까지의 15km는 그야말로 죽음의 행로였다. 선상(船上)에서 아흐레를 굶어도 죽지 아니하고 그 쇠잔한 몸으로 나가하마에서 오쓰에 이르기까지 열 발자국에 아홉 번을 쓰러졌다니 생지옥을 거쳐 도깨비굴에 닿은 것이다.

오쓰는 강항(姜沆)일가족을 붙들어온 왜의 장수 도도 다카토라의 영지(領地)다. 오쓰 거리는 강항 가족과 전후하여 붙들려온 일천여 명의 조선족이 즐비했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에 닿았다니 씻을 수 없는 왜놈들의 죄업(罪業)이 눈앞에서 보듯이「간양록」에 적혀있다.

강항(姜沆)은 오쓰 억류 생활 9개월에 두 번의 도주를 감행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강항(姜沆)은 달아나면서 성벽에다가 왜놈의 죄과(罪過)를 단죄하는 격렬한 방문(榜文)을 써붙였는데 그 조리 정연한 칼 같은 글에 왜인들의 가슴이 뜨끔했다.

'너희들 깨닫지 못하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미 그 얼마 전에 지진이 일어나고 홍수가 휩쓸었으며 강항(姜沆)이 방문을 써붙인지 두 달 뒤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죽음을 알리지 않으려고 그의 배를 갈라 소금을 채웠다고 『간양록』은 증언하고 있다.

오쓰의 영주인 도도 다카토라는 강항(姜沆)일가족을 오쓰에서 오사카(大阪)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또 후시미(伏見)로 데려갔다. 후시미는 당시 일본의 서울이다.

이곳에서 2년 남짓, 큰 선비 강항(姜沆)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그곳에서 일본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것으로 평가되는 학승(學僧) 후지하라 세이카(藤原惺窩)를 만났기 때문이다. 후지하라 세이카를 일본 성리학의 개조(開祖)로 평가하지만 알고 보면 세이카의 스승이 강항(姜沆)이다.

우리나라 인명대사전(韓國人名大辭典)에는 강항을 일본 성리학의 시조(始祖)로 적어놓고 있다. 개조나 시조는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강항(姜沆)과 세이카와의 관계는 이인삼각(二人三脚)으로 일본의 성리학을 근대학문으로 구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오쓰에'홍유강항현창비'가 세워진 까닭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후지하라 세이카에게 주자학(朱子學)의 깊은 학리(學理)를 가르쳐준 스승이 강항(姜沆)이며 또 그의 의뢰로 강항(姜沆)과 두 형(준, 환) 그리고 학자 10여 명이 참여해서 사서오경(四書五經) 대자본(大字本을 정서(淨書)하고 수진본(袖珍本: 옷소매에 넣을 수 있는 소책자)으로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의 사서(四書)와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곡례전경(曲禮全經)의 오경(五經)과 소학과 근사록(近思錄), 근사속록, 통서, 정몽(正蒙) 등을 필사(筆寫)했다.

수진본 16종(강항 휘초)은 현재 일본 왕궁의 국립공문서 관내 내각문고(內閣文庫)에 보전되어 있으며 강항(姜沆)의 서명이 뚜렷이 남아있다.

일본에서 근래(1991년, 2007년)에 '일본에 유교를 전한 조선인'이라는 주제로 2권의 저서가 간행된 까닭은, 강항(姜沆)이전에 이미 유교가 전해졌다 하더라도 원문(한문)을 해독하는 극히 한정된 몇 사람의 안중(眼中)에 머물러 있던 유교와 성리학을 강항의 도움으로 후지하라 세이카가 사서오경왜훈본(四書五經倭訓本 : 사서오경을 일본음으로 읽을 수 있게 만든 책)과 주자신주(朱子新注)의 훈점본(訓點本 : 새겨서 읽을 수 있도록 한 책)을 완성함으로써 유교와 성리학 접근을 쉽게 하고 그 문호를 넓혔으니 일본 근대화에 미친 강항(姜沆)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후지하라 세이카는 중국과 조선을 숭모(崇慕)하여 도항(渡航: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넘)을 꾀했으나 실패하고 독학(獨學)으로 어렵게 배움의 길을 걷던 참에 조선 사람 유학자 강항(姜沆)을 만남으로써 우리 글로 새겨 읽을 수 있는 왜훈본(倭訓本) 간행이라는 대사업을 완성했으니 두 사람을 개조와 시조라는 동의어(同義語)로 엮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뒤로 시대가 근대(近代)로 내려오면서 일본의 마을과 고을마다 배움의 집인 데라고야(寺子屋: 우리나라의 서당에 해당)가 서고 근대교육에 대한 열망이 불길처럼 일어남으로써 일본의 근대화가 촉진되었으니 일본 땅에 사상과 학문의 씨앗을 뿌린 강항(姜沆)의 이름이 '홍유현창비'로 섰음은 당연하다.

단지 강항(姜沆)이 써 남긴 「간양록」이 사무치는 원한으로 격렬하게 일본(왜)을 매도했으므로 일본인이 읽고 질겁을 할 정도라 일본이 조선 강점 이후로「간양록」을 보이는 대로 거두어서 불에 태워 없앴으니 강항(姜沆)의 이름은 오랫동안 잊힌 이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원본은 거의 씨가 말랐으므로 지식인 중에서도 강항(姜沆)을 깊이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랬던 것이 강항(姜沆)의 이름을 일본 전국에 알게 한 결정적인 사단(事端)은 1989년 2월 23일 일본의 NHK 텔레비전에서 방송된 45분짜리 「유자(儒者) 강항과 일본」이라는 프로다.

한국 취재까지 한 이 프로는 일본 전국에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그 전인 1980년 9월 1일자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 문화면에 「한․일을 이은 유자(儒者) 강항(姜沆)의 유적을 찾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강항(姜沆)재조명의 마중물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함꼐 오다 노부나가와 동맹을 맺어 그의 부하였던 인물 중에는 도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가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이 권력을 장악할 때 도쿠카와이에야스(덕천가강)는 절대 복종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사망하자 권력에 전면에 나선다.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해 히데요시를 지지하던 세력을 몰락시킨다. 마침내 도쿠카와 이에야스는 쇼군이 되어 도쿠카와 막부를 열게 된다.

히데요시 가문 편에 서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참전해 패배했던 다이묘들은 영토를 크게 상실하고 세력도 완전히 꺾인다. 이후 원한을 갚을 날을 기다리는데 그 시간은 약 200년이나 필요했다.

일본의 개항과 메이지유신은 막부를 반대하던 지역에서 살던 사무라이 계급에 의한 것이었다. 근본적으로 미국의 무력에 때문에 사무라이들의 무력을 이용해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런 특징 때문에 일본의 근대화는 군사력 강화를 바탕으로 했다.

이 무렵 도쿠카와 이에야스(덕천가강)는 후지하라 세이카의 수제자인 하야시 라잔을 막부정권의 시강(侍講)으로 교육을 맡기며 강독(講讀)으로 무에서 문으로 회귀(回歸)하면서 데라꼬야(일본식 서당)를 전국에 설치해 민심을 추스르고 불교중심에서 유교 쪽으로 질서를 잡고 있었다.

이무렵 막부에 도전한 사무라이들이 등장해 천황(일왕)에게 권력을 넘기라는 슬로건을 들고 막부에 도전을 하는데 당시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의 군사력과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를 따르는 다이묘들이 많았기 때문에 쇼군이 철저하게 무력적인 전쟁만을 추구했다면 메이지유신은 일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당시 유학이란 학문은 당시 쇼군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들은 아마도 권력을 다시 찾아 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천황(일왕)에게 권력을 전격적으로 넘겨주게 된다. 하지만 천황(일왕)은 형식적인 지배자였을 뿐 실권은 도쿠카와 이에야스 막부에 도전했던 사무라이에게 돌아간다.

이런 사무라이 중 한 명이 근대 대한제국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다.

3. 명치유신에 의한 일본의 서양화
메이지 유신 이후 세력을 장악한 사무라이 내각은 유교를 바탕으로 자신감을 갖고 근대화에 착수를 하는데 목표는 서양화였다.

즉, 과거 일본을 버리고 현재를 서양화를 해서 미래에는 서양과 같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일본인들은 당시 세계최강의 군사력을 가졌고 경제력을 가졌던 영국인들의 말,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미국인들도 영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영어는 일본이 서양화가 되는데 있어서 필수적인 외국어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일본식 변발을 스스로 잘라 버렸다. 서양인들처럼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잘랐으며 옷도 서양식으로 입기 시작했다.


4. 왜국의 성씨 유래
서양식은 무조건 좋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일본은 성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이름과 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도 성과 이름을 갖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모든 국민들은 이름 이외에 성을 그 아이가 태어나게 된 지명과 어느 곳에서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토대로 갖게 된다.


본 지 <강대의칼럼> 일본인 姓氏(성씨)로 본 근대 일본 참조!!
http://www.edaynews.com/detail.php?number=28419&thread=02r07
 

なかむら 중촌[中村](나카무라) やまもと [山もと·山下], 木下(기노시타) 나무 아래서, 水上(미나가와) -> 물위에서, 川邊 (가와베) -> 냇가 옆에서.  村井 (무라이) -> 동네 우물가에서,  大竹 (오오다케) -> 큰대나무에서, 麥田 (무기타) -> 보리밭에서, 小島 (고지마) -> 작은섬에서,  市場(이찌바) -> 시장에서 內海(우츠미) -> 안쪽바다에서,  高柳 (다카야끼) -> 높은 버드나무에서, 山野(야마노) ->야마우치, 中曽根康弘나카소네 야스히로...(미시비시 삼릉1)(三菱) 창업자)성씨 산내 등등 거시기한 장소로 일본사람들이 姓氏(성씨)를 만든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수히 많다.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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