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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도학과 절의의 선비, 죽천 박광전 (1)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보성군 용산서원에서
등록날짜 [ 2019년07월23일 00시05분 ]
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용산서원(龍山書院)을 간다.

용산서원은 도학과 절의의 선비, 의병장 죽천(竹川) 박광전(朴光前 1526∽1597)을 기리기 위해 2016년에 세워졌다. 1)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니 강당인 용산서원과 동재 수인재(修仁齋), 서재 숭의재(崇義齋)가 있다.

동재를 수인재, 서재를 숭의재라 이름 붙인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죽천 선생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먼저 자기 몸을 닦고, 함열현감 등을 하면서 인(仁)을 실천했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의(義)를 숭앙했다.

사진 1 용산서원

1707년에 숙종 임금은 용산서원에 사제문(賜祭文) 편액을 내렸다.
사제문을 읽어보자.
저 호남 땅을 돌아보니 산과 강이 수려하고
땅의 신령이 모두 모여 명유(名儒)가 끊이지 않았도다.
더구나 우리 조선은 수대에 걸쳐 배양하여
유(유희춘) ·기(기대승) 같은 이가 융성하던 시절에 드날렸네.
누가 그 뒤를 이으랴 문순공(퇴계 이황)의 뛰어난 제자로다. 2)

능침의 참봉에 제수하고 왕자사부에 임명하였네.
백성과 나라 위해 거듭 현감이 되어
아름다운 정치로 혜택을 베풀고
본심을 간직하여 사물을 사랑하니 참으로 구제함이 있었도다.

죽천 선생은 광해군의 사부였고, 1584년에는 함열현감으로 근무했다. 그는 관저와 동헌 벽 위에 “시민여상 (視民如傷 다친 사람을 보살피듯이 백성들을 사랑하고 가엾게 여긴다.)”

네 글자를 크게 써 붙여 놓고 백성을 다스렸다.
임진 · 계사년에 이르러 섬 오랑캐가 침략함에
여러 고을들이 궤멸되니 누가 그 기세를 막겠는가.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끓는 피로 맹세하고
적의 급소를 눌러서 조용히 막아냈도다.
크나큰 공을 알리지도 못하고 갑자기 세상을 뜨니
유림들이 몹시 경악하고 열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네.

죽천 선생은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각 지역에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았다. 1592년 7월 보성 관아에서 박광전 · 임계영 · 문위세 등은 전라좌의병을 일으켰다. 700명이 모였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순의 박광전은 의병장으로 나섰다. 보성의 천봉산에서 피신하다가 의병을 모아 화순 동복에서 왜적을 물리쳤다. 각 고을의 수령들이 피신한 상황에서 이긴 값진 승리였다.

그런데 관아를 버리고 도망간 고을 수령들은 관내를 이탈한 죄도 큰 데 박광전의 공을 시기하여 전라감사 황신에게 모함했다. 죽천은 전주의 전라감영까지 가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1월에 별세하였다.

용산서원을 둘러보고서 사당으로 올라간다. 숭모문(崇慕門)을 지나니 경덕사(敬德祠)가 있다. 덕을 존경하는 사당이란 의미이다.
 
사진 2 경덕사

그랬다.
죽천 박광전(1526∽1597)은 하서 김인후(1510∽1560), 고봉 기대승(1527∽1572), 미암 유희춘(1513∽1577), 일재 이항(1501∽1570)과 더불어 호남 5현(五賢)이었다.

아! 우리 호남은 본래 문헌(文獻)의 고장으로 불렀다.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학문으로 세상에 이름이 높았던 자는 오직 김하서 · 기고봉 · 이일재 · 유미암 그리고 우리 선생뿐이다.

하서의 학문과 조행, 절의와 문장은 높아서 따를 수 없고, 고봉의 명쾌한 의논이나, 일재의 강하고 굳세어 굽히지 않음이나, 미암의 넓은 지식과 많은 문견도 또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일이나, 실천의 독실함을 논하자면 저 분 현인들이 우리 선생과 더불어 누가 더 나은지 모르겠다.
- 우산 안방준(1573∽1654)의 ‘박광전 행장’에서-

죽천 선생은 실천의 선비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 인격완성을 위한 공부)을 독실하게 실천하였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는 국난극복에 앞장섰다.

1) 죽천 박광전의 문인(門人) 은봉 안방준, 난곡 정길 등이 1607년에 죽천 선생이 평소 강학했던 보성 대룡산 우와곡 동편 기슭(보성군 미력면 덕림리 우곡촌)에 용산서원을 세웠으나 1871년(고종 8)에 철폐되었다.
 
2) 죽천 선생은 1566년 겨울, 나이 41세에 퇴계 이황(1501∽1570)에게 공부를 배우기 위하여 안동을 갔다. 그는 겨울 한 철을 도산서당에서 지내고 1567년에 보성으로 돌아오면서 퇴계로 부터 ‘주자서 절요’ 한 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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