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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의칼럼>히로시마의 만찬 약속

오후 1시 40분에 도착한 후쿠오카공항서 히로시마 만찬 약속 앞두고 여유...전화위복의 기회란 오직 진실과 진정성!!.
등록날짜 [ 2020년01월22일 21시50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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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꼭두새벽에 일어나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오후 140분에 도착한 후쿠오카공항에서 히로시마 만찬 약속을 앞두고 여유를 부렸다.

차라리 모르면 여유가 없이 긴장해 곧장 움직이게 되어 있는데 설 알고 출발전 김포공항에서 알게 된 호텔근무 50대 남성으로부터 후쿠오카를 비롯해 시모노새키(하관)와 히로시마에 대해 많은 이여기를 들은 덕택에 자연스레 건방끼(?)를 떨게 되고 아는 척하며 끼어들면서 오늘은 참 재미있는 여행이겠구나 싶었다.

지하철로 이동해 하카타역에서도 내려 보고 텐진역에서도 내려 보면서 숙소도 직접 확인해 보면서 즐길 때까지만 해도 불과 몇 시간 후에 민망함을 거의 예상도 못하고 여유로웠다.

반성하건데 이건 순전히 몹쓸 작가근성이 나도 모르게 슬슬 발동되었기 때문이었다.

 

후쿠오카 지하철과 고속터미널 대합실
그토록 순을 죽여도 항상 건방끼가 문제다. 일본어도 아닌 영어를 혼합해 버스 매표여성에게 히로시마 도착시간을 말했더니 알았다는 듯 174~50분을 매표종이에다 적어 준다.

오케이!!”를 외치면서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가장 앞자리로 부탁하면서 예약하고서 내일은 어쩔 수 없이 신칸센을 타야하니 오늘만큼은 넉넉하게 일본 지방을 실컷 눈요기를 하면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런 꿈같은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있었다.


함께 우연찮게 동승한 30대로 보이는 일본 직장여성과 대화가 소통되는가 싶었는데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스마트폰에서 어플로 깐 파파고번역기를 켜고 소통을 위해 총동원 하는데도 제대로 된 대화가 통 어렵다.


일본 고속버스는1~9줄로 abcd식이고 버스안 가장 뒷좌석에 화장실 칸이 눈에 들어 왔다.

이렇게 버스 안 뒤 켠에 화장실이 있는데도 번번이 각 각 도착한 장소에서 일부러 그러는 듯 기사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또 그렇게 출발하고 있었다.

일본을 잘 모르는 사람이 결코 아니란 걸 히로시마에서 기다리는 인사들에게 보여주려고 계획했던 모든 저 혼자만의 생각들이 수포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이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들키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초조해질 무렵 16시가 넘어서자 히로시마발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직까진 상황을 모르는 터라 여유 있게 걱정하지마시라1740분이면 도착할거라고 차분하게 안심을 시키고 버스현황판을 분석하면서 옆자리여성에게 히로시마역까지가 앞으로 몇 분후에 도착하느냐고 물었다.


히로시마에서 만찬을 주선한 K 모 고위 인사는 그나마 카톡으로 천천히 오시라며 카톡을 남겨놔 더 좌불안석이 되고 만다.

그런데 더 웃기는 건 아까까지만  해도 수은강항과 후지와라세이카로 고무된 일본여성이 피곤하다는 식의 영어표현의 대화를 I am sleeping!!이라au 대화를 닫고 만다.

이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여성과도 더 이상 대화가 어려워 도착시간을 오로지 스마트폰으로 체크해 들어가는데 1740분이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히로시마는 수십여 km가 남아 있고 각 정류소마다 기사는 여전히 여유를 부리고 있어서 이젠 버스에서 내려 택시라도 잡아타고 싶었다.

 “Never give up”
이런 처지에서 더 강한 기운을 받기위해선 윈스턴 처칠이야기를 잠깐 해 볼 수 밖에 없겠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이 노년에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식에 연사로 초대를 받았다. 처칠이 단상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어떤 메시지가 나올까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Never give up” 그리고 청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또 다시 “Never never never give up ”절대 결코 결단코 포기하지 마라" 이 말만 하고는 연단을 내려가 버렸다. 그런데 이 말이 역사에 남는 가장 유명한 한 마디가 되었던 것.

처칠은 중, 고등학교 학창 시절 낙제를 여러 차례 당하고 육군사관학교도 삼 수만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학습장애 뿐만이 아닌 말을 더듬는 언어 장애가 있어서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힘들어 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처칠은 포기하지 않고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위대한 총리가 되고. 거기에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한다.

처칠은 학생들에게 "돌이켜보건데 내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많은 고난과 난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학생 여러분들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각 분야에서 하고자 하는 일로 적재적소에 쓰임 받는 인생이 될 것이다!" 

일본까지 건너왔는데 네거티브적인 생각이 온 머리를 지배해왔으나 “Never give up” 나도 모르게 처칠을 떠올리고 있었다.
1810여분쯤 무렵에 다시 전화를 한 K 모 고위 인사는 한국 손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모두 음식을 시켜놓고 담소를 나눈다.’는 말에 더 기겁을 하고 안절부절 하고 만다.

갑자기 어제저녁 꿈이 불현듯 생각났다.‘ 꿈조차도 안 좋았는데 이거 정말 큰일이구나.’ 싶고 계획의 실수로 많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친 게 안타까워 발만 동동 구르는데 K 모 인사는 누구라도 바꿔달라고 수신기를 통해 계속 외친다.


용기를 내 피곤해 잠자겠다는 여성을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건네 보기로 했다. 여성에게 오늘 매우 중요한 만찬 약속에 사적인 판단 잘못으로 히로시마가 온통 난리가 났음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지성이면 감천!!
꼭 그랬다!! 흉몽은 반전을 가져와 대길(大吉)이 될 수 있었다.

의외로 쉽게 납득이 되었는지 히로시마역 한 정거장 앞 히로시마고속터미널에서 내려 택시를 타며 된다고 전해온다.

옆자리 일본 여성도 마침 자신도 히로시마터미널에서 내린다며 터미널에서 적극 나서서 택시를 잡아주고 빠른 안내를 도맡아 나서 주며 앞장섰고 그 덕택에 요코가와 기차역 앞에 도착했다.

황급히 택시에서 내려 카톡 이미지를 다시 일본인에게 보여줬더니 이번엔 일본남성이 앞장서서 라쿠타키아 2층 술집 안까지 안내에 나선다.

이미 20여명의 재일교포와 일본 주요 인사들이 만찬 겸 신년파티는 종반을 향해가고 있었다.


야치요 회 야치요병원 이사장으로 보이는 분을 향해 큰 절로 넙죽 인사드리고 백배사죄를 청한다. DNA 비교 학으로 봐도 틀림없는 건 많이 닮아 있었다. 함께 기념촬영도 하고 지난주에 도쿄 한국대사관 방문과 한국문화원 방문을 말하고 2020년 사업계획을 수립했노라고 거듭 강조해 말한다.
 
한편, 여기 방문한 목적과 함께
수은강항선생 일대기를 꼭 강인수이사장님께 전달하고 싶었노라고 차분하게 인사말을 해 가면서 친분을 과시하는데 나도 모르게 저절로 움추러 드는 자세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히로시마의 밤의 역사
밤이 좋았다.

새벽  2시까지 히로시마의 밤 문화를 즐기며 교포사회에 녹아들고 있었다. 이것도 인연의 연속인데 수은선생의 포로생활을 노래한 간양록을 불렀던 조용필 국민가수와 교제했다는 한 여성의 술집에서 밤은 우리나라 문화를 더 풍요롭게 했다.

술이 취해 노래를 부르고 민요를 듣고 트롯을 들었다. 익숙한 장구소리에 노래가 더 풍요로웠다. 일본에서 온돌방을 체인점으로 운영하는 대표이자 사업가인 배 모이사도 혼자 목소리를 높이고 높이다가 제풀에 꺽이고 밤 문화에 녹아들고 있었다.

결국은 교포가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새벽 1시가 넘어서 해장국과 김치찌게를 시켜 먹으면서도 우리는 또 다시 민족성을 강조하고 애국심을 논했다..

 

그래도 새벽은 밝아온다.

느긋하게 새날을 맞이하고 간밤의 일을 복기하면서 자기성찰 하 듯 반성을 한다. 택시기사가 90세인데도 활기차게 택시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히로시마 역에 도착해 먼저 3개 국어로 쓰여 진 안내 글을 숙독하면서 거듭 읽고 충분하게 대처를 준비한다.덕분에 신칸센열차를 타고 하나카역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내려 주변에서 일본을 다시 즐기고 있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이 좋은 것을...!!
어제는 그렇게나 건방진 끼가 발동됨을 거듭 반성을 해 본다. 전화위복처럼 잘 정리가 되어 그나마 방문의 목적에 축복을 가져다준 건 수은선생의 강인함과 그 기운의 덕택이리라.

포로로 끌려와 31세에 도요토미히데요시(풍신수길)에게 그토록 당당하고 선비로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으니 그 강인한 정신력에 기인됨을 결론으로 풀어간다.


<편집자 주>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죽자 풍국묘를 세운 후 일본승(日本僧) 낭카겐코(南化玄興)라는 자가
“태양의 나라 일본에 일세(一 世)에 호사(豪奢)를 누려, 바다보다도 깊고, 산보다도 높은 태평의 길을 열었다.”라고 명문(銘文)을 써 붙이자  마침 이곳을 찾아왔던

조선의 유학자 강항(姜沆)은 이글을 뭉개버리고 다음과 같은 비판문을 써 붙였다.

반세경토일배(半世經營土一杯)     秀吉의 반세경의 성과는 겨우 흙 한 컵에 지나지 않고
십층금전만최귀(十層金殿謾崔鬼)  묘지에 솟아있는 십층의 황금누각도 허무할 뿐이다.
탄환역락타인수(彈丸亦落他人手)  결국 작은 탄환만한 땅도 남의 손에 넘어갔지 않느냐.
하사청구권초래(何事靑丘捲土來)  이런 보잘 것 없는 네가 어찌 조선을 침략했는가?

강항은 정유재란 때 포로의 몸이었다. 그는 일본에 체류(1597~1600. 5. 19)하는 2년 여의 짧은 기간 일본에 유학(儒學)과 주자학(朱子學)을 순승 순수좌인 후지와라 세이카에게 전수하며 유교를 전파한  일본유교의 비조가 되었다.


그런데 말이다. 일본에 유교를 심어 명치유신을 가져온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에도시대)에는 풍신수길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조선을 침탈한 전쟁광이로 묘사되다가 명치유신은 막부를 무너뜨린 정권으로 豊臣秀吉의 묘지와 신사를 크게 중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배신의 연속인 역사와 권력의 다툼에서 그 힘이 없어지면 금새 돌아서버리고 사건이 다시 이처럼 재발할 수 있는 곳이 일본인들의 변치않은 근성임을 우리는 국민적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전쟁 미치광이 도요토미히데요시를 다시 화려하게 재등장 시킨 역사적 비운의 흐름을 보면서 일본인들의 국민성을 기필코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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