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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부패는 망국의 지름길 -31회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청렴연수원 청렴강사)정약용, 탕론(湯論)을 짓다. (4)
등록날짜 [ 2020년04월20일 00시0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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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왕과 무왕의 군사행동은 천명(天命)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무왕(武王)의 군사행동도 탕왕과 마찬가지로 비난을 받았다.

대표적 사례가 백이와 숙제가 무왕에게 한 간언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백이·숙제 열전」에 나온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제후국인 고죽국(孤竹國)의 왕자였다.  고죽국의 제후는 숙제에게 자신의 뒤를 잇도록 했다. 그러나 고죽국의 제후가 사망한 후, 숙제는 제후의 자리를 형 백이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백이는 '아버지의 명령'이라면서 나라 밖으로 도망쳐버렸고, 숙제 역시 제후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 나라 밖으로 떠나버렸다. 고죽국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중간의 아들(백이의 동생이며 숙제의 형)을 제후로 세웠다.

그 후, 백이와 숙제는 서백창(西伯昌 : 무왕의 아버지인 문왕)이 노인들을 잘 모신다는 말을 전해 듣고 찾아가서 몸을 맡기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주(周)나라에 이르렀을 때 서백창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 아들인 무왕이 아버지의 시호를 문왕(文王)이라고 일컬으며 나무로 만든 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군사를 동쪽으로 진격시켜 은나라 주왕(紂王)을 정벌하려고 했다.

이에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말고삐를 붙잡고 간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장례도 치르기 전에 전쟁을 벌이는 것을 어찌 효(孝)라고 할 수 있습니까? 또 신하의 몸으로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죽이는 것을 어찌 인(仁)이라고 하겠습니까?“

이때 무왕을 보좌하는 좌우의 신하들이 백이와 숙제를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태공망 여상(呂尙)이 "이들은 의(義)로운 사람들이다."라고 두둔하였고 그들을 보호하여 돌려보냈다.

태공망 여상은 강태공이다. 강태공은 동해(東海)에서 사는 가난한 사람이었는데 집안을 돌보지 않아 그의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전한다. 하루는 웨이수이강[渭水]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데,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서백(나중에 문왕이 됨)을 만났다.

서백은 그와 문답을 통해 인물됨을 알아보고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이후 그는 무왕을 도와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으로 제(齊)나라 제후에 봉해졌다.

“ 그 뒤 무왕이 은나라를 평정하고, 천하 제후들이 주(周)나라를 종주국(宗主國)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백이와 숙제만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주나라의 곡식과 녹봉을 먹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고사리를 뜯어 먹고 살았다. 백이와 숙제는 굶주려 죽게 되었을 때, 아래와 같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저 서산(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뜯네.
폭력으로 폭력을 바꾸면서 그 잘못을 모르는 무왕(武王).


신농(神農)·순(舜)임금·우왕(禹王)의 태평성대는 홀연히 지나갔으니
우리는 앞으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아 이제는 죽음뿐 이미 다한 내 운명이여.”

백이와 숙제는 결국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 노래로 미루어 본다면 원망한 것인가? 원망하지 않은 것인가?
그런데 백이와 숙제의 죽음에 대하여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백이와 숙제는 은나라가 망한 뒤에도 은나라에 대한 충성을 버릴 수 없으며, 고죽군 영주로 받는 녹봉 역시 받을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었다.
 

이때 왕미자라는 사람이 수양산에 찾아와 백이와 숙제를 탓하며, “그대들은 주나라의 녹을 받을 수 없다더니 주나라의 산에서 주나라의 고사리를 먹는 일은 어찌된 일인가.” 하며 책망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고사리마저 먹지 않았고, 마침내 굶어 죽었다. 



백이와 숙제는 끝까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널리 알려졌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문득 고려 충신 정몽주와 단종을 섬긴 사육신 성삼문이 생각난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공신 정도전과 변절한 신숙주도 생각난다.  

아무튼 유가(儒家)는 ‘요순우탕문무주공’의 일곱분을 성왕(聖王)으로 추앙한다.


사진 1 다산 생가 전경 (경기도 남양주시)

사진 2  여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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