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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길 위의 역사 2부 - 무오사화 90회

김세곤 (칼럼니스트) 사간 이의무, 헌납 김일손 등이 상소하다 (3)
등록날짜 [ 2020년05월11일 09시45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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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 사간  이의무, 헌납 김일손 등의 상소는 이어진다.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 이후로 마음공부를 할 줄 아는 사람으로는 송태조(宋太祖)만한 이가 없었습니다. 편전(便殿)에 거처하며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좌우의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으니, ‘일찍 일어나 좋은 기분에 한 가지 일을 잘못 결단하였다.


그래서 마음이 좋지 않다.’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일이 매우 미미하여 좌우에서 모르는 것이었지만, 태조는 이처럼 마음속으로 자책하여 불안하였던 것이니 곧 전하께서 본받으셔야 할 일입니다.”

송태조는 송나라(960∼1279)를 세운 조광윤(趙匡胤 927∼976)이다. 

조광윤은 오대(五代) 유일의 명군인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죽은 뒤 근위병(近衛兵)의 추대를 받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960년에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조광윤은 927년에 근위장교 조홍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군인의 아들인 조광윤은 집안 덕을 거의 보지 못하고 21세 때 집을 나와 천하를 떠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곽위라는 절도사의 부하가 되었는데, 곽위는 950년에 후한을 무너뜨리고 후주의 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조광윤의 출세하기 시작했다. 2년 뒤 그는 근위대장 신분으로 수도 개봉에서 근무하다가 태자 시영(柴榮)의 눈에 들어 그의 오른팔이 되었고, 태자 시영이 954년에 세종으로 즉위하면서 실세 장군으로 떠오른다.

그런데 ‘오대십국 최고의 명군’ 세종이 그만 959년 거란 원정길에 병사하고 만다. 황제의 자리는 일곱 살에 불과한 공제에게 돌아갔다. 나이 어린 황제와 강력한 절도사, 정변의 조건은 완벽하게 갖춰졌다.

마침내 960년에 거란군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출정했던 조광윤은 ‘진교의 변’을 만난다. 개봉 북쪽의 진교역에서 머물었을 때, 부하 장수들이 술에 취해 잠든 그에게 억지로 황제의 옷을 입히고 황제로 추대한 것이다. 얼떨결에 황제로 추대된 조광윤은 진교에서 회군하여 황궁을 점령했다.


그리하여 공제의 양위를 받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송이라고 했다. (그리고 보니 ‘진교의 변’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런데 송태조는 즉위 후 자신에게 제위를 넘겨준 어린 황제를 비롯한 이전 왕조의 황족을 살육했던 수문제와 달리, 황제와 친인척들을 융숭히 우대했다. 또한 한나라 고조와 달리, 자신을 황제로 이끌어 준 공신들을 ‘토사구팽’시키지 않았다.

한편 송태조는 괄괄한 무인 출신답게 곧잘 버럭 성을 내기도 했는데, 곧바로 자신이 지나쳤다고 반성하며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한다. 또한 옷 한 벌을 빨고 또 빨아가며 입고, 생일 같은 잔칫날에도 보통 가정처럼 로 상을 차리게 하는 등 죽을 때까지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제위(帝位)에 오르자 문관을 우대하고 문치주의를 숭상했다. 그래서 사대부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고 이들 사대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정책을 폈다. 바로 과거제도의 강화였다. 황제가 직접 시험 문제를 내고 합격자를 뽑는 전시(殿試)제도를 처음 도입하고, 과거의 규모와 횟수를 크게 늘려 여기서 뽑은 관리들을 종래 세습 귀족들이 차지하던 관직에 충원했다.

또한 태묘 안에 ‘맹서비’를 세워 두 가지 유훈을 후손에게 남겼다. 하나는 “후주의 시씨 자손들을 죽이지 말고 우대하라.”였고, 또 하나는 “사대부와 상소를 올린 사람을 죽이지 마라. 아무리 불쾌한 말을 하더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 였다. “이를 어긴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이로써 송나라는 중국 사상 최초의 ‘사대부의 나라’가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조선왕조실록에는 건국 초기부터 송태조가 자주 언급된다. 1398년 (태조 7년) 5월18일 자 태조실록을 읽어보자.   

“유비고(有備庫)를 처음 설치하고, 태조는 도승지 이문화에게 명하여 사사(使司)에 전지하였다.

송태조(太祖)는 국용(國用) 외에 별도로 내고(內庫)를 세웠으니 자기 개인의 저장을 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일찍이 측근의 신하에게 말하기를, ‘군량(軍糧)과 기근(飢饉)에는 모름지기 미리 준비해야 되는 것이니, 일이 일어나 조세를 과중하게 징수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짐(朕)이 8주(州)의 인민이 오랫동안 오랑캐에게 함몰(陷沒)된 것을 민망히 여기어 5백만 민(緡 돈꿰미)을 저축하여 산후(山後 : 태행산(太行山)의 후면을 말함)의 여러 군(郡)을 교환하도록 하겠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송 태조가 내탕(內帑)을 세운 것은 공용(公用)이지 사용(私用)은 아니다. (후략)”



사진 1 청계서원 정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사진 2 청계서원 강당

사진 3 청계서원의 사당  청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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