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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칼럼>호찌민 기행 (1)

김세곤(역사 칼럼니스트)민족해방군 붉은 바탕에 황금별이 박힌 베트민 깃발 휘날리며 혁명을 감행
등록날짜 [ 2020년06월05일 12시27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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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를 두 번 다녀왔다. 하노이 바딘 광장은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찌민(胡志明 1890∼1969)에겐 두 가지 모습이다. 하나는 1945년 9월 2일의 독립선언 연설, 또 하나는 1969년 9월 2일 서거 후 안치된 호찌민 영묘(靈廟)다.

사진 1  하노이 바딘 광장

1945년 9월2일 바딘 광장, 55세의 호찌민은 50만 명 앞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권이 그러한 권리이다’

이 불멸의 선언은 1776년 미국 독립선언문에 나오는 문구(文句)입니다.

더 넓게 해석한다면, 모든 민족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며, 살 권리, 행복할 권리, 자유로울 권리를 지닌다는 말입니다. 1791년 프랑스 혁명 때 발표되었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할 권리를 가지고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항상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이는 실로 거부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80년이 넘도록 자유와 평등과 우애의 원칙을 능욕하며, 우리 조국을 더럽히고 우리 동포를 억압했습니다. 그들은 인류애와 정의라는 이상과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민족에게서 모든 민주적 자유를 빼앗았습니다. (중략)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전 민족이 권력을 되찾기 위해 일어났으며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설립했습니다. (중략) 우리 민족은 거의 1세기 동안 우리를 옭아맸던 사슬을 끊고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동시에 수 세기 동안 군림하던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민주공화정을 설립했습니다. (중략)

80년이 넘는 세월동안 용감하게 프랑스의 속박에 저항한 민족이라면, 지난 몇 년간 파시스트에 반대하여 단호히 연합국 편에 섰던 민족이라면, 독립과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베트남 민주공화국 임시정부는 세상을 향해 엄숙히 선포합니다.  베트남은 자유와 독립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사실상 자유로운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인민은 몸과 마음을 다하여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더라도 자유와 독립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호치민 지음·배기현 옮김, 호치민 식민주의를 타도하라, 프레시안 북, 2009, p101-104)

사진 2  호찌민 영묘

베트남의 국부(國父) 호찌민(胡志明)! 


 『호치민 평전』을 쓴 윌리엄 듀이커는 그를 ‘반은 레닌이고 반은 간디’라고 평했다. 호찌민(원래 이름은 ‘응엔 신 꿍’)은 프랑스 식민 치하인 1890년에 유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그는 18세 때 조세 반대 시위를 벌이다 퇴학당하면서 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1911년에 21세의 호찌민은 조국을 떠나 세계 각국으로 유랑한다.

그는 외국 배에서 요리사 보조 일을 하며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각종 잡일을 하면서 프랑스,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 알제리아, 미국 · 영국 등 세계를 일주하면서 ‘강대국은 어떻게 세계를 지배했는지’를 를 배웠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9년 호찌민은 ‘응엔 아이 꾸옥’(애국자란 뜻)이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베트남 애국자 연합’을 결성하고 <베트남 민족의 요구> 글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호찌민은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찌민의 요구는 철저히 묵살되었고, 호찌민은 윌슨의 ‘민족자결   주의’는 허구였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후 호찌민은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대혁명을 몸소 체험하고, 모스크바 국제 레닌학교에서 수학했다. 박헌영은 레닌학교에서 호찌민을 만났다고 알려져 있다. (‘박헌영 평전’에서)

1930년에 호찌민은 홍콩에서 베트남공산당을 창당했고, 1941년에 베트남에 돌아와 공산당과 민족부르주아의 연합전선인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했다. 베트남을 떠난 지 30년 만이었다.

독일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1945년 3월9일에 일본은 인도차이나의 프랑스를 기습 공격했다. 독일의 괴뢰정권 프랑스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호찌민은 일본을 축출하기 위하여 미군에 협조했다.


베트민은 중국 소재 미국 전략첩보부(OSS)에 베트남 소재 일본군 정보를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무기와 의약품 등을 제공받아 미국과 협조 관계를 형성했다.

8월15일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호찌민이 이끄는 민족해방군은 붉은 바탕에 황금별이 박힌 베트민 깃발을 휘날리며 혁명을 감행했다. 하노이를 장악하고 이후 중부 · 남부도 해방시켰다.


허수아비 바오다이 왕정은 무너졌다. 9월2일에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한편 1945년 9월의 서울은 어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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